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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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실천하고 있을까

현재호
후애마이(Who am I)연구소 소장·Blog.daum.net/hyun-jaeho


지난 호에는 ‘의로운 실천(돈점)’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돈점頓漸은 불자의 삶에 진리가 얼마나 녹아들었는지 또는 녹여 넣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다겁생의 우리 몸이 업業으로 똘똘 뭉쳐있는데 어느 공간에 진리를 녹여 넣을 수 있겠습니까? 업장이 녹아내려야 그 자리에 진리가 들어앉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 불자들의 착각을 잠시 짚어보고자 함이 이번 4월호의 핵심입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천수경을 한 번씩 염불하니까,
나는 매일 108배를 한 번씩 하니까,
나는 매일 저녁 금강경을 한 번씩 읽고 잠드니까,
나는 위빠사나 수행 과정을 수료한 사람이니까,
나는 매일 새벽기도를 나가니까,
나는 매주 일요법회 참석하니까,
나는 절에 30년째 나가고 있으니까,
나는 반야심경의 참뜻을 모두 이해 한 사람이니까,
나는 간화선 10년 만에 현몽이 있었다구~~~~.
이렇게 하셨다고 해서, 또는 열거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해서 업장이 녹는 것이 아닙니다. 녹아내려야 소멸이 되든지 말든지 할 텐데, 녹기는커녕 나날이 쌓여만 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업입니다. 어떻게 하면 단단하게 굳어있는 다겁생의 악업이 녹기 시작할까요 실천입니다. 당장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리하면 어느새 스스로 녹아내리는 것이 바로 업장입니다. 끄떡도 하지 않던 악업 덩어리가 스스로 녹는 것입니다. 듣기만 해도 개운하지 않습니까?
꽉 막혔던 사업이 길이 보이기 시작하고, 빚더미에 허덕이면서도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 일을 하게 되고, 미웠던 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며 나라도 그랬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걸인의 배고픔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친구 남편의 폐암 진단 소식에 가슴이 저미도록 슬픈 마음이 생기고, 앞 못 보는 장님 강아지의 깡~ 머리 부딪히는 소리에 애간장이 녹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업장이 녹아내리고 있음을 알리는 진리의 전령인 것입니다. 왜 눈물이 진리의 전령일까요? 눈물은 진실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진실 없이는 눈물이 생기지 않기에, 불가佛家에서 이르기를 눈물은 업이 녹아내림을 뜻한다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 순박한 마음, 선한 마음……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진리의 말씀들을 가슴 깊이 새기며 진실의 마음을 갖고(일념一念)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면 그런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처음 그런 마음이 생기면 괜히 쑥스럽고 부끄럽습니다. 이게 무슨 마음인가 싶고…… 눈물이 왜 나오나 싶고…… 하지만 일념의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바뀝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랬습니다)
일념一念이 무엇일까요?
념念 = 이제 금今 + 마음 심心 입니다. 그러면 이제 ‘금今’을 분석해야겠습니다.
금今 = 합할 합合(입 구口의 획 줄임) + 미칠 급及(ㄱ = 及의 약자)
이제 금이라는 한자는 ‘그 동안 있었던 모든 일이 합合 해져서 지금의 결과에 미쳤다.’라는 의미입니다. 혹자는 우스개소리로 오늘을 뜻하는 ‘금일今日’이라는 의미는 ‘금金’같이 아끼며 살라는 뜻이라고 하던데, 그것 보다는 어제, 그제 그리고 한 달 전에 본인이 했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이 오늘 이 순간을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금일今日’이라는 온전한 뜻풀이 입니다.
자, 그러면, ‘념念’은 무엇일까요? 념은 오늘 이전에, 어제 그제 그리고 한 달 전, 일 년 전부터 지금 이 시간 까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 왔는지, 그러한 사고방식이 똘똘 뭉쳐진 ‘생각덩어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념念은 각각 다릅니다.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 동안 생각한 내용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달랐으니까요.
하지만, 진리라는 이름아래 진실의 마음가짐과 사고방식은 아마도 한 종류 일 것입니다. 그렇겠죠? 한 종류…… 한자漢字에서의 한 일 ‘일一’은 ‘한 개’라는 뜻도 있지만, ‘한 가지’,  ‘끌어 모으다, 모이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일념一念이란, 진리의 마음은 한 가지뿐이므로 그러한 생각으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골몰한 결과를 뜻합니다. 새롭게 새겨보는 ‘일념’을 통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듭니까? 네, 그렇죠. 진정한 일념이라면, 앞서 이야기 했듯 순수한 마음이 생길 것이고 그렇다면 ‘일념’만 제대로 이해하고 실행하면 모든 업장이 녹아내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맞습니다. 그래서 <천수경>에서 ‘십악참회’ 다음에 이런 말이 나오죠.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제
百劫積集罪     一念頓蕩除
백겁 동안 쌓인 악업일지라도,
(제대로 일념을 이해하고) 일념을 실천하면 모든 죄가 사라진다.
 
