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4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 보
    종교와 정치 1
    종교와 정치 2
    종교와 정치 3
    다람살라소식
    금강계단
    소박한 삶
    취재현장에서 본 불교
    절문밖 풍경소리
    화엄사 선등선원
    즐거움을 뿌려라
    반야샘터
    건강한 생활
    입시광장
    치아건강 칼럼

과월호보기

일본인(日本人)의 헌신적(獻身的) 삶
탄탄스님
동국대강사·대덕사주지

한국 사회에서 무사도라는 말은 생소하지만, 일본에서는 대단한 관심을 끄는 분야이다. 우리에게는 무사도라는 말보다는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하면 더 이해가 빠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일본에서도 무사도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고요군칸(甲陽軍鑑)”, “하가쿠레(葉隱)”, “무사도초심집(武士道初心集)” 등 에도시대에 들어와 발간된 서적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사도란 가마쿠라 무사의 전통을 이어, 전국의 쟁란(爭亂)을 통하여 형성된 무사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사의 삶의 방식의 저변에는 늘상 죽음이 각오된 삶이었다. 항상 싸움터에서 살고 죽는 일이 일상적인 것이 무사의 삶이다. 이러한 무사에게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겁쟁이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경험해본 일이 없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인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언제인가는 죽어야 하며, 죽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동서고금의 영웅호걸도 북망산의 무덤을 이루고 화장장의 연기가 되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하면 우리네 삶은 너무도 허망하기만 하다. 모든 종교가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도 이러한 죽음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 죽음에 대하여 어느 시대의 종교인 못지않게 죽음의 문제에 대항한 이들을 거론한다면 일본 중세의 무사들의 정신과 사상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무사는 명예로운 죽음을 늘 갈망했다. 어차피 한 번 죽어야 한다면 욕된 죽음보다 명예롭고 의로운 죽음을 선택해야 했다. 이를 헌신(獻身)이라고 할 수 있다. 헌신은 무사에게 최고의 사회규범으로 ‘이름’에 상응한다. 이름이란 일면에 있어서 타인지향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동시에 내면적이고 논리적인 실질을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름은 개체의 생명을 넘은 것으로 의식되어, 무사에 대해 절대의 규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헌신의 대상이 주군이라는 유한한 존재라고 해도 헌신 자체가 영원한 생명을 갖는 가치가 되어 얻는 것이다. 수모를, 또는 수치를 받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름 그것이 헌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일본의 무사는 삶을 긍정하면서도 삶에의 집착을 끊고,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죽음의 각오를 규범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름과 이어지고, 태도의 측면에서 보면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무사의 생사관의 기본적인 구조는 헌신과 명예에서 생각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이러한 무사도는 중국적 사유를 바탕으로 전개되어온 선불교(禪佛敎) 가 한국, 일본으로 전해져 자국 고유의 정신과 융합하며 독특하게 발전하여왔다. 일본의 조동종의 도겐선사(道元禪師1200~1253)에 의하여 체계화되어 더욱 발전하여온 선은 일본 문화와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무도철학을 형성시킨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일본 무도정신에는 선의 정신이 온전하게 담겨져 왔고 일본 정신문화 창달에 큰 공헌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선과 무도에 대한 관심을 지닌 이라면 일본 전국시대말기에서 도쿠가와 막부초기를 살다간 ‘다쿠앙’스님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요리를 하는 식당에 가면 작은 접시에 올려 담아주는 노란 ‘단무지’를 다쿠앙이라고 하는데, 그 다쿠앙의 원조가 다쿠앙 소호(澤庵宗彭, 1573~1645) 선사(禪師)이다.
