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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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학에서 본 인공지능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머리말


어느 때 부터인지 이런 필자에는 ‘세상’-‘사유’-‘언어’라는 세 층 차로 중국의 고전을 분석하는 버릇이 생겼다. 사유의 법칙을 찾아내어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머릿속에 그렇게 사유되어진 세상을 언어로 설명하려고 했다. 역방향으로, 언어로 기호화되어 문자로 남겨진 문헌을 분석하여, 그것으로 세상을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언어화 된 사유도 있지만, 이 경우는 매우 명료한 사유인데, 이런 명료한 사유는 아니지만, 언어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상대적으로 덜 명료한 사유도 있다. 비록 그것을 언어화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사유가 내게 있다는 그 ‘있음’이 적어도 나에게는 자명하다. 물론 남에게 설명하지도, 또는 내 자신에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한편으로 부부 관계가 되어서, 또는 부모 관계가 되어서 ‘같은 세상’에 노출되었는데, 내 머리 속에 그려진 그것은 차이가 있음을 생활 속에서 체험한다. 게다가 ‘같은 세상’이라고 단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철학교수로서의 생활’과 ‘일상생활’은 언제나 괴리의 연속으로 어정쩡하게 이제 노년을 바라보고 있다.


2. ‘세상’-‘사유’-‘언어’


한자로 쓰인 불교경전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저 글자와 글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문장 해독에 온 힘을 기울였다. 『대승기신론』을 읽은 뒤로는, 그 책에서 제시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사유 활동(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규봉종밀이 분석한 『원각경』을 읽으면서부터는, 그렇게 ‘버릇’이 되어진 『대승기신론』의 마음이론은 이제 ‘이론’으로 내 속에 들어와 앉았다. 일심의 두 측면 즉 ‘생멸적 요소(生滅門)’와 ‘진여적 요소(眞如門)’, 생멸적 요소를 알아차리는 기능(覺義)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기능(不覺義), 다시 생멸적 요소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기능이 더 분화되어 ‘無明業相’-‘能見相’-‘境界相’의 소위 ‘3세細’가 전개되고, 이 셋이 다시 6추(지상, 상속상, 집취상, 계명자상, 기업상)로 고착화되어 가는 아주 정형화된 ‘이론’이 내속에 정착되었다.
이렇게 되고나니, 불교문헌를 연구하는 ‘철학교수로서의 생활’은 선명해졌다.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없는 그런 선명함이었다. 그런데 이런 선명함도 『화엄경』을 읽으면서는 다시 암담해졌다. 『대승기신론』의 그것으로는 도저히 분석이 안 되는 경전이 나타난 것이다. ‘동일률’이 『화엄경』 읽기에는 더 이상의 소용이 없었다. 동일한 시간대에 서로 다른 공간에서 부처가 설법을 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큰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대승기신론』의 ‘이론’을 잘만 적용하면 『화엄경』을 설명해낼 수 있겠다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희망’이었다.
2016년 3월 9일과 15일 사이에 엄청난 현상을 방송으로 보았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이었다. 지능을 갖춘 컴퓨터의 출현을 경험한 것이다. ‘빅 데이터’의 출현은 서서히 누적적인 발전을 해왔기 때문에, 또 그런 기술의 성과를 나 같은 불교학자도 소위 ‘C-beta’를 사용하기 때문에, ‘충격’은 아니었다. 충격의 정체는 ‘딥 러닝’이었다. 뇌과학 내지는 인공지능 관계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로 알게 된 것이지만, “인간이 세상을 알아보는 능력은 ‘설명’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학습을 통해서 배운다.”는 것이었다. ‘딥 러닝’은 기계에게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것을 기계에게 ‘그냥 넣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함수화’ 시킬 것도 없이, 지금까지 알려진 정보를 컴퓨터의 언어로 ‘그냥 넣어주기’였다. 그러면 ‘딥-러링’이라는 ‘알고리즘’을 통해 무수한 정보를 넣어 받은 기계가 인공신경망 구조를 통해 스스로가 학습을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이고 개체적인 정보를 추상화하고, 그렇게 추상화된 것들을 다시 추상하고, 그런 단계를 더욱 더 중측적으로 쌓아가면서 학습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뇌가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정보를 신경망 패턴을 통해 패턴화 하여 중측적으로 유형화하듯이 말이다.
뇌가 비정형화 된 데이터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그 분야 전문가들의 연구영역이다. 뇌가 다층의 계층 구조로 어떻게 압축된 구조를 만들어 가는지는 더욱 구체적으로 환원적으로 연구되어 갈 것이다. 이와 더불어 딥 러닝의 학습과정도 기계에 더 광범위하게 적용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굳이 언어로 기호화하지 않더라도, 더 나아가 인식의 구조에 대한 해명을 않더라도, ‘세상’을 학습해 갈 것이다. 그리하여 사물을 인식할 것이고 상황을 인식해 갈 것이다.


