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호
후애마이(Who am I)연구소 소장·Blog.daum.net/hyun-jaeho
깨달음, 또는 깨침에 대해서 우리는 다양한 해석을 합니다. 하지만 궁극의 깨달음이란 뭘까요? 분명히 부처님은 누구나 깨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변에서 깨달은 사람을 보기는 힘듭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주변에는 깨달은 사람이 없는 걸까요? 있다면 왜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걸까요? 2015년 새 해를 맞이하여 ‘깨달음’의 정체를 조심스레 밝혀보고자 합니다. 긴 설명이 필요한 주제입니다만 할애된 짧은 몇 장의 지면으로 최대한 요약하여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혹자는 별 것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종교적인 심오한 의미를 새기기도 합니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깨달음이 삶에서 얻어지는 작은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상 진정한 깨달음을 이해 할 수 없으며, 너무나 종교적인 색채로 깨달음을 생각한다면 그 또한 깨달음의 실체에 다가설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문헌도 찾아보고 많은 이와 대화를 나누어 보았으나, 본질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논할 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저는 이번 1월호에서 제 경험을 바탕으로 깨달음에 대한 진정성과 그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를 바르게 전달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죽음의 경계에서 삶의 본질을 나름 알게 되었습니다. 대 자연의 진정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통한 대오大悟 이후 숱한 삼매를 경험하며 수많은 경전공부와 수행을 통하여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신통력의 하나인 숙명통과 천안통을 얻게 되었으나 그것이 마魔 임을 알아채고 그것을 버리고자 수차례 삼천 배를 올리고 지금은 그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깨달음에 대해서는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주재임을 알지만, 깨달음의 진정한 본질을 알게 되면 삶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1.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것, 정말 맞습니다.
깨달음이라는 말은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삶의 작은 범주 관점에서는…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망막하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을 때
해서는 안 될 일들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그 밖에도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하며 알게 모르게 작은 깨침의 연속으로 살아갑니다. 사실상 깨닫는 것은 그저 알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한 사례가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용어 때문인지 때로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실생활의 작은 경험의 연속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를테면 ‘감각感覺’이라는 말도 사실상 ‘느끼고 알게 된다’는 의미를 갖죠. 열심히 살겠다는 ‘각오覺悟’ 또한 ‘도리를 깨달아 앞으로 닥칠 일을 대비한다’는 의미이겠습니다. (모두 깨달을 ‘각覺’을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와 같이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새롭게 알거나 잊혀졌던 것을 알게 된 모든 것을 통틀어 이야기 하는 말이므로 하루하루 미지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씩 깨닫는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만, 과연 부처님이 이러함을 두고 깨달음이라고 했을까요?
2. 일탈逸脫과 해탈解脫
불교는 물론이거니와 타 종교에서도 깨달음이라는 말은 많이 등장합니다. 용어적 의미에서도 그 맥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시골 어르신의 인생경험담을 듣다 보면 어떤 부분에서 어르신께서 대오大悟(큰 깨달음)가 있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만 봐도 깨달음이란 종교의 힘을 빌지 않아도 수많은 경험과 그것의 긍정적 해석을 통하여 하나씩 터득해 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힘들고 속상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일상의 삶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지요. 잠시나마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일탈逸脫’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일탈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 편안해진다’는 의미이겠습니다. 하지만 ‘일탈’ 이라는 단어에서 사용하는 ‘일逸’은 ‘무엇인가에서 벗어나 편안해 진다’는 의미도 있지만 ‘달아난다’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일탈’이란 무엇입니까? 복잡한 삶을 벗어나 산과 들로 떠나는 형태입니다. 복잡함이 싫어서 잠시 다 잊으려고 달아나는 것이지요. 그것은 활활 불타오르는 자신의 집을 보기가 속상해서 잠시 눈을 감는 형상입니다. 심리적으로 달아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해탈解脫’은 무엇일까요? 어떤 상태에서 벗어난다(달아난다)는 의미가 아닌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실로 일탈과 해탈은 비교 할 수 없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상 누구나 자신의 일생에 있어서 긍정의 삶으로 일관한다면 인생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해탈’의 기본 논리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친 형국으로써, 인생의 막바지에 터득한 해법입니다. 그러함을 터득한 어르신의 해법이 실로 부럽지만 그 연세에 알게 되었음은 결코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보다 젊을 때, 한 살이라도 빨리 그러한 해법을 알고자 함이 우리의 바램인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지요. 그러함을 해결하고자 우리는 종교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일부 불교인이 잘못 아는 것 중에 하나가, 불교는 깨달음이라는 경지를 다루지만 타 종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과 ‘코란’ 등을 옳게 읽어 본 바 없는 편파적 사고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어떤 종교를 마음에 지니든 ‘인생의 진정한 해법(해탈)’을 경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무엇 보다 자기 자신의 발견이 우선!
