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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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실지견(如實之見)의 사회를 꿈꾸며

조 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같은 상황이나 사건, 사람을 놓고도 보는 눈은 각각이다.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누출을 불러온 일본 대지진에 대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대한 경고”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선 그런 대재앙에도 불구하고 침착성을 잃지 않은 일본인들의 모습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다르게 보는 것은 그런 대형 사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길을 걷다가 자전거와 부딪쳐 넘어진 경우에도 어떤 사람은 “재수 없다”며 하루 종일 콧바람을 씩씩 불지만, 다른 사람은 “팔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었는데, 이만하니 다행이다. 나는 역시 운이 좋다”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도 있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만의 안경을 쓰고 세상과 사건을 바라본다.
이런 편견과 관점에 의해 분별하고 시비하고 차별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불교는 육감과 부딪쳐 일어나는 일체의 것이 착각을 불러온다고 본다. 따라서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실지견(如實之見)’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하는 것 천지다.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도덕이건, 종교적 교리건, 이데올로기이든, 모든 것이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낳게 하는 것들이다.
<매트릭스>는 이런 도그마의 차원을 넘어선 더 큰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인간 세계 자체가 컴퓨터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로 믿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물질만능과 과학만능주의에 경도된 인간들이 개발한 인공지능에 의해 컴퓨터 시스템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컴퓨터에 의존하다가 컴퓨터에 잡아먹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현실로 믿고 있는 세상은 가짜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금강경>의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놓은 것만 같다.
<금강경>에 따르면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모든 만들어진 것)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꿈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음)하며 여로역로전(如露亦如電·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음)하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함)해야 한다고 했다.
눈 푸른 현각 스님이 <매트릭스>를 7번이나 보고 또 보았다는 것도 이 영화가 불교적 진리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매트릭스>는 전편에 흐르는 메시지 뿐 아니라 시종일관 깨달음을 주는 사건과 메시지로 일관해 놀라움을 주고 있다.
<매트릭스> 3편의 시리즈를 차례로 살펴보고 깨달음의 세계로 달려가 본다.
<매트릭스 1>은 평범한 청년 네오가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매트릭스와 싸워서 승리하는 것을 그렸다.
<반지의 제왕>에서 세상을 구한 것이 난쟁이들이었듯이 이 영화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가진 무한한 능력을 잃어버린 채 노예가 되기도 하지만, 일체 중생의 구세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류를 지배하는 매트릭스로부터 독립을 위해 싸우며 하늘에 떠있는 항공모함인 ‘호버크래프트’를 지휘하는 모피어스는 예언자가 인류를 구원하리라고 한 바로 ‘그’가 네오라고 믿는다. 항쟁군의 선택에 의해 모피어스 앞에 온 네오는 ‘너는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한 매트릭스의 노예에 불과하며, 모든 감각의 지배를 받아 마음의 감옥 속에 갇혀 있다’는 믿기지 않은 사실을 전해 듣는다.
모피어스는 네오 앞에 파란약과 빨간약을 내놓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해 먹게 한다. 파란약을 먹으면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된다. 하지만 빨간약을 먹으면 끝까지 진실을 향해 가게 된다. 네오는 결국 쉽지만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삶을 거부하고, 고난이 닥치더라도 진실을 볼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 때부터 네오는 ‘탁월한 전사’ 훈련을 받게 된다. 그런데 태권도와 쿵푸와 가라테를 배우면서도 몸으로 배우는 게 아니다. 그는 누워서 두뇌와 연결된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두뇌 훈련을 받는다. 의식이 이미 받아들인 것은 곧 몸이 받아들인다는 진리를 이곳에선 어김없이 보여준다. 의식 세계에서 이미 무예의 고수로 거듭난 그의 몸은 잘 훈련된 고수가 되어있다.
하지만 그에겐 여전히 인간적인 의심과 두려움과 불안이 있다. 의식 세계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믿게 되면, 현실에서도 할 수 있지만, 의식 세계에서부터 의심이 있다면 그 서원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 매트릭스 요원들이 고층건물에 근무하는 네오를 잡으려 왔을 때 모피어스는 무선전화로 네오에게 창문 밖으로 나가 비계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 피신하라고 했지만, 네오는 창문 밖에서 도로를 내려다보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나는 못해!”라며 스스로의 능력을 부인해버리고 말아 결국 잡혀버린다. 이어 컴퓨터 로딩을 통해 두뇌훈련을 마치고, 실제 적응훈련을 위해 이 건물 옥상에서 다른 건물 옥상으로 점프를 하다가 역시 도로 바닥으로 떨어져버리고 만다. 의심과 두려움과 불안을 여전히 비우지 못한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본 호버크래프트 항쟁요원들에겐 네오가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하지만 항쟁 요원인 트리니티는 네오를 사랑하며, 모피어스 못지않은 절대적인 응원자가 된다.
호버크래프트 항쟁요원들이 인간인데 반해 매트릭스 요원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의 전사이므로 불사신이나 다름없다. 호버크래프트의 최고수인 모피어스 조차 매트릭스 요원들에게 잡히고 만다.
네오가 구세주로 깨어나는 것은 바로 이 때부터다. 네오는 모피어스의 기대와 달리 자신이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는 놀랍다. 이타적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계란으로 바위를 치기도 하고, 자신의 죽음도 불사하는 의지를 보이기도 하다. 네오는 모피어스를 구하고 인류를 구하기 위해 매트릭스 요원들과 맞선다.
매트릭스 요원들이 쏜 총알에 맞아 심장이 멎는 순간 트리니티의 키스에 의해 네오가 깨어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런 면이 없지 않지만, 부활한 네오가 매트릭스 요원들과 맞서 싸우는 것은 부처로 깨어난 중생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조나단 어빙스턴의 <갈매기의 꿈>에서 나온 갈매기가 자신의 무한 능력을 깨달아 비상한 것처럼 네오는 자신의 무한 능력을 깨닫게 되고, 불사신 같은 매트릭스 요원에 맞서 이긴다. 그래서 시스템을 정지시키고 통제와 규제가 없는 진짜 세상을 보여주겠다고 나선다.
마치 보리수 아래 앉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거대한 힘을 가진 마왕 파순의 유혹을 이겨내어 정각을 이룬 순간 마왕의 세상이 무너져 내리듯이 가짜의 세상은 그렇게 사라진다. 과연 누가 네오처럼 착각으로 가려진 세상의 장막을 거둬내 가짜 세상이 아닌 진짜 세상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은 대부분 자기만의 안경을 쓰고 세상과 사건을 바라본다. 이런 편견과 관점에 의해 분별하고 시비하고 차별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불교는 육감과 부딪쳐 일어나는 일체의 것이 착각을 불러온다고 본다. 따라서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실지견(如實之見)’ 할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