다쿠앙 선사가 말년의 어느 날, 주지로 주석하는 동해사(東海寺)에 당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찾아와 담소를 즐기다 공양시간이 되었는데, 단무지를 보고는 처음 먹어보니 그 맛이 담백하고 아삭아삭한 것이 일품이었다. ‘이에야쓰’는 그 담백한 맛에 매료되어 음식 이름을 물어보니 다쿠앙 선사는 특별한 이름이 없고 그저 절에서 먹기 위해 소금에 무를 절인 것이라고 답하였다. 이에 이에야쓰는, “참 맛이 담백하고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별미인데, 대사께서 고안하셨으니 앞으로 다쿠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이후 단무지(다쿠앙)는 쇼군의 지시로 일본 전역에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구한말 일제 침략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서 한국에도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다쿠앙은 이에야쓰, 호소가와 등으로부터 귀의를 받아 왔으며 다쿠앙 선사가 에도에 주석하는 중에 불편할 것을 염려하여 동해사를 지어 시주하였던 것이다. 다쿠앙선사가 당시 실력자들과의 교류를 입신출세 또는 권세지향으로 보는 경향도 없지 않지만, 불법포교에 있어서 지위고하와 남녀노소를 구별하는 것은 애초 불법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쿠앙은 그 시대에 시인이었으며, 서예가이고 화가이기도 하였다. 또한 차의 명인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선과 검도를 일치시키데 노심초사 힘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또한 『부동지신묘록(不動智神妙錄)』이라는 저술을 통하여 그 시대 무사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검의 달인이면서 『오륜서(伍輪書)』라는 병법서를 지은 미야모토 무사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검술 사범인 야규우무네노리 등이 있으며, 다쿠앙 선사의 『부동지신묘록』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의 선비 강항에 의하여 일본에 전해진 퇴계이황의 경(敬)사상까지도 폭넓게 포괄하고 있다.
『부동지신묘록』의 핵심을 발췌해 보면 대략 이러한 내용이다.
첫째, 마음이 바깥 경계에 통하지 않는 지혜 부동지(不動智)란 불교의 중도(中道), 즉 양변이 끊어진 마음의 상태에서의 지혜를 말하며 양변이란 바깥의 경계와 그에 따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으로 허상을 말한다.
둘째, 부동지가 없어 상대의 움직임에 매여 놀아나는 것 무명주지번뇌(無明住地煩惱)를 경계한다.
셋째, 돌을 바위에 탁치면 불꽃이 튀기듯이 반응하는데, 그때 치는 동작과 불꽃사이에는 한 치의 틈도 없듯이, 마음이 사물에 반응하는 것도 이와 같아야 한다.
넷째, 마음을 두지 말라.
다섯째,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중세에 발달하였지만, 무사도라는 표현 자체는 에도시대(1603~1868)에 이를 때까지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형성된 무사의 도덕을 유교와 병행하여 합리화 하려는 움직임이 에도시대에서 명백하게 나타난 것이다.
또한 무사도의 중요한 변용은 메이지시대에 이르러 더욱 일반화 되었으며 시들해지기 시작하며, 근대화를 이룬다. 1716년 출판되어 무사도의 규범이 된 “하가쿠레(葉隱)” (무사의 수양서)가 있다. “하가쿠레”는 야마모토 츠네토모(山本常朝, 1659~1729)의 어록을 타시로 마타자에몬(田代又左衛門)”이 기록한 것이다. “하가쿠레”의 권두는 무사도를 논할 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무사도라 함은 죽는 일을 찾아내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는 야마모토가 죽음을 주창하는 것은, 삶에 대한 집착을 초월하는 것이 높은 정신적인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무사에게 헌신의 순결함은 최고의 선(善) 이었다.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으로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우려되는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에서 방사선 피폭 위험을 무릅쓴 원전 직원 181인.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복구 작업에 투입되었다. 국제사회에서의 비관적 전망이 잇따르고 있지만, 핵 재앙을 막기 위해서 온 몸을 던져 181인의 결사대가 헌신적 의지로 원자로에 접근하여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들에게서 그 옛날 무사들이 헌신과 명예로운 죽음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무사의 삶이 각인되는 건 왜일까?
사상 최악의 대지진으로 수만 명이 사망하고 실종된 일본의 현실에서 피폭을 각오하고 더 큰 희생을 막아야겠다는 죽음을 각오한 장한 모습에서 헌신의 가치가 더욱 거룩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