3. ‘사유’를 넘어선 ‘세상’으로


인간이 ‘사유’라는 방법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오래되었다. 사유가 비록 세상을 온전하게 묘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화엄학자들의 전통이 되어온 ‘관법 관찰 방법’의 활용이 바로 그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청량징관은 4종류의 변증적 환원 방법을 제시하여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서 세상에로 나아가고자 했다. 첫째는 인식 현상의 의지처가 되는 근본 사태(所依體事)를 파악하는 형식이고, 둘째는 (인식주체는 물론 인식대상의) 모두를 참 된 실상으로 귀속시키는(攝歸眞實) 작업이고, 셋째는 (의식활동성과 그것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주-객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로 드러내기(彰其無.) 작업이고, 넷째는 (사안들마다) 서로가 (타자를) 머금기를 중첩적으로 하는(周.含容) 변증적 환원이다. 이제 이상을 차례대로 설명해보기로 한다.


첫째, ‘사태’를 보자. 여기에 나오는 ‘체사’를 필자는 ‘아Q’로 기호화하고자 한다. 그렇게 기호로 치환할 수 있는 근거는, 그것이 3종 세간의 의지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식주관은 물론 인식대상이 의지하는 의지처(所依)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일체법의 ‘소의所依’가 되고 있다. 이것은 실체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연기에 의해서 형성된 구성체일 따름이다. 이것을 필자는 ‘연기구성체(construct-of- dependent-arising)’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 ‘체사’ 즉, ‘아Q’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도구 (또는 수단, 또는 방법)가 필요하다.
그 도구는 ‘언어화된 개념’이다. 우리는 ‘언어화된 개념’을 통해서 ‘아Q’를 파악한다는 말이다.


둘째, ‘참된 실상으로의 환원’을 보자. 위의 ‘아Q’를 관찰함에 있어, ‘아Q’를 파악하는 기능(相)들이 ‘참이고’이고 ‘실’이라고 ‘환원(攝歸)’하는 것이다. 이렇게 환원된 상태에서 ‘아Q’가 ‘드러나게’ 하는 관찰이다. 이런 관찰 방법을 설명하기 위한 변증의 과정으로 네 측면을 제시한다. 첫째는 색법(色)은 모두가 공하다(空)고 관찰하는 것이고, 둘째는 공하기 때문에 색법이 존재한다고 관찰하는 방법이고, 셋째는 색법과 공이 원융무애하다고 관찰하는 것이고, 넷째는 색이니 공이니 하는 일체의 개념 활동 자체를 중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Q’를 관찰함에 있어, 신·구·의 3업의 작용을 매개로, ‘아Q’를 규정한다 (또는 본다). 이렇게 3업의 작용을 매개로 하여 ‘규정되어진 아Q’는 내 쪽에서 구성한 것이지, ‘아Q’ 그 자체는 아니다. 연기로 구성된 사태 그 자체가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선행적으로 해야 하는 행위가 있다. 그것은 즉 3업의 작용이란 ‘공하고’, ‘무상하고’, ‘연기된다’라고 관찰하는 ‘환원적 인식행위’이다. 물론 이때의 ‘행위’는 무공용의 행위이다. 철저한 무위행이다.
‘개념의 틀’에 갇혀있던 ‘아Q’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이렇게 제자리로 돌려놓음으로 해서, ‘아Q’가 본래 가지고 있던 ‘무한정성’을 즉자적으로 우리 앞에 세워두는 것이다.


셋째, 유기적 관계로 드러내기를 보자, ‘언어화된 개념’을 활용하여 ‘아Q’와 마주하고, 그러자마자 곧바로 ‘언어화된 개념’을 중지하고, 그렇게 하기를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아Q’가 나에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사태’와 그것을 파악하는 언어나 사유의 유기적 관계를 변증적 환원시키는 작업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아Q’가 그 실상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넷째, ‘타자 머금기 중첩하기’를 보자. ‘사사무애事事無碍’를 염두에 두고 우리말화한 것인데, 첫째 단계에는 ‘세계를 파악하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작동시키고, 둘째 단계에서는 ‘세계를 파악하는 행위’의 무화시키고, 셋째 단계에서는 ‘세계를 파악하는 행위’의 ‘작동’과 ‘무화’를 변증적으로 반복한다. 이제 이곳의 넷째 단계에서는 ‘작동’과 ‘무화’를 변증적으로 반복하는 행위 자체 자체도 쉰다. 쉬고 쉬어, 쉰다는 행위는 물론 생각마저 쉰다. 첫째와 둘째와 셋째가 ‘이론’의 단계라면, 이곳의 넷째는 ‘실천’의 영역이다.
인간이 지식(앎)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언어’와 ‘사유’를 매개로 ‘세상’을 파악해왔던 일종의 반성이다. 이런 반성을 통해서 그들이 추구하려 한 것은 ‘세상’의 해석이 아니라, ‘세상’을 그냥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언어’를 통해서 ‘사유되어진 내용’들을 설명하고, 그렇게 설명된 사유를 통해서 ‘세상’을 설명하고, 다시 그것들을 변증적 과정을 지워버리는 방법으로 ‘세상’ 그 자체를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게 하는 방법. ‘세상 설명하기’를 중지하고, 세상이 나에게 ‘그냥 들어오게 하기’. 이 또한 중국화엄학승들의 ‘딥 러닝 알고리즘’으로 볼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