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I 깨달음의 진리 I 모르고 사는 인생 I 자신이 변하면 세계가 변한다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 I 지혜의 길 I 참 나를 찾아서 I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삶 I 불교적인 삶

 

종교란 무엇인가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다. 그 결과 민족과 문화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종교가 발생하였다. 여기서 많은 종교를 모두 열거할 수는 없고, 종교의 일반적 정의와 불교에서 말하는 종교에 대해 알아보자.

 

‘종교(宗敎)’란 말 그대로 최고의 가르침, 즉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교주, 교리 그리고 교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라고 할 수 없다. 종교 중에서도 올바른 종교를 찾아 믿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종교나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려 한다. 우리 주변에 잘못된 교주와 교리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것은 잘못된 종교를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산·해·달·하늘 심지어는 태풍의 신이 있다고 믿어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이로 인해 인류 역사에 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신이 인류를 다스린다고 한다. 이 신은 절대적으로 믿는 가르침이 유신론(有神論)적 종교이다.

유신론적 종교에서 인간은 신의 종이기에 절대적인 복종을 통해서만 인간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류 역사와 동시에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종교를 부정하고‘인간이 무엇이며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하는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결과 인류에게 크게 두 가지 흐름의 종교가 정립되었다. 하나는 신의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이다.

 

신을 믿는 종교는 세계가 신의 창조물이고 인간 또한 그러하다고 한다. 신의 종교는 대체로 서양의 종교관이다. 서양 종교는 절대적인 신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서양은 교통과 통신, 즉 과학문명의 발달로 다른 세계와 접하면서 자기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은 신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진리의 세계 그 자체에도 있음을 알게 되어 생각의 편협성을 인정하고 마침내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이러한 서양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는 인류 역사에 불교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가치는 인류 역사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진리를 모르고 사는 세상은 고달프지만 진리를 알고 행하는 삶은 자유롭고 편안하다. 불교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불교의 교리와 사상이 설사 어렵더라도 불교의 진리야말로 나를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을 알고 열심히 정진해 나가면 마침내 참된 삶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의 진리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주는 부처님이다. ‘불교’에는 ‘불(佛)’이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a)’의 음사(音寫)로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무엇에 대한 깨달음인가? 바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진리를 깨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진리를 깨치면 신 조차 초월할 수 있다. 불교에도 많은 신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사천왕이다. 사천왕은 하늘에 산다고 한다. 이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부처님께 귀의하여 영원토록 정법을 보호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도량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진리는 하늘의 신을 감동시킬 뿐만 아니라 그 경지를 뛰어 넘는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다.

 

우리의 삶에서 당당하게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삶의 결과가 자못 다르다. 불교의 진리는 우리에게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준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하겠다고 하는 정신으로 굳게 결심하고 그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그 목표는 더욱 가까워질 것이고, “난 안돼”하면서 소극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를 알아야 한다. 또 그 진리를 알고 행하며 사는 것은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인생이겠는가.

 

불교는 바로 이 길을 제시한다.

 

 

모르고 사는 인생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인생을 궁금해하며 해답을 찾아 헤매다 일생을 마친다. 한 평생을 살면서 목숨 걸고 그 해답을 찾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의 삶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태어난다는 일만 생각해도 얼마나 고생스럽고 힘든 일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작은 상처 하나에도 사느니, 못사느니 한다. 그리고 큰 병고에 시달리든가 평생을 함께 의지하던 이의 이별과 죽음에 부딪혔을 때 오는 고통과 마음의 아픔은 눈물로도 감당할 수 없다. 돌아보면 인생의 많은 시간은 즐거움보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나날이다. 환희의 시간은 기억에 없고 오늘도 정해진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왜 사는지, 이 길을 왜 가야하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도 모를 인생을 그저 안개 낀 다리를 건너는 사람과 같이 어림짐작으로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인생을 다 알고 있는 듯이 웃고 즐기며 산다. 이렇게 인생을 모르면서도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인생 역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다. 그 누가 말했던가 인생은 모르면서 사는 것이라고.

