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준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인 생이란 무엇인가’와‘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인류의 영원한 화두이다. 이 가장 오래되고도 동시에 가장 참신한 화두를 풀기 위해 불교인은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교에 의지한다. 그렇다면, 불교란 무엇인가? 이것 또한 참으로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가 이 세상의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기 전에는 불교를 진실로 알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오해도 적지 않다. 불교에 대한 오해를 노골적으로 토해내고 있는 무리가 바로 유가(儒家)이다. 함허 스님은 그러한 유가의 오해를 그의『현정론』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불경을 살펴보았더니, 그것은 허원(虛遠)함을 힘쓰고 적멸(寂滅)을 숭상하였다. 소학(小學) 보다 곱절이나 공을 들여도 쓸모가 없고 대학(大學)보다 고상하나 실리(實利)가 없다. 그로써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이 될 수는 없으리라. 남자는 아내가 있고 여자는 남편이 있다. 가업을 이어 그 제사를 끊지 않아야 효도라 말할 수 있다. 지금 부처는 혼인을 끊고 인륜을 버려 길이 산 속으로 가 영원히 후사를 끊는다. 그것을 어찌 효도라 말하겠는가. 유가는 이처럼, 해탈과 열반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출가수행을 독려하는 불교를‘허원적멸’의 도피적 종교 또는‘무부무군(부모도 없고 임금도 없는)’의 반인륜적 종교라고 오해·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서구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막스 베버(Max Weber)는 불교는 개인 적인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중시하는 개인 구제의 종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개인적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계는 버려져야 하고 자아는 금욕과 고행을 통해 부정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기본입장이라고 오해했다.
필자도 한 때는 불교를 현실도피의 종교, 염세주의의 종교로 오해한 적이 있었다. 청소년 시절, 아버님과 두 형님과의 영원한 이별을 경험한 필자에게 세상은 온통 슬픔으로 여겨졌고 삶은 참으로 허망하였다. 그리하여 한 동안 나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자 삶의 최고선인 열반이 ‘차안(此岸)’이 아닌‘피안(彼岸)’의 영역에 속하는 어떤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불교를 더 깊이 공부해 오면서, 그런 믿음과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이 아무리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찬, 말 그대로 고해(苦海)라 할지라도 삶의 이상은 결국 이 세상인 차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열반은 현실 너머에 있는 것 이 아니라 현실과 공존한다[現法涅槃]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감히 불교를‘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로, 열반을‘삶의 완전연소’ 로 정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의가 틀리지 않다면, 불교는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지침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과정과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까지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어머니 뱃속에서의 태교부터 시작하여 죽어서 장례를 치르고 제사지내는 일까지, 청소하고 세수하며 밥먹는 일부터 잠자는 일까지, 그리고 경제생활·취미생활·성생활 등의 생활세계에 대한 불교적 조명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필 자는 이러한 생각에서 수 년 전(2002~2003) 이미『불교와 문화』에‘잠’‘신문읽기· TV보기’‘귀찮고 사소한 일들-설거지·빨래·청소·목욕’‘차 마시기’등, 11가지 주제에 대해 기고한 바 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한 동안 중단하였다가 이제 다시『불타』지에 1년 동안「생활세계와 불교」를 연재하게 되어 참으로 기쁘고 감회가 새롭다.
「생활세계와 불교」라는 제목 속의‘생활세계’는 필자가 의도적으로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 용어에서 따온 것이다. 현상학(Phenomenology)이란, 의식으로 경험한 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거나 어떤 전제를 가정하지 않고 직접 기술하고 연구하는 것을 제1 차적 목표로 삼는 20세기의 한 철학사조다.
