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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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섭(同事攝)이 선행된 선지식(善知識)이 됩시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구룡사 회주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내가 나를 존중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또한 중요한 것이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삶입니다.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은 모든 생명체를, 가지가지 종성을 지니고 있는 모두를 잘 살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선근(善根)이 있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바로 지혜(智慧)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행동과 마음가짐이 바로 자비심(慈悲心)이요,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선지식(善知識)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내가 지혜가 있고 내가 선근이 있으면 누구도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착한 사람은 본받고 그릇된 사람은 경계로 삼으면 그들 또한 다 선지식입니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는데, 스승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저 사람은 좋고 저 사람은 나쁘다, 혹은 저 사람은 대중을 생각하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생각이 들었다면, “나 또한 그렇게 살아야지, 아니면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다보면 두 사람 다 스승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선지식이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불자들이여, 선지식(善知識)이라 함은 부처님과 보살(菩薩)과 벽지불(支佛)과 성문(聲聞)과 방등경전(方等經典)을 믿는 사람들이니라. 어째서 선지식이라 하는가. 선지식은 중생들을 교화해서 10가지 나쁜 업을 여의고 10가지 선한 일을 닦게 하나니,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또 선지식은 법대로 말하고 말 한대로 행하느니라. 어떤 것을 법대로 말하고 말 한대로 행한다 하는가? 스스로 살생하지 아니하고 다른 이로 하여금 살생하지 않게 하며, 내지 스스로 바른 소견(所見)을 행하고 다른 이에게도 바른 소견을 가르치나니, 만일 이렇게 하는 이는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스스로 보리(菩提)를 닦고 다른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닦게 하나니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스스로 믿음과 계율(戒律)과 보시(布施)와 많이 아는 것과 지혜(智慧)를 닦아 행하고, 다른 이로 하여금 믿고 계율을 가지고 보시하고, 많이 알고 지혜를 닦게 하나니 그런 뜻으로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보시를 하든, 시주를 하든, 공양을 올리든, 이 모든 것을 가리켜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 합니다. 또 바라밀다는 지혜로운 행동을 말하는데, 지혜로운 행동은 선근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살행이고, 그것이 바로 성인의 도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생각하는 보리를 구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선지식인가하면, 부처님을 비롯해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승가공동체(僧伽共同體)까지 모두가 다 선지식입니다.
왜 그런 이들을 모두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하면, 중생들을 교화해서 10가지 나쁜 업(業)인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탐(貪), 진(瞋), 치(痴)를 짓지 않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하는 잘못보다 모르고 하는 잘못이 그 죄가 더 무거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잘못인줄을 알고 있다면 반복해서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인 줄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 숫자가 줄어들 거라는 겁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빵을 한 조각 훔쳐 먹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다음에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지만, 그것이 나쁜 행동인줄 모르고 있다면 계속해서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에 죄는 더 늘어만 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맑고 깨끗한 물에 먹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물 색깔이 변하기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물의 양이 많아지면 먹물의 색깔은 이내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물에 계속해서 먹물을 떨어뜨리고 있다면, 그 물이 맑아질 수가 없습니다. 즉 모르고 짓는 죄는 참회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지지 못하고, 궤도수정을 할 기회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 죄가 더 무거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선지식들은 이런 뜻으로 나쁜 업을 짓지 않고 열 가지 선한 일을 닦게 한다는 것입니다.
살생(殺生)하는 이는 악업(惡業)을 지었고, 살생하지 않는 이는 선업(善業)을 지었고, 방생(放生)하는 이는 정업(淨業)을 지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이겠습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방생한 사람입니다. 정업을 짓는다는 것은, 악업을 짓지 않게 할뿐만 아니라 선업을 짓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선업을 닦게 하는 것은 살생하지 아니하고 방생하고, 도둑질하지 아니하고 나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지식은 법대로 말하고 말 한대로 행하는 분 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이냐 하면, 부처님을 비롯해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다 선지식입니다. 내 스스로가 선근이 있고 지혜가 있다면 모두가 다 선지식입니다.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닦으면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닦게 하고, 스스로가 선정과 계율과 보시와 많이 아는 것과 지혜를 닦아 행하면서 다른 이로 하여금 믿고 계율을 가지고 보시하고 많이 알고 지혜를 닦게 하기 때문에 그런 분들을 이름 하여 선지식이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법대로 말하고 말 한대로 행한다는 것은 살생하지 아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상대를 살생하지 않도록 해주고, 나아가 10악업(十惡業)을 10선업(十善業)으로 전환시켜 주고, 나아가 10선업을 10정업(十正業)으로 전환시켜준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바다를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다”는 내용의 법문을 한 적이 있는데 그 글을 읽은 어떤 분이 ‘스님 바닷물이 짠데 거기다 더 보탤 일이 있습니까?’하는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현상에서 드러나는 이치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강물이 흘러가면서 자체가 짠 강물은 없습니다.
한 가마니의 소금을 항아리에 붓고 물을 퍼 부으면 설령 항아리가 아무리 크다 한들 항아리 안에 들어있는 물은 짭니다. 그러나 그것을 낙동강에 쏟아 부으면 어떨까요? 질량의 법칙으로 보면 물의 양과 관계 지어지는 겁니다.