 

모르고 사는 삶을 알고 살아가는 삶으로 바꾸어 주는 가르침이 바로 불교이다. 즉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사람은 계속 그 행위를 한다. 하지만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고 그것이 나와 남에게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알면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해답을 주고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조용한 광야를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성난 코끼리가 달려왔다. 그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이 있어 급한 나머지 그 속으로 들어갔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어 그것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한참 내려 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에는 다시 무서운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위를 쳐다보니 코끼리가 아직도 우물 밖에서 성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칡넝쿨에만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위에서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우물 중간에는 작은 뱀들이 왔다갔다하면서 사람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온 몸에 땀이 날 정도로 두려움에 떨며 칡넝쿨을 잡고 위만 쳐다보고 있는데 마침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나타나 칡넝쿨에 집을 지었다. 그러면서 꿀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는데 그는 꿀맛에 취해 왜 꿀을 더 많이 떨어뜨려 주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져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잊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칡넝쿨은 생명,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의미한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을 의미하며,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오욕락(五欲樂)을 말한다. 오욕이란 재물에 대한 욕망, 이성에 대한 애욕, 먹을 것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욕망, 편안함의 추구를 말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채 탐욕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인생이다.

혹시나 욕망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인생에서 욕망으로 인해 성취하는 것보다 욕망 때문에 잃는 것이 더 많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는 욕심은 지혜를 흐리게 한다. 이러한 장애를 없애고 참된 지혜를 발현토록 해야 한다.

 

자신이 변하면 세계가 변한다

 

 

우리는 때때로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왜 사람이 이렇게 많냐”하고 짜증을 내는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은 자신이 그 곳에 있어 더 복잡해졌음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면 불교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지옥에 있는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산다. 먹을 것이 있어도 자기만 먹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지옥의 숟가락은 너무 길어 자기 것으로 제 입에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를 원망하면서 굶주리고 산다. 눈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말이다. 그러나 극락에 있는 사람은 이웃을 먼저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먹을 때는 서로서로 옆 사람에게 먹여 주면서 산다고 한다. 이곳 사람은 지옥에 있는 사람과 다르게 서로 먹여 주며 언제나 화합하고 배부르게 산다.

 

이것은 지옥과 극락에 대한 비유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돌아볼 때 귀중한 교훈이 된다. 여기서 자신만을 위해 탐욕스럽게 사는 사람과 이웃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가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이웃과 함께 하는 삶으로 전환될 때 괴로움의 세계가 자유와 평안의 세계로 바뀌게 될 것이다. 대립과 갈등,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를 바꿔나가는 원동력은 세계의 구성원인 인간 자신이다. 즉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구성원인 인간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세계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불교-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

 

 

불교가 어떤 종교인지 단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크게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라 말할 수 있다.

수행과 믿음을 겸비한 종교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수행체계를 통해 인간의 정신과 삶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키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살면서 잘못된 행동을 스스로 깨닫고 바꾸게 하는 종교이다. 어린시절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여 그것이 최고라 고집하던 것을, 어른이 되어 그 때를 회고하면 참으로 부끄럽고 부질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그 시절처럼 ‘왜 그랬는지?’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며 또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집착하면서 살아간다. 이는 바로 우리의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나쁜 습성을 고쳐 나가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이란 혹독한 시련을 통해 나 자신을 단련하는 고행과는 다른 것이다. 수행은 진리를 깨치기 위해 탐욕에 찌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좋은 습성으로 바꾸어 마침내 깨닫는 과정이다. 즉 인도에서는 소승·대승, 중국에서는 다양한 종파와 선사상 등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수행체계를 형성하면서 수많은 민간신앙을 불교의 세계로 받아들였다. 이는 불교가 그만큼 다양한 사상과 사람을 섭수하는 큰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다.

