2011년 04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 보
    종교와 정치 1
    종교와 정치 2
    종교와 정치 3
    다람살라소식
    금강계단
    소박한 삶
    취재현장에서 본 불교
    절문밖 풍경소리
    화엄사 선등선원
    즐거움을 뿌려라
    반야샘터
    건강한 생활
    입시광장
    치아건강 칼럼

과월호보기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다는 것

이찬수 목사
종교문화연구원장


1. 다원화 시대
유럽이든 아시아든, 근대 이전에는 봉건 사회 내지는 특정 이념에 기반한 전체주의적 왕조국가 형태를 하는 곳이 많았다. 정치와 종교는 대체로 통일되어 있었고, 개인보다는 집단이 더 중시되었으며, 일차산업 중심의 생산력은 사회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물적 토대였다.
그러다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하면서 경제 제도에 변화가 생기고, 자본주의가 발흥했으며, 도시화가 이루어졌고, 물건들이 대량 생산되면서 분업도 가속화되었다. 분업이 활발해지면서 다양한 제도들(institutions)이 생겨났고, 그만큼 인간의 역할도 다양해졌다. 아래로부터의 목소리가 커졌고, 국가종교 형태는 쇠퇴하거나 사라져갔으며, 거대 집단 보다는 개인의 목소리가 존중되어 갔다.
수직적 신분 사회는 해체되었고, 수평적 평등사회로 이전되었다. 특별히 약속한 집단의 내부가 아니고서는, 누가 누구에게 명령하는 구조는 사라졌다. 개인의 신념과 양심이 긍정되고 존중되는 사회로 급격히 이전되어 간 것이다.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세계적으로 전파한 세력이 오늘의 용어로 하면 ‘시민’(Bourgeoisie)이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의 이론을 요약하면, 이 시기 ‘시민’들은 한편에서는 공적인 영역(public sector)의 질서에 속해 있으면서도, 삶의 의미는 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private sector)에서 찾았다. 그렇게 해서 공(公)과 사(私)의 구분이 생겨났고, 사적인 영역에서는 개인 기호에 따라 여러 가지 선택을 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당연히 특정 종교의 사회적 독점이 사라지는 “다원화” 현상이 두드러져갔다. 이 다원화는 인류사의 아래로부터 벌어진 조용하면서도 거대한 혁명이다.


2. 세속화 시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면서 정치와 종교도 상호 분리되어갔다. 이전에는 왕의 종교가 곧 국가의 종교가 되는 것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개인의 양심과 신념, 그리고 종교는 국가 권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별 종교들이 아무리 자신들의 교리를 절대시한다 해도 그것이 공적 차원에서까지 용인되지는 않는다. 하나의 종교는 원칙적으로 하나의 ‘의견’ 수준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여러 종교들이 고객의 선택을 기다리는 백화점의 상품처럼 간주되는, 이른바 ‘시장 상황’(market situation)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을 넓은 의미에서 ‘세속화’(secularization)라고 한다. 진리의 초월성 보다는 내면성이 강조되고, 전체주의적 보편성보다는 개인주의적 특수성이 두드러지는 사회 현상인 것이다. 진리를 하늘 높은 곳에서 찾았던 과거와는 달리, 진리라는 것은 현실 저 너머 내지 위에 있다고 상상하기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물론 세속화라고 해서 단순히 초월의 상실이나 종교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초월의 내면화’라고 해야 옳겠다. 조직이나 제도로서의 종교에 참여하는 비율은 상대적으로 약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가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랑이나 자비와 같은 가치는 물론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 자체는 개인의 일상사 안에서 나름대로 지속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흔히 ‘사회가 자꾸 세속화한다’는 비평적 푸념도 난무하지만, 종교 자체가 소멸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제도적 종교에서 개인적 종교로 종교적 양상이 변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 가치를 스님이나 목사 혹은 신부 등 종교 조직이나 제도에 기반한 전문가들이나 ‘하늘’ 같은 인간 외부의 영역에서 찾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와 인간의 내면 혹은 자연에서 찾는 분위기가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내면을 판단하는 객관적 기준이란 없으며, 개개 인간 안에 ‘내면화된 초월’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도 담겨있다. 전 국민을 관통하는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이념보다는 개인이나 개개 집단 등의 작은 목소리가 존중되는 사회로 급격히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거대 담론이 아닌 작은 이야기들 중심으로 역사를 재해석하고 있는 근대 후기적 시각도 이러한 세속화의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나온 것이다.
3. 정교 분리의 시대
이러한 세속화는 전에 없던 상황을 연출한다. 무엇보다 초월적 가치가 내면화하고 공공적 조직성이 약해지면서, ‘종교’라는 것을 특정 제도에 소속된 사적인 행위 정도로 간주하는 경향이 커져갔다. 이것은 이미 말한 대로 개인의 종교를 공적 권력이나 권위를 이용해 타인에게 강제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정치권력을 이용해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내적 양심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는 시대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있는 국가들에서는 국가 헌법에 이런 정신을 명문화시켰는데, 이것이 정치와 종교의 분리, 즉 정교분리의 원칙이다.
흔히 오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교분리란 종교인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스님이든 신부든, 국민의 한 사람이라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그것은 국민 개개인에게 보장된 권리이다. 정교분리란 공인이 공인의 지위를 활용해 다른 개인에게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당연히 국교라는 것도 불가능하다. 국가 권력으로 개인의 내적 양심과 종교를 조절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시대적 요청이라 할 이러한 정신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의도적으로 오해하면서, 개인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주입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여전히 많다. 시대정신을 내면화시키지 못한 종교인들 속에 꿈틀거리는 원초적 욕망인 것이다. ‘세속화’와 ‘다원화’를 타락으로 간주하고서, 자신의 신념만을 순수한 것으로 간주하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자세인 것이다.
최근 ‘종교편향’이라는 말이 회자되어 왔는데, 종교편향을 일으킨 이들은 대체로 정교분리의 정신을 내면화시키지 못한 이들이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지방자치단체장에게든 누구에게든, 개인의 종교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순수한 개인적 종교 행위가 아닌, 그 개인의 배후에 있는 공적인 권력과의 관계성 속에서 종교 행위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정교분리에 위배된다. 최근에 ‘국가조찬기도회’라고 하는 ‘공적’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일을 두고 여론이 분분하고 비판의 목소리가 비등했는데, 이것은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이명박 ‘개인’의 종교 행위로서보다는 국가를 위한 기도회에 대통령의 신분으로 초청된 자리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경솔한 행동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정교분리란 나의 종교적 신념이 소중하면 남의 종교적 신념도 소중하다는 기본적 사실 위에서 이루어지는 원칙이다. ‘남’을 ‘이웃’으로 생각할 줄 알고, 그 이웃을 자기 이상으로 높일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의식 위에서만 성립되는 자세이다. 누구에게든 마찬가지이지만, 이러한 의식은 공직자에게는 더욱 더 요청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