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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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아웃!

수덕스님
대원사 템플스테이 관장


지식과 신념은 세계를 떠받치는 두 원천이다. 종교와 정치도 그 원천에 포함된다.
얼마 전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조찬기도회 통성기도사건을 보면서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그 두 원천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전국민이 지켜보는 무대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당히 행하던 이 대통령 내외의 그 ‘빛나는 종교적 순교행동’은 정치와 종교 앞에서 늘 은자(隱者)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의 ‘불순한(?) 상식’을 일시에 깨뜨려버린 홈런포였기 때문이다.
정치 종교적으로 인간은 두 종류로 분류된다.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us)와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다. ‘렐리기오수스’(religious)는 종교적인 분류이고, ‘폴리티쿠스’( politicus)는 정치적인 분류이다.
오늘 이 두 분류법이 나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은 ‘정치적인’(politicus) 동물이자 ‘종교적인’(religious) 동물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더불어 종교와 정치, 그 둘의 목표가 똑같이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종교를 갖는 연유는 크게 두 가지로 대분된다. 행복과 두려움이다. 인간은 미지의 세계(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자신의 행복을 지키고, 병과 곤경으로부터 자신의 행복을 방어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고 거기에 의지해왔다. 정치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적 위험과 공포로부터 자신의 행복을 지키고 방어하기 위해 사람들은 정치라는 집단이기주의를 만들고, 그 집단이기주의에 기댐으로써 자신들의 행복과 평안과 번영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고대부터 종교와 정치는 통치와 리더, 밀월과 결별의 역사를 되풀이해왔다.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 정치는 종교를 통치 이념으로 불러들였고, 그러한 정치와의 밀월을 통해 종교는 정치권력의 도움을 얻어 교세확장과 집단이기주의의 뿌리로 삼았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종교가 정치 위에 군림함으로써 오히려 정치적 탄압을 받기도 했다. 말하자면 정치와 종교는 같은 수분(水分)을 가진 물이되, 영원히 하나로 동화될 수 없는 ‘물과 기름’의 양면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는 바르게 쓰면 서로에게 자양분이 되지만, 잘못 쓰면 서로에게 칼과 송곳이 되는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이형동체(異形同體)로 동거해온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대부분 긴장 관계 속에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통치 수단으로 종교를 불러들이면 불러들일수록 종교는 자신도 모르게 정치집단의 목적으로 군림하려 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정치는 종교 탄압을 통해 새로운 권력창출과 새로운 통치 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종교와 정치의 그러한 비련의 애증 관계는 현대사에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코란을 최고의 통치 이념과 수단으로 삼아 몇 십 년이 넘게 철통같은 1인 독재체재를 유지해오고, 그러기 위해 교묘한 경전해석을 통해 몇 천 명이 넘는 대량학살과 테러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자행하는 오늘의 중동 상황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와 종교의 잘못된 만남은 결국 모두에 말한 세계를 떠받치는 두 개의 원천의 문제로 귀결된다. 잘못된 지식과 신념은 ‘허리에 폭탄을 두르고 행복하게 죽어가는 중동의 순교자들처럼’ 인간을 얼마든지 맹목(盲目)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과 신념이 지극히 순결하고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러한 맹목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에서 정견(正見)을 처음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선택한 것이 절대이고, 유일한 선(善)이라는 판단은 잘못된 일이다.


맹목은 인간을 목적으로 받들지 않고 수단으로 삼는다. 맹목의 종교 또한 인간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앞세운다. 그리하여 그 수단을 방패로 독존과 아집과 집단이기주의의 늪에 빠져 사회혼란과 불화를 야기한다. 그러면서 그것만이 잘못된 이 세상과 사회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최고의 선(善)이며, 그 선을 믿을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국가라는 무대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당해야할 이 대통령 내외의 무릎 꿇고 올리는 통성기도를 내가 그 맹목과 가장된 선(善)으로 보았다면 지나친 잘못일까.
그러나 내 눈에 비친 그 모습은 일국의 대통령과 영부인으로서 사천팔백만 관객 앞에 드러내놓고 행할 수 있는 연극배우의 액션은 아니었다. 일국의 대통령과 영부인은 강의 조그만 지류(支流)가 아니라 본류(本流)이자 균형과 절제를 통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큰 바다이어야 한다. 아마도 임기가 끝난 뒤의 행동에도 갖은 룰이 적용 될 것이다.
종교, 정치, 과학에서 흔히 보이는 독단은 모두 다 인간의 생각이 우주의 실상과 진리를 담아낼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독단은 집단이 만들어낸 생각의 감옥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사람들이 자신을 가두는 그 감옥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감옥이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과‘나는 알고 있다’는 그릇된 자만심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생각’이라는 믿음이 갖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생각은 작은 인간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야구의 참맛은 홈런에 있다. 9회 말 투아웃 상황에서의 역전 홈런포는 우리를 짜릿하게 한다. 그러나 점수 차가 많이 벌어진 상황에서의 홈런포는 그것이 비록 만루 홈런이라도 우리를 식상하고 지루하게 한다. 작금의 우리나라의 정치와 종교, 아니 이명박 대통령 내외의 ‘빛나는 종교적 순교행동’을 야구에 비교하면 어떨까?


2년 뒤의 9회 말 투 아웃 상황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