 

지혜의 길

 

 

바른 생각에서 지혜가 나온다. 즉 자기 중심의 생각에서 자심과 전체를 통찰할 때 지혜가 나온다. 자기 중심의 생각에서 전체를 보는 안목으로 생각을 넓힐 때 지혜가 나온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흔히 지혜의 종교라고도 하는데,

 

첫째, 무명(無明)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라는 말과 같다. 비록 원수 사이라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거나 욕심을 버리면 원수와 함께 차 한잔 나눌 수 있는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립과 갈등의 원인은 자신의 욕망 때문이다. 화가 났을 때,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해 보면 온갖 다툼과 화의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지만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상대가 자신이 바라는 것만큼 해주질 않았거나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었을 때 화가 나기도 하는데 그것 또한 자기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것이 다 부질없는 것이 되었을 때 돌아보면 당시의 화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런 것이 욕심에 집착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막는 무명이다. 이 무명에서 벗어나 밝은 지혜를 구해야 한다.

 

둘째, 자신의 무지가 모든 불행과 비극의 시초임을 알았으면 남을 나처럼만 생각해주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뒤에 어떤 결과가 올지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고 행동하는 것을 자주 본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에 앞서 그 결과를 생각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에 앞서서 행동부터 한다. 그 잘못된 행동에서 고통과 아픔이 생긴다. 따라서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행동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면 지금까지 보지 못하였던 세계가 열린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세계를 열어주며 그 길을 함께 가는 가르침이다.

 

참 나를 찾아서

 

 

 어려운 처지에 처해 고민하고 괴로워할 때 그것을 구해 줄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기쁜가? 어두운 밤에 피곤한 몸으로 힘든 길을 갈 때 함께 갈 길동무를 만나면 얼마나 고마운가? 그렇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이를 위로하고 가치에 눈 뜰 때 삶이 변한다. 따라서 인생관과 가치관이 정립되었을 때 인생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 듯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겐
생사의 밤길은 멀고도 멀어라.

                                                             《법구경》

 

사람이 전생의 업을 다하고 악도에서 벗어나더라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려우며,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부처님 법을 만나기가 어려우며, 부처님 법을 만났더라도 수행자를 만나기 어렵고, 수행자를 만났더라도 신심을 내기 어렵다.

                                                          《사십이장경》  

 

우리의 삶은 올바른 진리의 길에 들어설 줄 모르고 감정과 욕망에 이끌려 마치 뱀의 꼬리가 앞장을 서서 길을 가려는 것과 같이 가시덩굴에 들어가고 불 속에도 들어가고 결국에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되는 격이다. 즉 우리들이 불타는 집과도 같은 이 세상을 윤회하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부처님께서 어느날 숲 속에 있는 한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고 계셨다. 이때 젊은이들이 숲속에서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부처님을 보고 그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한 여자가 도망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까?”사연인즉, 그들은 이 지역에 사는 지체 있는 집안의 자제들인데, 오십 명이 저마다 자기 아내를 데리고 숲에 놀이를 왔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미혼자만은 기생을 데리고 왔었는데, 모두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그 기생은 여러 사람의 옷과 값진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그 여인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위와 같은 사정을 듣고 부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다. “젊은이들이여, 달아난 여인을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놀이에만 팔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여인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그럼, 다들 거기 앉아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이리하여 그 젊은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모두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사분율 제32권》

 

이 젊은이들은 자신이 더 중요함을 곧 깨달아 출가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탐욕의 세계로 달려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항상 탐욕을 버리라고 설하시며, 부처님께서도 ‘왕자의 지위를 문틈에 비치는 먼지처럼 보고, 금이나 옥 따위의 보배를 깨어진 기왓장처럼 보며, 비단옷을 헌 누더기 같이 보고, 삼천대천세계를 한 알의 겨자씨 같이 보라《사십이장경》’ 궁궐을 버리고 출가하여 위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세속의 탐욕을 벗어났음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늘 당신은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라 말씀하였다. 부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지혜와 평화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즉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달음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몸소 가시며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이루고, 못이루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고려시대 야운 스님은 당신의 수행을 살피는 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이 부처님 법안에서 도를 이루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도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대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이 생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등지고 속진에 묻혀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구나. 항상 악업을 지어 삼악도에 떨어지고 착한 일을 하지 않으니 생사의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닌가.

