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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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지눌의 화엄사상(華嚴思想)

-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중심에서 -

탄탄스님 /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지난호에 이어>

Ⅲ. 지눌불교의 사상적 특징
지눌의 시대에는 선과 교가 대립하여 쌍벽을 이루고 지눌은 그러한 모순에 커다란 의혹을 품고 있었으며 일불(一佛) 제자들이 선교 제종(諸宗)이 서로 문호(門戶)를 달리하여 대립하고 우열을 가리는가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 있었다.
더욱이 교와 선의 대립은 큰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혜능의 『육조단경』을 읽고 처음으로 선문의 오의(奧義)를 자증(自證)하였다고 믿었던 지눌은 그 뒤로 후학을 제접(堤接)함에 있어서 항상 이『육조단경』을 스승으로 삼는다고 말하였다. 빛나는 불성의 확인이 살아 있는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인가되지 않고, 좀벌레의 노략질을 견디기 어려운 한낱 책 한 권으로부터 얻어진다니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스승에 의한 인가보다 책에 의한 인가라는 비정상적 사태, 즉 당시의 시대와 사회의 통념을 벗어난 길은 지눌 자신에게도 믿어지지 않는 꺼림칙한 사태였을 법하다. 따라서 지눌은 당시 한창 위세를 떨치던 화엄종의 소의경전 『화엄경』을 통하여 깨달음의 구극을 체험하려고 삼 년을 불철주야 열람한 끝에 두 번째 깨달음을 얻는다. 사사무애법계를 가볍게 무시하고 부동지불의 보편성과 번뇌무명이 곧 부처의 당체임을 확인한 이통현의 『신화엄경론』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 두 번째 깨달음 역시 지눌에게는 스승 없이 남의 책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체험의 한계였던 것 같다. 늘 가슴이 원수와 함께 사는 듯 개운치 못한 느낌이 있었다고 고백했던 것으로 보아 깨달음의 완성으로 스스로 여길 수 없었던 듯하다.

사실 지눌의 마지막 저작으로 여겨지는 『간화결의론』에 나타난 학인제접의 순차에 따르면 만법유식(萬法唯識)이나 부동지불 따위의 교리적 입문은 어디까지나 자교명종(藉敎明宗), 즉 교학적 이론 체계에 의지하여 선종의 체험을 뒷받침하는 노릇에 그치고 만다. 구중현(句中玄), 즉 아직 문자속을 아름대는 헛된 그림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대혜선사의 어록이 간행되어 만 삼 년이 안 되던 해에 지리산 상무주암 꼭대기에 앉아 비록 책을 통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이나 세속과 절간의 구별이 없는 활발발지의 생활선의 진면목을 자득하여 가슴속의 원수를 쓸어 내니 이것이 이른바 지리산 묘고봉상(妙高峯上)의 일대쾌거, 지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완전한 깨침의 성취였다. 『육조단경』-『신화엄경론』-『대혜서장』으로 이어지는 저작의 엮음에서 지눌의 독특한 사상, 선불교의 철학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지눌의 화엄경을 매개로 하여 돈오(頓悟)의 관문에 깊은 확신을 갖게 되었고, 정혜결사에서의 실천문의 하나인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의 이론적 기반을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눌의 원돈관문에 대한 확신은 고려불교사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였던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Ⅳ. 지눌과 화엄사상과의 연관성
보조 지눌(1158-1210)에게 있어서 화엄사상과의 연관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눌은 범일국사의 후예이다. 25세 되던 해(1182년, 명종 12년) 고려 송도(開京) 보제 선사(普濟 禪寺)에서 열린 담선 법회(談禪 法會)의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명리의 길이라 버리고 산사에 은둔하여 전심수도(全心修道)하던 운수납자(雲水衲子)이며 늘 푸른 선객(禪客)이었다. 그러한 그가 화엄교지에 의하여『원돈성불론』을 저술하고『원돈신해문』을 하나의 선문으로 설정하게 되었는가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지눌의 시대에는 선종은 구산선문이 파를 달리하여 대립하였고 교종은 화엄과 천태를 비롯하여 총지, 신인, 유가(瑜伽)소승, 남산종 등이 우열을 다투고 있었다. 지눌이 화엄교학에 심취하는 장면을 이종익박사는 이렇게 묘사한다.
“지눌은 일찍이 선문의 즉심즉불(卽心卽佛)의 교지(敎旨)에 의하여 마음을 닦아 오면서 화엄 교에 오입(悟入)하는 문을 의심하여 강자(講者)에게 물은 즉 자심만 관하고 사사무애를 관하지 않으면 불과원덕(佛果圓德)을 잃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계합되지 않으므로 다시 대화(對話)하지 않고 산중(山中)에 들어가 대장경을 열람하여 불어(佛語)가 심종(心宗)에 계합(契合)되는 어구를 찾기를 무릇 삼년(三年), 화엄출현품(華嚴出現品)에 일진(一塵)이 대천경전을 포함하고 있다는 비유를 듣고 여래의 지혜가 중생 신중에 갖추고 있건만 범부는 불지 불각한다고 한 대목에 경전을 머리에 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이것이 화엄과 인연을 맺게 된 동기이다.