‘일념’이란 이런 것입니다. 결국, 어떠한 원리를 공부하거나, 경험했을 때, 그것을 반복하여 생각하고, 연구하고, 골몰하며 그것을 마음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생활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금일’을 만들게 되고, 그렇게 진리로써 촉촉하게 젖은 ‘금일’들이 모이고 또 모여서 ‘일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념’은 여러분의 막힌 숨통을 트여줄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생활 속의 불교, 생활 속의 수행, 생활 속의 실천인 것입니다. 생활 속의 실천이 바로 최고의 수행임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 속에 홀로 들어가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 산을 내려오면 그 깨달음을 찾을 길이 없나니~~”  
어떻습니까? 생활 속의 실천이라는 것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불교 교리 공부, 위빠사나 수행, 간화선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예컨대 ‘일념돈탕제’와 같이) 불경의 어느 한 구절만이라도 깊게 골몰하여 연구하고 그것을 실천만 하여도 업장이 녹기 시작할 것이며, 부정은 긍정으로 바뀌고, 미움은 사랑으로 바뀔 것이며, 그간의 무명이 밝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명백한 증거들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이럴 때 어떤 행동을 하시나요?
‘킁~ 킁~’ 냄새를 맡으며 무슨 냄새인가를 확인해 보니, 누군가 가스를 뿜은 것 같습니다. 이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봅니다. 누구일까? 생각하면서 말이죠.
찾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왜 가스 뿜었냐고 물으실 건가요? 애초에 무슨 냄새인지 분석하려고 ‘킁~킁~’거리는 것부터 잘못되었습니다. 바람직한 행동은 이상한 냄새라고 느끼는 그 순간, 코를 닫아버리세요. 잠시 숨을 참으세요. 그러면 냄새를 느끼는 비식(鼻識 냄새로 느끼는 것) 기관이 일시 마비되어 그 냄새를 못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숨을 잠시 참았다
가, 천천히 숨을 고르세요. 그러면 끝입니다. 간단하죠? 이것이 번뇌를 만들지 않는 기초적 행위이며 진리를 실천하는 기본행위인 것입니다. 숨을 다시 쉬면서부터 냄새가 없어졌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비식이 그렇게 해 놓았죠)
누구랑 이야기 중인데 옆에서 누가 큰소리로 떠듭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시나요?
‘도대체 누구야?’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봅니다.
찾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공중도덕 지키라고 큰소리로 꾸지람을 할 건가요? 그냥 이야기 파트너의 이야기에 집중하세요.