                                                         《자경문》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삶

 

 

(1) 바른 믿음으로

일상적인 삶을 살다 불교에 입문하려고 첫 마음을 냈다면, 그 순간부터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참다운 불자가 되어야 한다.

 

게으름이란 모든 허물의 바탕이다.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의식(衣食)이 부족하고, 사업이 쇠퇴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게으르면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좋은 일은 정진에 의하여 일어나나니, 집에 있는 이가 정진하면 의식이 풍족해지고 사업이 번창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정진하면, 법을 모두 성취하여 마침내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나니, 모두가 정진에 의해 이루어지느니라.

                                                       《보살본행경》

 

불교를 믿는 첫 결심을 한 것도 대단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처음에 발심한 그 마음을 가지고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가는 일이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정진해야 하는가? 《대승기신론》에는 믿음을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근본을 믿음이니, 진여(眞如)의 법을 즐기어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께 한량없는 공덕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가까이 모시고 섬기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부처님의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모든 바라밀을 닦으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는 스님들은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을 바르게 닦는다는 것을 믿음이니, 모든 수행자들을 가까이 섬기면서 올바른 행동을 배울 것을 항상 생각함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僧)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삼보(三寶)라 한다. 삼보는 불교와 같은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삼귀의(三歸依)라 하는데 모든 불교 행사를 거행할 때마다 항상 삼귀의례를 올린다. 부처님께 귀의한다 함은 법신(法身)에 귀의함이니, 온갖 지혜를 다 갖추고 더 배울 것이 없으며 여러 공덕으로 이루어진 몸을 뜻한다. 법에 귀의한다고 함은 나와 남이 다한 곳에 귀의함이니, 즉 애욕을 끊고 애욕이 없어져서 적멸인 열반에 이르는 진리에 귀의함을 뜻한다. 스님들께 귀의한다 함은 부처님의 법을 따라 수행하고 가르치는 스님에게 귀의함이니, 즉 좋은 벗과 복밭인 거룩한 스승에게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나태하지 말고 불교인으로 바른 신행을 해야 한다. 원효 스님은 첫 마음을 내어 부처님께 귀의한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신다.

 

오늘이라 할 때 벌써 늦은 것이니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 시간이 지나가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한 달이 되며, 한 달 두 달이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 두 해가 바뀌어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누워서는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만 어지러워진다. 몇 생을 닦지 않고 세월만 보냈으며, 그 수많은 생을 헛되이 살았으면서도 한평생을 닦지 않는가. 이 몸은 끝내 죽고야 말 것인데 다음 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어찌 급하고 급하지 않는가.

                                                    《발심수행장》

 

(2) 자신을 낮추고

불교의 수행은 자신을 낮추는 공부이다. 사람은 언제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일 줄 알아야 한다. 수행하는 사람은 더 더욱 그렇다. 이것을 하심(下心)이라 한다. 그 어느 누가 나를 보고 멸시하더라도 털끝만큼도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하심 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찌들어 있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업, 더러운 때를 닦아내고 맑은 성품을 발견하여 깨달음을 이루는데는, 첫째도 둘째도 나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마음공부가 제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절에 다니는 횟수가 깊어질수록 ‘나는 무엇을 했네, 나는 무엇을 보았네’하며 처음 발심했을 때의 겸손한 마음을 잃고 스스로 아상(我相)을 높히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최고라 우쭐대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며, 특히 불자에게 이런 태도는 수행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점점 부처님의 법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불자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검소하게 살아가야 함은 물론, 세상의 모든 일에서 교만심을 버려야 할 것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스님들이 탁발하여 생활을 하는 것도 다른 이로 하여금 복을 짓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낮추어 해탈을 위해 정진하고자 함이었다. 진정 자신을 낮출 때만 남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다.