생활세계(Lebenswelt)는 현상학의 중요한 개념으로서, ‘모든 대상적 경험의 배후에 바탕으로 작용하는 전체지평’또는‘문화적 상대성에 좌우되지 않는 모든 의미형성의 궁극적 지반’ 으로서 직접적인 지각경험의 세계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과학이나 기술의 진보와 성과가 항상 흘러드는 유동적인 역사적 세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근대과학은 방법적 산물인 수학적으로 객관화할 수 있는 세계와 생활세계를 구분하지 못해 자신의 원천인 생활세계를 은폐하고 망각해 왔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생활세계’라는 개념을 접하면서 불교의 몇 가지 가르침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나는 마조 도일(馬祖道一) 선사의‘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는 가르침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철(性徹) 스님의‘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였다. 이 외에도, 더러운 것이 가득한 사바세계가 그대로 법신(法身)이 머무는 상적광토(常寂光土)라는 의미의‘사바즉적광(娑婆卽寂光)’이라든가‘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등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필자는 성철 스님의‘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법어를‘산은 역시 산이요 물은 역시 물이다’ 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원래 이 가르침은 청원 유신 (靑原惟信) 선사의 다음과 같은 상당법어(上堂法語)에 연유한다. 노승이 30년 전 참선하기 이전에는 산은 청산(靑山)이요 물은 녹수(綠水)였다. 그러던 것이 그 뒤 어진 스님을 만나 깨침에 들어서고 보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도 물이 아니더니, 마침내 진실로 깨치고 보니 이제는 산이 의연코 그 산이요 물도 의연코 그 물이더라.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서로 다른 것이냐? 만일 이 것을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노승과 같은 경지에 있음을 내 허용하리라.
이 법어에는 3단계의 정신세계가 그려져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단순히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보는 단계로서, 깨침이 없는 통속적 세계다. 이것은 무명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있는 범부중생의 세계다. 두 번째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닌 단계로서, 선(禪)의 문턱에 들어선 세계요, 세 번째는 산은 산일 뿐이요 물은 물일 뿐인 단계로서, 선의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한 깨침의 세계이다.
『유마경』에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사리불과 천녀(天女)의 문답이 그것이다. 사리불이 천녀에게“음행·성냄·어리석음을 떠나는 것이 해탈이 아니냐?”고 묻자, 천녀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부처님께서 음행·성냄·어리석음을 떠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설하신 것은 증상만인(增上慢人: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도 자기 딴에는 깨달았다고 우쭐거리는 사람)을 깨우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증상만인이 없다면 부처님께서는‘음행·성냄·어리석음이 곧 해탈’이라고 설하실 것이다. 법정 스님은 한 수필집에서‘출가수행자는 다시 참답게 이 세상에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 이라고 하였다. 불 교는 부(富)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는다. 다만 부에 대한 집착을 경계할 뿐이다. 따라서 노동과 생산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그것은 부처님과 한 농부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어느 날 바라드바자 농부가 자기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고 생활해 가는데 사문들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보시에 의해 살아가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내 믿음은 종자요,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내 멍에와 호미…생각은 내 호미날과 작대기입니다”라고 하면서 부처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는다고 당당하게 대답하셨다. 이것은 출가수행이 밭 갈고 씨 뿌리는 생산노동과 다르지 않은, 정신노동이라는 점을 강조 하고 있지만, 바꾸어 말하면 생산노동은 수행자의 정진처럼 신성하고 고귀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법화경』「법사공덕품」에서는‘직업을 갖고 살아나가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직업과 산업이 곧 불법이다(資生産業卽是佛法)’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는 백장(百丈) 선사의 청규라든가 백용성 스님의‘선농일치(禪農一致)’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리적으로 보더라도 이러한 입장은 이미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팔정도 중의‘정명(正命: right livelihood)’은 바로‘바른 직업’이요‘바른 생활’이다. 깨달음을 통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팔정도를 닦아야 하는 것인데, 이 중의 하나가 바로 정명인 것이다.
불교 공부의 기본 체계라고 할 수 있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의 내용만 음미해 보더라도 우리는‘올바른 생활’이 불교수행의 주춧돌임을 알 수 있다. 계학(戒學)이란 물론 5계 10선계 등을 잘 지키는 것이지만, 일상생활 전반을 반듯하고 지혜롭게 영위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올바르고 지혜로운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참선을 하고 경전을 읽는 것은 사상누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올바른 생활’나아가‘생활의 지혜’는 필요조건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생활세계와 불교」에서는 앞으로 11가지의 주제를 다룰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있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