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새해다. 새해가 오면 희망의 찬가를 불렀다. 그러나 올해는 어느 해보다 어렵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의 찬가를 부르기는커녕 못살겠다고, 죽겠다고 난리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스피노자도 있었는데, 내일 세상이 망할 것도 아닌데 곧 죽을 것 같은 울상을 짓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막다른 골목에서도‘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고 스스로를 경책 하곤 했다. 어찌 보면 그 말은 실제 죽음에 직면하기도 전부터 지레 겁을 먹고, 걱정과 기우로 골백번도 더 죽어가는 사람들의 망상을 베어내는 것이기도 했다. 불교는 바로 어제나 내 일에 살지 않고, 바로 오늘을 살게 한다.
과거의 일에 대한 회환과 미래에 대한 걱정만으로 날을 지새우는 사람과 오늘에 자족하며 충실한 이의 삶은 전혀 다를 게 분명하다.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것은 내일 죽더라도 오늘 미리서 노심초사함으로써 두 번 다시 돌아 오지 않을‘오늘’의 행복을 망쳐놓을 수 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위사람들을 위함도 세상 사람들은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바로 자신을‘오늘’가장 평안하고 행복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두 달 전 열반한 성묵 스님은 바로 그 런 분이었다. 성묵 스님을 처음 만난 것 은 3년 전 쯤이었다. 태백산에서 수행하던 그는 조계종 총무원 기획국장이 되어 상경했다. 20대 출가 이후 20여 년 동안 줄 곧 선방이나
산중 토굴에서 참선만 해온 그가 총무원에도 솔바람 같은 선승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의 추천으로 상경한 것이다. 그는 촌사람이었지만 어느 도시사람보다도 티 없이 맑았고, 잘 웃었다. 갑작스레 상경하는 바람에 변변한 방 한 칸도 없어서 조계사 인근 건물 옥상의 옥탑방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옹색한 구석이 없었다.
그는 지난해 초 조계종 기획국장직을 사임하고 서울 강남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의 선방 선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지난해 여름 봉은사 선방에서 여름 안거(사찰에서 여름과 겨울에 세 달씩 하는 집중 참선 수행)를 났다. 낮에는 신문사에서 일하고 퇴근하고 밤이면 선방에 가서 참선 정진을 했다. 선방은 낮엔 항상 30~40명씩이 정진했지만 내가 퇴근해 절에 도착할 무렵이면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숲 속에 있는 선방엔 성묵 스님과
단둘이만 남았다. 성묵 스님과 나는 밤 늦은 시간, 그리고 이른 새벽에 참선을 하고 때론 밤이 깊도록 차담을 나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과 함께 하게 됐다. 선방은 깊은 숲속에 있어서 그야말로 밤이면 오지 산중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궁궐 같은 선방에 살면서도 오지 산사에서 살 때나 종로의 옥탑방에서 살 때나 매사 삶의 자세는 다름이 없었다. 그는 지난겨울 내가 한국 최고의 오지 암자와 토굴을 기행하는 '하늘이 감춘 땅'을 한겨레신문에 연재할 때 태백산 도솔암, 백련암, 안동 봉정산 중암, 문경 운달산 금선대 등 안내자 없이는 가볼 수도 없는 암자기행에 앞장 서주었다. 그때 험준한 산을 헤맬 때도 그의 인상이 구겨진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태도가 늘 담박했고 말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머리가 시원했다. 그런데 그와 살다보니 그의 말버릇 하나가 뚜렷이 보였다.
“죽어도 좋고!”
그는 무슨 말끝에 늘“죽어도 좋다”고 했다. 결국 원하던 게 안 돼도 좋고,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관없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그 순간 집착과 고집을 바라보는 마음이 해탈되었다. 바라보는 이마저 해방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말은 그 뒤에 이어졌다.
“살면 더 좋고!”
죽어도 좋지만, 지금 살아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반전이었다. 지금 자신의 상태를 ‘죽음’과 비교해서 얼마나 좋은 상태인지 여실히 자족하고 자각하게 하는 멘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도솔천에 머물렀다.
“죽어도 좋고! 살면 더 좋고!”
그의 말끝에서 무거운 집착의 끈들이 툭 끊어지듯 터지는 웃음을 방생한 것이 몇 번이었던가.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을 누리면서도‘죽겠다’,‘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에게 얼음물 같은 축복의 말이었다.
그는 아무도 살지 않던 암자에 가서 마당의 풀을 베다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돼 미처 손도 쓰지 못한 채 50살을 몇 달 앞두고 입적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생각해보니,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 한 말을 적지 않게 했다. 그가 안동 봉정사에 살 때 봉정사 뒤 천등산 솔 숲 명당자리에 지었던 중암이란 토굴 암자에 갔을 때도 그는“내가 죽으면 아무나 인연 있는 사람이 공부할 것”이라며 초탈한 듯 말했다. 그리고 친한 도반들에게도 ‘나는 50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총무원 기획실장 장적 스님도 전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았을지 모른다. 그는 50을 눈앞에서 두고 세상을 떴다.
만약 그가 50살까지 밖에 못살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늘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했다면 그의 삶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러나 내가 본 성묵 스님은 죽을 날을 걱정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늘 오늘만을 살았다. 그래서 다 른 이들이 100살을 살아도 못다 할 호쾌한 웃음을 웃으며 스스로 행복해했고, 남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성묵 스님처럼 낙천적이어서 백낙천으로 불리기도 했던 시인 백거이는‘대주’(對酒· 술잔을 앞에 놓고)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성묵 스님은 약 뻐드렁니인 앞니가 보이도록 늘 호쾌하게 웃을 만큼 낙천적이었다. 그런‘낙천’을 대하노라면 내 마음과 함께 뻥 뚫렸다. 우리가 그처럼‘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망상을 싹둑 베어버린다면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비로서 오늘을 그처럼 유쾌하게 살 수 있으리라. 어려움이 닥쳐 올 때 한번 외쳐보자.
“죽어도 좋고, 살면 더 좋고!”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성성히 살아있으니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