* 註 : 지금은 탁발하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3) 생활을 반성하며

우리가 불교를 믿고 행하면서 잘못이 없을 수 없다. 매 순간 욕망이 싹트고 주위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또 순간적으로 판단을 그르쳐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자임을 명심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돌이켜 보고 반성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처음 공부하는 보살이 비록 신심이 두터우나 전생부터의 무거운 죄와 나쁜 업장이 많으므로 때로 삿된 마왕에 홀리기도 하고, 세상 일에 끄달리기도 하고, 가지가지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여 재난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불자들이 자칫 착한 법을 닦는 일을 멈추게 되나니, 반드시 밤낮으로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하고 수희(隨喜)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나쁜 업장이 차츰 소멸하고 선근이 늘어나리라.

                                                       《대승기신론》

 

참회(懺悔)는 수행의 길에 중요한 것이다.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질투하는 죄를 다 뉘우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요, ‘회(悔)’란 다음에 지을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우리는 흔히 지나간 허물을 뉘우친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허물에 대해 살필 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허물이 연이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허물이 없겠는가? 중요한 것은 허물이 있다면 곧 뉘우쳐야 하는 것이다. 즉 허물이 있거든 곧 참회하고 부끄러워하여,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날로 없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반드시 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그 자리에 아니룻다도 있었는데 그는 법회 중에 꾸벅꾸벅 졸았다. 부처님께서 법회가 끝난 뒤 아나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야, 너는 어째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의 괴로움이 싫어 그것을 버리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는 설법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졸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니룻다는 큰 허물을 뉘우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이제부터는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뜬눈으로 계속 정진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아니룻다에게 타이르셨다. “아니룻다야, 너무 애쓰면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룻다는 전에 부처님 앞에서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부처님의 타이름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은 날로 심각해져 마침내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증일아함경 역품(力品)》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정진해 나감에 있어 가져야 할 삶의 바른 자세 중 하나가 바로 자기 반성이다. 우리는 끊임없는 반성 속에 삶을 돌이켜 보고, 올바르게 부처님 곁에 가고 있는지 또는 처음 부처님께 귀의하였을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만약 스스로의 허물을 발견하면 부처님 앞에 그 잘못을 말하고 가볍고 무거운 정도에 따라 삼배·백팔배·천팔십배·삼천배를 하여 참회하는 것이 좋다.

 

지붕을 성글게 이어 놓으면
비가 내릴 때 빗물이 새듯이
마음을 조심해 간직하지 않으면
탐욕은 곧 이것을 뚫고 만다.

                                                         《법구경》

 

(4) 끊임없이 정진하라

불교를 믿고자 하는 첫 마음을 간직하고 변함 없이 정진해 가는 길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처음 결심이 이런저런 이유로 인하여 변하기 쉽다. “차라리 다른 길이 낫지 않을까?”, “깨닫지도 못할 것, 차라리 다른 일이 낫지 않을까?”하는 성급한 마음에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 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러오도록 하셨다. 부처님은 소오나에게 말씀하셨다. “소오나, 너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더냐?” “그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은 소오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게 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라.”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오래지 않아 아라한이 되었다.

                                                    《잡아함경》

 

소오나 비구의 생각처럼 우리들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갈 때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쉼없이 정진해 나가야 한다.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이것만 굳게 행하면 우리의 발원이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 나가야 한다. 한편 처음 발심 했을 때의 결심이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하찮게 보지말고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 나갈 때, 낙수가 떨어져 돌을 뚫는 것과 같이 작고 작은 선업이 쌓여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
방일하지 말라.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正覺)을 이루었다.
한량없는 온갖 착함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장아함경 유행경》

 

불교적인 삶

 

 

불교는 자기 완성만이 아니라 나와 남이 함께 깨달아 이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이는 바른 믿음과 생활 속의 바른 행을 중시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불자로서 지켜야 할 실천덕목으로 오계(五戒)를 말씀하셨다.