지눌에게 있어서 화엄을 논하고자 한다면 이 통현을 거론해야 제격이다. 지눌이 이통현의 화엄론을 열람하다가 삼신초위에게 각수 보살을 해석하는데 삼각의 뜻이 있으니 첫째, 자기의 신심이 본래 법계의 자정 무구한 본바탕임을 깨달음이요 둘째, 자기 신심의 분별성을 본래 부동지불임을 깨달음이요 셋째, 자심이 사정을 간택하는 묘혜가 곧 문수사리 보살임을 깨달음이니 신심초에 이 삼법을 깨달았으므로 각수보살이라고 하였다 하고 이르기를 이 몸은 지혜의 그림자이며 국토도 그러하다 지혜가 맑으면 그림자가 밝아서 대소가 상입 함이 인드라망경계(因陀羅網境界)와 같다고 한 문구(文句)에 이르러서 경을 덮고 탄식하기를 “세존이 입으로 설한 것이 교가 되고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불?조의 심?구가 반드시 서로 어그러지지 않으려니 어찌 근원을 추궁하지 아니하고 헛되이 집착하여 망년되게 쟁론(爭論)을 일으켜 헛되이 천일(千日)을 보내느냐?”
지눌은 이러한 논문 통현화엄론(論文通玄華嚴論)으로 마음의 체용이 곧 법계이 상상임을 알게 되면 사사무애의 덕과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공이 분외가 아님을 알게 된다.
지눌이 통현화엄론을 무엇보다 정밀이 탐미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Ⅴ. 결어
지눌에게 있어서 돈오(頓悟)는 공부에 들어가는 첫 단계에서 자심이 곧 참된 부처임을 바로 믿는 데 있다. 자심과 자성 두 당사자 간의 직접적인 관여에 의한 내적인 교류의 순간, 즉 자성의 본래적인 특징인 공적영지를 자성의 부름에 의지하여 자심이 회광반조에 의해 깨닫는 그 찰나(刹那)의 순간, 그때가 곧 자심이 자성이고 자심이 바로 참 부처가 되는 돈오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미 돈오하였는데 왜 점수(漸修)해야 하느냐 하면 비록 불성(佛性)을 보았다 하더라도 오랫동안의 습기가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는 없다. 따라서 성불(成佛)의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실천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근본처(根本處)를 깨닫고 점수(漸修)해가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선오후수(先悟後修)가 생기게 된다. 즉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는 선오후수(先悟後修)로서 시간적 전후관계(前後關係)에 따라서 먼저 오(悟)한 이후에 차차로 수(修)한다는 의미(意味)가 내재(內在)되어 있다.

즉 점수는 법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중생(衆生)이 가지고 있는 근기(根器)의 차이 때문에 생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눌이 보기에는 돈오돈수나 돈오무심의 경계를 증득한다는 것은 당위적이고 선언적인 명제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눌은 상호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돈오라면 점수는 아니고 점수라면 돈오가 될 수 없다는, 서로 화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돈오와 점수를 회통시킴으로써 하나의 독특한 변증의 조합에 이르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돈오와 점수는 언어적 표현으로는 서로 모순되지만 실천적으로는 서로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서 돈오와 점수는 방편이며 심지어 구경각마저도 방편이다. 실재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며 우리의 삶을 주재하는 자심이라는 심성안에 들어있는 자성일 뿐이다.

지눌의 사상체계 속에는 여러 가지 밝혀져야 할 의문점이 있다.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두 가지 극단의 지양(止揚)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려는 종교철학(宗敎哲學)의 역사에서 거물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점이라 하겠다. 지눌은 참선을 위주로 하는 선종의 체계 속에 교종의 간경이 지니고 있는 위치와 뜻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선과 교가 대립하여 쌍벽을 이루는 시기에 지눌은 그러한 모순에 커다란 의혹을 품고 있었으며 일불(一佛) 제자들이 선교 제종(諸宗)이 서로 문호(門戶)를 달리하여 대립하고 우열을 가리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이다. 지눌에게 있어서 선과 교의 대립은 큰 의문이 아닐 수 없지만 한국 불교의 중창주 보조지눌은 화엄가치를 깨우치고 돈점수행(頓漸修行)에 최대의 거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병헌, 「정혜결사의 취지와 창립과정」 (「보조사상」. 제5-6합집. 서울:보조사상연구원, 1992), 59쪽
 동국 대학교 교수 역임 철학박사
<저서> 동양철학개론, 불교입문, 불교 사상 대관, 보조 국사의 연구, 조계 중학 개론, 조계 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