지금 나누고 있는 화두에 더 집중하시면 됩니다. 우리의 이식(耳識 소리로 느끼는 것)은 이러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뇌 속에 ‘달라무스’라는 기관과 협동하여 앞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자신의 화두) 외에는 다른 소리를 배척해버리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우수한 기능으로 인하여 우리는 주변에 관계없이 독서를 즐길 수 있는 것이며, 시끄러운 호프집에서 앞사람의 이야기를 명료하게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지 않는 환경이 만들어져도 자신의 생각에 집중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실천하는 기본행위입니다. 어찌할 방도도 없으면서 싸울 듯 떠드는 사람을 경멸하듯 쳐다보는 행위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그러다 눈 마주치면 어쩌시려고요?
갈 곳 없이 꽉 막힌 비행기 속에서 어느 아기가 ‘빡~빡~’ 울어댑니다. 어떻게 하시죠?
‘아~ 왜 애를 데꾸 타 가지고’, ‘거 되게 울어 대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아무것에도 집중도 못하겠고, 듣기 싫어서 해드폰 쓰고 영화를 보려고 하는데, 그래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아~ 재수 없는 날이네 이거~’
아기가 우는 것하고 내 피가 끓어오르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죠? 한 아이가 몸이 불편해서 울 뿐인데, 왜 내가 열 받아야 하는 거죠? 해드폰을 써도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은, 마음속에서 그 아이와 아이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에 그 소리에 집중한 나머지 그 소리가 제일 크게 들리게끔 뇌 속의 ‘달라무스’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뇌’가 뭘 알겠어요? 뇌는 우리가 집중하는 것에 도움을 줄 뿐입니다. 싫어서 집중하는 것인지, 좋아서 집중하는 것인지 ‘뇌’는 아랑곳 하지 않으니까요? ‘뇌’가 그런 것 신경 쓴다면, 우리로 하여금 술과 담배를 즐기게 할까요? ‘뇌’는 우리가 좋아하고 집중하는 것을 그저 돕기만 합니다. 공부를 하면 공부 잘하게 도와주고, 술을 먹으면 술을 잘 먹도록 도와주고…… (마약을 먹으면 마약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아이 울음소리에 집중하는 것 또한 참으로 어리석은 사고방식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는 ‘일념’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절대로 말입니다. 아이 엄마는 지금 얼마나 당황하고 난처해할까,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곱게 쓰셔야 ‘일념’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천입니다.
피곤한데 윗집 애가 깡깡 뛰어 노네요. 열 받죠? 뚜껑 열리죠?
경비실에 인터폰 해 말아, 인터폰 해 말아, 해 말아, 해 말아, 에이 씨. 경비실이든 관리실에 대뜸 화난 어조로 이야기 합니다. “방송 좀 해 주세요, 방송 좀. 기본 예의 좀 지키며 살자고 말입니다. 윗집 장난 아니예요 진짜”
이윽고 5분 정도 후에 방송이 나오네요. “입주자 여러분 ~ ~ ~”
방송이 나오니 부글부글 끓던 속이 가라앉나요? 아니면 윗집 애가 딱~ 멈췄나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끓던 속은 여전히 끓고, 인터폰 하는 중에 얼굴은 더욱 상기되고, 무엇보다 윗집에는 변함이 없네요…. 저런….(애를 자중 시킬 어른이 지금 안 계신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러분도 애들만 집에 두고 잠시 나갈 때 있잖아요…. 그 순간 애들은 천국이거든요. (애들 시
절에는 이렇게 간단하게 극락을 즐깁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와 같습니다. 내가 좋아한다고 눈이 오는 것도 아니고, 길 미끄러워 운전하기 힘들다고 눈이 안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천재지변이죠. 그렇다면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은 모두 천재지변인가? 빙고~! 맞습니다. 그러니까, 윗집에서 깡깡 뛰어 노는 것도 그냥 두세요. 그저 윗집 아이 건강하고 탈 없이 조용히 공부하기를 바라세요(기도하듯 말이죠) 그러면 신기하리만큼 뛰어 노는 횟수가 줄어듭니다. 해결책 없는 것을 알면서 호들갑 떠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인생을 부정의 구렁텅이로 내 모는 일은 없습니다. 진리의 바다를 오염시키는 행위죠. 결국 자신만 오염될 뿐입니다. 업이 쌓인다 그 말입니다.
 
모든 불자님들의 슬기로운 실천이 진리의 바다를 한층 가깝게 만들어 줍니다. 아주 작은 것의 실천이 바로 무명을 벗겨 줍니다. 업장소멸을 위하여 막연한 백일기도로 치성하며 한편으로는 윗집 아이 뛰어 노는 것 못마땅해 한다면, 그 백일기도는 시간과 돈만 낭비할 뿐이며, 바다 같은 부처님을 원망하는 나쁜 기회만 만드시는 것입니다. 작은 실천이 나의 무명을 벗겨주는
초석이요, 지름길임을 아는 우리가 되길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 드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