 

   첫   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不殺生)

   둘   째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라.    (不偸盜)

   셋   째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不邪淫)

   넷   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            (不妄語)

   다섯째  음주를 하지 말라.               (不飮酒)

 

오계는 모든 악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다섯 가지 악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지 말라’는 것은 금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이 전제되어 있다. 이를테면 ‘산목숨을 죽이지 마시오’의 경우, 모든 생명은 불성을 가진 고귀한 존재이니 본래 이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의 뜻이다.

 

옛날 자비심이 지극한 왕이 매에게 쫓겨 피해 온 비둘기 대신 자기의 살점을 뜯어주었다는 자비심이야말로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실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의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이룩하려는 것이 이 오계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도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가장 안온한 공덕이 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청정한 계를 가지면 괴로움을 없애는 지혜와 선정의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오계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 즉 일상적인 삶 하나 하나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여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반가운 이, 그리운 이를 만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禮)로써 그 뜻을 표시한다. 불교에서는 스님 또는 법우를 서로 만나게 되면 합장으로 예를 표한다. 열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고 양 손바닥을 맞대어 흩어진 생각과 마음을 집중한다.

이렇게 다소곳이 고개 숙여 합장하는 마음이 바로 믿음의 출발이다. 큰절이 아니더라도 합장은 나의 마음을 뜻하며, 더 나아가 나와 너의 마음이 하나의 진리 위에 서로 만났음을 뜻하는 동시에 존경과 진실과 자비의 마음을 뜻한다. 그리고 절을 하고 합장을 하는 의식 속에는 자신을 낮추고 덕 높은 스님,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또한 수행의 방편으로 매일 백팔배를 하면, 항상 교만심을 버리고 하심(下心)을 하여 남에게 성내지 않고 좋은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공양 전후에 언제나 합장하며

‘이 음식에 깃들인 모든 이의 공덕을 생각하며 감사히 먹겠습니다.’라고 읊조릴 때 자신을 있게 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어찌 감히 다른 이에게 해로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불공(佛供)을 할 때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불공을 올림은 일체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하시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며 열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의 표시이다. 또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회향한다는 뜻도 담겨 있기에 모든 중생의 은혜를 갚는 길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씨를 베품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기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과 다름이 없으며, 이 세상을 더욱 맑고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부처님 앞에 발원할 때도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성취하기 위한 것보다 모든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하여야 한다.

아울러 모든 번뇌를 여의고 하루 빨리 부처님 법을 익혀 깨닫도록 발원함이 참다운 불자의 발원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고통과 괴로움에 빠진 중생이 나를 부를 때는 반드시 그곳에 가서 구해내리라’는 관세음보살님의 발원과 ‘지옥에 있는 중생을 모두 구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님의 발원이야말로 참다운 발원인 것이다. 즉 현실에서 중생의 아픔을 함께 하며, 고통을 덜어주고자 커다란 원을 세우고 자신을 아끼지 않고 실행해 가는 것이 참다운 불자의 모습이다.

이처럼 불자의 수행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만나는 이에게 머리를 숙이고 합장하는 자세, 공양을 하면서 이웃을 생각하는 자세, 불공이나 발원을 하면서도 자신보다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생각하는 자세, 이러한 자세가 몸에 베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더불어 이런 자세를 간직할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화합의 정신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가족끼리 사랑하고 화목을 이루며 넓게는 이웃과 더불어 생각하며 살아갈 때, 마른 풀이 수미산 같이 쌓여 있더라도 겨자씨 만한 불똥 하나로 다 태울 수 있듯이 우리들의 조그마한 신행의 촛불이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태우고 불국정토세계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워도 실행하지 못하는 게으른 사람은
남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아 수행의 보람을 얻기 어렵네

                                                      《법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