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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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심지心地, 붓다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적정을 구하는 성문이여 일체지를 통해 적멸로 향하니
중생의 이익을 구하는 이들은 소종지로 세상의 본질을 이루리라.
바르게 지닌 이들의 두루 앎에는 장애가 없으니
소멸 없이 생함도 없어 상변 또한 단변도 오고 감도 없네.
모든 희론 여의신 정등각에게 귀의하오며
대자비로 연기법을 설하신 석가모니 붓다에게 예경 올리네.
-『현관 장엄론』 「귀경게」 가운데-


법을 설하는 이와 그 법을 듣고 취하는 이의 관계에서 사유하고 행함이 선이 되고 불선이 됨은 개개인의 동기에 준합니다. 세간의 이득을 취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법을 설하고 듣는 것이 아닌 각자가 보살의 서원에 준해야 함을 항시 강조하고 당부하는 것은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2)의 법이라고 예외가 아님을 기억해 주십시오.
티베트인들의 삶에 고스란히 베인 티베트불교 논전의 가르침과 티베트의 상황은 오늘날 70억 인류의 평화 실현에 기여하는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그 어떠한 폭력의 부조리에 대해 종교가 부정적으로 관여됨은 옳지 않습니다. 오직 인류애의 공통된 가치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종교는 사랑과 친절 그리고 감사의 척도로만 활용되어야 합니다.


승가 공동체 역시 거듭나야 합니다. 그들의 수행 터전으로 삼는 사원을 단순히 기복적 기도와
복을 비는 공간이 아닌 재가 불자와의 적극적 합심과 협력을 통해 보다 현세적인 윤리에 근거한 실천의 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꾸준히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의 사찰이 불교과학 연구소로 그 개념과 활동을 확장시켜야 하는 것 또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붓다의 법을 신앙하고 일상에서 실천하는 재가불자들은 21세기 불자에 부합하는 합리적 사고에 근거한 평화의 전도사로서 그 역할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조건적인 헌신만으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만 설하지 않았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을 넘어선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근본 무명을 헤아리라고 일컫습니다. 명료한 지혜의 등불로 마음 챙김을 통한 세간의 실상을 명확히 사고했을 때 비로소 보살의 길을 통해 공동의 업을 위하고 구현하는 서원의 행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불법을 설하고 듣는 것은 마음의 자비심을 성장시키기 위함임을 항시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불제자가 경과 논서를 통해 법을 수학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구함을 위함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의 번민을 여의고 변화한 마음의 방향을 지혜로서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무명으로 인한 마음의 거칠고 미세한 번뇌를 다스리기 위해 저는 매일 아침의 4시간을 명상에 꾸준히 할애해 왔습니다. 오직 보리심을 굳건히 하고 지혜를 명료히 세우기 위한 목적입니다. 탐내고 성내며 어리석음에 대한 인간이 지닌 근본 번뇌의 굴레는 달라이라마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실상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 공성에 기반 하는 지혜로써 문사수에 근거 하는 꾸준한 마음챙김을 해 왔기에 조금이나마 여러분에게 조언의 당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수행은 철저한 자신과의 마음챙김입니다. 오직 스스로만이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붓다 역시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마침내 붓다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초전법륜을 굴리셨으니 그것이 바로 인과의 연기설에 의한 사성제, 바로 연기법입니다. 이후 영축산에서 설하신 반야부 경전이 중전법륜입니다. 붓다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설하신 바가 열반경과 여래장경입니다. 결과인 괴로움이 그 원인인 집제로부터 비롯되어 그 집제를 여의면 진여 법성의 멸제에 이르며 그 멸제를 이루도록 함이 바로 반야에 근거한 공성의 도제입니다. 최종적으로 명료한 의식으로써 주관과 객관의 공함을 논리학으로 밝혔으니 그것이 바로 중론입니다.


붓다의 열반 이후 탁실라에 산스크리트어에 준한 승원이 첫 설립된 이후 두 번째로 나라다 승원이 건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대사원 비까말라실라가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8세기 이후 9세기에 이르는 티베트의 상황은 불교의 중흥기를 지나 쇠퇴기를 맞고 비로소 10세기 이후에 아띠샤 존자에 의한 불교의 재중흥기를 맞습니다. 그때 편찬된 것이 수행의 단계를 논한 보리도등론입니다. 중생의 근기를 셋으로 나누어 수행의 도를 논한 것이 그 내용입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근기에 준하는 맞춤 수행을 하였을 때 보다 효율적인 성과를 얻는다는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보리도차제광론을 보면 불법은 가장 먼저 법을 구하는 제자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설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경 율 논 삼장을 수학함에 티베트의 각기 구분화된 겔룩 까규 닝마 샤카 조낭빠가 공통으로 붓다의 초전법륜을 학문의 근저로 삼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수행의 근기에 준하여 삼학이 보다 깊어진 논리의 체계로 나아갈 때에는 각 빠의 차별된 견해를 철저한 근거에 준하는 대론의 주제로 삼아 명확한 결론을 유출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법다운 최고의 법 다시 말해 실상의 명확한 이치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붓다의 사성제 법 가운데 멸제를 사유해봅시다. 세상 이치에 대한 환희심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불법을 바르게 닦아온 우리는 잘 압니다. 멸성제의 법은 삶의 실상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여기 한 예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미국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12,000km 가량 된다고 합시다. 불교의 논사 세친보살께서는 그 거리 만큼에 해당하는 깊이로 보드가야 대탑 아래로 향하면 그 곳에 실제 지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여러분은 세친보살의 지옥론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만 겁주는 불교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지혜를 통해 나 스스로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무명과 대적할 수 있는 무기는 오직 지혜뿐입니다. 더불어 그러한 변화는 선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쁨에 준하는 법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역동적인 불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간의 오욕락은 모두 무명에 의한 행고임을 지혜롭게 논리적으로 사유한다면 궁극의 실상을 발견하고 법열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등명 법등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