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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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수덕스님
가평 대원사 템플스테이 관장


현대에 있어서 개인주의는 행복을 극대화하는 세속주의로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이 땅에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말이다.
늘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눈을 뜨고 살아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 특히 “값이 아니라 가치”를 선택하려는 상황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행복하지 않을까?


행복에 관한 이런 말이 있다.


하루 동안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 동안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한 해 동안 행복하려면 새집을 짓고
평생을 행복하게 지내려면 정직해야한다.
그러나 정말 행복하려면 무엇보다 지혜가 있어야 한다.
나를 돌아보고 인식하는 지혜를 이름이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이 미쳐서 살고 정신이들 때쯤 죽는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에 대한 자각도 자성도 없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왜 살았는지 명백하고 정당한 이유를 남기지 않고 이 세상에 그저 왔다가 떠나버릴 권리는 없다.
그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어디로 향하여 가는지도 모르고 당연히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며 살게 된다.
모두 다 동감하는 이야기만 행복이라는 것은 한 인간이 가진 외적인 조건보다는 내적인 감정에서 나온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하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스스로 행복을 가꾸고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이 세상에 행복방정식을 내놓으셨다. 그것이 바로 삼학三學과 팔정도八正道이다.
이런 시 귀 절이 있다.


향기의 주인이 꽃이더냐
바람 불어 흩어질 때
느끼는 자의 것이리니...
 
그렇다.
행복은 꽃의 향기처럼 알아차리고 깨닫는 사람들의 것이다.
지금 세상에 쏟아져 들어오는 농산물들이 봄에 심었다가 가을에 수확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이 자연의 값진 열매를 하늘이 그냥 헐값에 주는 것을 보았는가?
그것은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에 폭풍우까지 견딘 참 농부들의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 또한 갈등과 방황을 통하여 성장과 성숙을 이룬다. 그러므로 고통과 시련을 마다하지 마라.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이 열리는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삶의 통찰과 희열이 찾아온다.
저 깎아지른 언덕 위에 멋지게 굽어진 소나무를 바라보라.
그것이 바로 수많은 세월 동안 각고의 인내를 치룬 값이다.


사실 행복은 모든 사람이 지혜만 있다면 가질 수 있는 보편적 가치이다.
그 보편적 가치를 지혜로써 알지 못하니 사는 것이 힘들고 괴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 대다수가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돈이 가져다주는 풍요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는 것이다.
돈이 아무리 많은들 내가 몸이 아프거나 자식이 몸이 불구라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내가 돈이 많은들 나보다 많은 사람과 비교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안분자족(安分自足)의 정신이 필요하다.


안분자족은 자신의 처지를 알고 그에 만족하는 마음가짐 자세를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게으르고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저 자신들의 그런 게으른 성향을 숨기기 위해서 하는 말로 알고 있다.
마음의 풍요는 단지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풍요는 바로 그 어떤 것이 일어나게 하는 의식 가운데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음의 풍요는 내가 견지하는 삶의 한 방식이며 생각이지, 돈이나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족적 빈곤은 삶의 한 방식이며 생각이지,
단지 돈이나 무언가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마음을 갖고 내적인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행복은 항상 멀리 있다.
명상을 통하여 내가 누구인가 바라보고 즐거움보다 행복을 찾으라.
마음의 풍요로움과 물질의 가난함은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이다.
행복은 소유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만드는 것이다.
모자람 속의 풍요는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하며 나눌 줄 알 때 또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스스로 만족할 줄 알 때 오는 것이다. 자기가 목표한 욕망이 이르렀다할지라도 얼마가지 않아 여전히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희망한 욕구들의 성취 여부에 따라서 자기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부류의 욕구가 있고 그들 욕구를 어떻게 하면 성취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긍정적인 욕구”와 “부정적인 욕구” 이다.
그 중 긍정적인 욕구는 우리네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인생에서 또는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필요로 하는 그런 욕구들 이라고 한다면 부정적인 욕구는 그러한 욕구를 지닌 사람들의 마음을 더 많은걸 지니려고 하는 “탐욕”으로 이끌려 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욕구는 자기만족을 통하여 행복하게, 평화롭게 하고 부정적인 욕구는 충동적으로 오로지 더 많은 것들을 원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대 삶의 현재성에 긍정의 “예”라고 대답하라.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깊은 여유로움과 평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예”라고 대답할 때 내 안에 깊은 차원의 세계가 비로소 열린다.
이 멋진 긍정은 어떠한 외부 조건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사고와 감정이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내부 조건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적인 그대만의 세계이다.


그러니 알아차리라.
우리들 삶에는 중요한 것이 많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다음 생(生)에서 그 하나를 알지 못한다면 환생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대가 성공했는지, 아니면 실패했는지도 중요하다.
그대가 부자인지 가난한지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 그대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이다.
그대가 스스로 만들어 낸 일시적이거나 가면적인 자아상을 넘어서는 일이다.


명상을 통하여 그대의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본연의 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다음 생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면 환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삶은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다.
욕망은 무언가를 ‘더하여’ 좀 더 풍성해지려는 욕구이다.
반면에 모든 두려움은 무언가를 ‘잃어’ 자신이 작고 초라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렇게 더하고 잃어버리는 두 가지 활동은 생명이라는 것이 본래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풍요한 생명은 이미 이 순간에도 우리들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라.
우리 안에 부처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