보리를 닦고 선행을 닦아 나가는 것 역시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먹물에 맑고 깨끗한 물을 부어서 용해시키면 그 물은 맑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먹물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염전에서 소금 만들듯 물을 증발시키면 먹물이 다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먹물이 안 나오게 하려면 끊임없이 맑고 깨끗한 물을 부어주어야 하는데, 깨끗한 물을 부어주는 작용이 바로 기도요, 정진이요, 바라밀다요, 보살행입니다.


『불자들이여, 선지식이라 함은 선한 법이 있는 까닭이니, 무엇을 선한 법이라 하느냐. 짓는 일이 스스로 즐겁기를 구하지를 아니하고, 항상 중생을 위하여 안락을 구하며, 다른 이의 허물을 보고도 단점을 말하지 아니하고, 입으로는 선한 일만 말하나니,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불자들이여, 허공에 있는 달이 초하룻날부터 보름까지는 점점 살아나듯이 선지식도 그와 같아서 배우는 이로 하여금 나쁜 법은 멀리하고 선한 법은 자라게 하나니라. 불자들이여, 선지식을 친히 가까이하는 이는 본래 정진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지견이 없었더라도 문득 있게 되며, 구족하지 못한 이는 구족하게 되나니, 왜냐면 선지식을 친히 가까이 하는 까닭이며, 친히 가까이 함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의 깊고 오묘한 이치를 알게 되기 때문이니라.』


그래서 사람들은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이라고 말합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합니다. 즉, 좋은 이들과 함께 어울림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방송매체의 발달과 노래방문화 등으로 인해 요즘사람들은 가수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 치고 신심 없는 사람 없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스님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소중한 줄을 잘 압니다.
불자들과 함께 백팔대참회(百八大懺悔)를 세 번 반복해서 한 다음 함께 땀 흘린 불자들과 “나무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南無 三界導師 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을 염송하면 비록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에서 땀이 나도 목탁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 가듯이 듣기가 좋고 또 한없이 염불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염불삼매(念佛三昧)입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선택을 받아서 500동남동녀(童男童女) 사이에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났는데, 마지막 미륵보살(彌勒菩薩)이 권해서 만난이가 또다시 문수보살이었습니다. 중생심으로 생각해보면 기가 막히는 일 아닙니까? 그러나 시계가 한번 도는데 360도라면, 시침이든 분침이든 초침이든 간에 그 자리는 늘 만나지만 출발점에서 시작한 그 자리가 한 바퀴 돌아오면 60초도 되고 60분도 되고 12시간도 되는 이치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야광귀(夜光鬼)처럼, 그동안 배우고 익히고 닦아왔던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놓쳤는데 선재의 고무풍선 안에 들어있던 그 경계가 또 다시 문수를 만났을 때 탁하고 터지니까 어린 아이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고무풍선이 없어졌지만 고무풍선 속에 담겨져 있는 바람과 우주 법계에 담겨져 있는 이 세상이 둘이 아닌 이치를 아는 그 경계를 우리는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선지식은 선한 법이 있는 까닭에 선지식이라고 했고, 선한 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선법을 닦는 것인데, 살생하지 아니하고 방생하는 그 이치, 도둑질 하지 아니하고 나누는 그 이치를 10업으로 정리해서 표현하고 행동을 하는 분이 바로 선지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짓는 일이 스스로 구하지 아니하고 항상 중생을 위해서 편안함을 구하며 다른 이의 허물을 보고도 단점을 말하지 않고 입으로는 선한 일만 말하나니 그래서 그분이 선지식이고, 허공에 있는 달이 마치 초하룻날부터 점점 커져서 보름달을 이루는 것처럼 선지식도 그와 같아서 배우는 이로 하여금 나쁜 법은 멀리하게하고 선법은 항상 자라게 하기 때문에 그분이 선지식입니다.
밥상머리에 앉으면 밥 먹기는 수월하지만 밥상머리에 앉았다고 배부르지는 않습니다. 이부자리 속에 들어가면 잠자는 게 수월하고 휴식하기는 좋지만, 그렇다고 잠든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될 일들이 있습니다. 배고프다고 한입에 밥을 다 털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 한 스푼 한 스푼 먹다보면 배가 불러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 경전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어떤 집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참기름을 음식에 넣어서 콩나물도 무치고 했는데 그렇게 맛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주인한테 물었습니다. “대관절 이 집은 음식이 왜 이렇게 맛있느냐?”고.
“네, 참깨를 볶아서 절구에 찧어서 천에다 싸서 꾸욱 눌렀더니 이런 기름이 나왔습니다.”그 기름을 섞어서 음식을 만들었더니 맛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이 집에 와서 참깨를 세 가마니나 볶더랍니다.
참기름을 나눠서 대중공양 하려고 그랬나보다 생각했는데, 노인이 세 가마니를 볶아서 문전옥답에다 뿌리는 겁니다.
“어떻게 참기름 짤 때마다 가마솥에 볶고 천으로 짜는 번거로운 일을 반복하느냐?”고.
참깨 밭에다 뿌려놓으면 솥에 볶을 일도 없다는 겁니다. 그 밭은 어떻게 됐겠습니까? 참깨가 자양분이 되어서 잡초만 무성했을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학입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참으로 따뜻하고 편안하고 넉넉하고 너그럽고 포근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속에서 모든 이들에게, 아니 가족들, 아니 이웃들, 아니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만이라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선지식은 말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했으면 행동하고 그것을 모든 인연 있는 이로 하여금 같이 닦아 나가게 하는 동사섭(同事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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