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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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의 화합정신은 본분사의 실천으로 구현된다

김호귀 / 동국대 선학과 교수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세상살이는 참으로 다양하다. 다양한 만큼 복잡하기도 하고 불화도 있는가 하면 재미도 있으며 보람도 있고 가치도 있다. 이것은 세상살이를 하는 당사자들에게 늘상 일어나는 모습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와 같은 모습이 어떤 질서의 법칙에 의하여 일어나고 전개되어 간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이끌어나가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때로는 지나치게 무모한 행위가 벌어지기도 한다. 도덕과 윤리의 파괴라든가 경제질서의 혼란, 기타 숱한 불미스러운 모습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더불어 그와 같은 행위를 어떤 기준에 의하여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온갖 비리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 근원적인 바탕에는 사람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깔려 있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탐욕을 청정한 계율로 다스리고 어리석음은 올바른 마음의 집중을 통하여 다스릴 것을 말씀하셨다. 아함경 증지부 제2권 제5의 중회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세간의 모든 일을 다함께 더불어 행하고 서로 위해주며 다툼이 없이 행하라. 그러면 마치 우유와 물이 서로 화합하듯이 자연스럽게 성취될 것이다. 여기 물과 우유처럼 자비스러운 눈빛을 지니고 살아가는 비구의 모임을 화합대중이라 말한다. 부처님의 교단은 실로 이와 같아서 세상 사람들의 가장 뛰어난 복전이다.』


불교의 교단을 가리키는 승가라는 말에는 이미 화합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화합을 중시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만큼 그 이면에는 화합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속사정도 무시할 수 없다. 화합이란 단순히 섞어놓은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으로 말하면 일정한 목적이나 이익을 위하여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반드시 일정한 규범이 있다. 그 규범은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최소한도의 구속력은 지니고 있다. 곧 집단은 구성원의 결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구성원에게 구속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구성원들은 집단으로부터 개개인의 이익과 권리를 보장받기 때문에 그것을 감수한다. 나아가서 기꺼이 집단을 위하여 희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화가 발생하는 것은 규범의 불완전성이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는 소수 사람들의 태도에 달려 있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집단을 이끌어가는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더불어 행하고 위해주면 대부분의 불화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그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승가라는 집단을 통하여 실천하였다. 그러나 승가라 해도 시대와 상황은 너무나 많이 변하였다. 그래서 승가의 운용을 부처님 당시의 기준으로 되돌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부처님께서 제시한 승가의 진정한 정신을 현대사회에 부합되도록 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승가의 본래정신을 구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자리이타의 정신이다.
자리이타는 위에서 말씀하신 더불어 함께하는 것으로 다툼이 없는 행위이다. 자리이타의 구체적인 모습은 지혜의 터득과 자비의 실천으로서 출가정신의 본분사일 뿐만 아니라 불교정신의 근간이었다.

그와 같은 불교의 가르침은 우주자연의 조화와 세계인류의 화합으로 개인과 세계의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인물이 세간의 전륜성왕과 출세간의 보살이었다. 전륜성왕은 권력으로 타인을 위협하거나 핍박하지 않고 덕화로 귀의시킨다. 그러나 때로는 섭수(攝收)의 입장에서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절복(折伏)의 입장에서 무력으로 굴복시키기도 한다. 일찍이 마가다국이 밧지국을 침공하려고 할 때에 부처님은 7종법을 가르쳐 전쟁을 방지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부득이한 경우에 대해서도 세 가지 배려와 세 가지 자비심의 조건을 지켜야 한다고 대살차니건자소설경에서는 설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이 시기의 대승경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금광명경 및 인왕반야경과 더불어 호국삼부경으로 간주되는 법화경에서는 경문의 어느 곳에서도 국왕의 수호라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관세음을 염함으로써 국왕은 환난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 경전을 수지하는 자는 누구든지 막론하고 액난을 피하고 복을 불러들인다는 주술적인 효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공이 번역한 인왕호국반야경에서는 국왕의 수호가 곧 국토의 수호로서 그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을 위한 행위로 부각되어 있다. 이로써 국왕에 대한 수호가 국토의 수호로, 국토의 수호가 국민의 수호로, 국민의 수호가 반야바라밀에 의한 개개인의 자각으로 성불을 향한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이것이 곧 외호(外護)와 내호(內護)가 동등하게 강조되는 근거였다. 따라서 호국을 강조하는 것은 중생의 구제를 향한 자비의 전개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보살행의 가장 전형적인 실천이 육바라밀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이와 같은 불교의 근본정신은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변할 수는 있다. 그래도 역시 자리이타는 지혜의 터득과 자비의 실천임에는 변함이 없다. 요즈음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몇몇 교단의 선거에서 그 대표자를 뽑는 행위는 당연히 이와 같은 본래정신을 바탕으로 한 축제의 마당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발문>
불화가 발생하는 것은 규범의 불완전성이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는 소수 사람들의 태도에 달려 있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집단을 이끌어가는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더불어 행하고 위해주면 대부분의 불화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그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승가라는 집단을 통하여 실천하였는데, 그 바탕에는 자리이타의 정신이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