종교를 떠나서 인생의 진정한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라는 연극 무대에 어떤 역할로 배역을 맡았는지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공자’는 나이 ‘50’ 정도면 자신의 배역이(天命) 무엇인지 알아야(知) 하지 않겠느냐는 의미에서 ‘지천명知天命’을 가르치기 시작 하였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50쯤 되면 과연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뭘 해야 하는지, 그에 맞게 지난날을 살아 왔는지, 알게 될까요? 주변을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리가 있기에 소개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Maslow, 1908~1970)는 ‘욕구위계설’(인간의 욕구는 단계적으로 나타난다는 이론)을 통하여 5단계의 삶의 깊이를 설명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4단계는 자신이 누구인지 왜 태어났는지 알고자 하는 욕구이며 5단계는 자아 성찰이며 자기 발견이요 그 결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자 하는 욕구라고 했습니다. 물론 5단계 욕구의 결과는 사회 환원, 남을 위한 배려, 남과 내가 다를 바 없으니 나눈다는 의미도 없다는 것. 그러한 이론입니다.
깨달음이나 해탈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종교의 힘을 빌리던, 긍정적 마인드로 살던) 5단계의 삶을 누리고 있다면, 필경 타인에게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는 삶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인생을 살아가는 해법을 알았기에 가능할 것이며, 이는 삶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문제에서 벗어나는(탈脫) 진정한 방법을 터득한(해解) 결과일 것이며, 단어적 의미에서 바라볼 때 이것은 해탈解脫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욕구위계설을 발표한 심리학자 매슬로의 사회시험 결과를 보면 일생을 살면서 4단계를 고려하거나, 4단계를 실현한 사람은 고작 20% 미만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1900년대이기는 하나 지금도 별반 차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욱이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4단계를 고려하는 삶은 경제적 뒷받침과 관계가 전혀 없었다는 결과입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풍족할수록 3단계에 안주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4단계의 진입을 비난하는 사례, 혹은 더 없이 풍족한 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1단계)에 머물러 있는 이들을 볼 때, 씁쓸한 마음을 감출 길 없습니다.
4.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우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종교 생활을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경전을 통하여 많은 공부를 하며 수행을 겸하는 과정에서 종교에서 지향하는 궁극의 삶을 꿈꾸게 됩니다. 위빠사나를 비롯한 많은 수행 방법을 배우고 따라 하는 우리네 모습은, 어쩌면 그 꿈의 실현을 위한 작은 행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궁극의 깨달음을 위한 어떤 정해진 과정이 있다면, 아마도 누구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렇지 아니하기에 깨달음은 아주 작은 기회에 얻기도 하고 고난을 통해서 얻어지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깨달음의 단계를 인지하고, 자신의 단계를 관찰하고, 그 다음 단계를 위한 수행이 이어진다면 당연히 궁극의 깨달음이요, 좋은 일이지만, 깨달음의 중간 과정에서 자신을 ‘해害’하거나 삿된(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길로 빠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헛소리를 하기도 하고, 타인들을 무시하기도 하지요. 과거의 역사서를 통해 그런 사례는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는 것일까요?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과정으로 공부를 하던, 수행을 하던 간에 언젠가는 어떤 경지를 맛볼 때가 있습니다. 홀연히 자신의 몸무게가 느껴지지 않거나 (그렇다고 공중부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설혹 공중부양을 한다고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버젓이 눈을 뜨고 있으나 온 세상이 까맣게 보이고 홀연 관세음보살이 보이기도 합니다. 혹은 깨달음이라는 경지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요인이 느껴지거나 보이기도 합니다. 그 순간 이내 그것을 해결하려 달려들기도 하지요. 모 선사는 자신의 손가락을 다 잘라 없앴으며, 모 선사는 공양간에 뛰어들어 스스로 거세去勢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지런히 정진精進하다 보면, 그 동안 자신의 기도정진에 장애요인, 문제 되었던 것들이 강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것만 제거 하면 된다는 생각에 몰입하여 그 일을 자행하고 맙니다. 이것은 실제로 오음마(五陰魔, 월간붓다 2014년 3월호 참조)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마魔’가 잠시 깨달음으로 착각(錯覺, 어긋난 깨달음) 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어떤 경전을 보던지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마魔를 두려워하지 말고, 마魔로써 수행하라, 마魔를 통하여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궁극의 경지를 향할 때 비로서 마魔가 보인다고 말입니다.
1단계 깨달음에서 자신만의 오음마五陰魔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굉장한 발전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문제 되는 요인, 자신의 성공,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의 모습을 실현함에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자신만의 숨어 있는 문제(五陰魔)를 발견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 한다면 진정한 해법을 찾기 위한 첫걸음이 되는 것이지요. 또한 이러한 오음마의 출현은 무릇 세인들이 보기에 본성을 보인다는 표현을 쓸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왜냐, 이 순간 색다른 행동을 하거든요, 이른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저 또한 이 단계에서 몹시 날카로운 제 성격을 보았습니다. 여차하면 사람을 해 할지도 모르는 아주 날카로운 본성 말입니다. 그 순간 저는 생각했습니다. 제가 과거에 아주 나쁜 성격의 소유자였거나 백정이라도 되었던가? 잠시 그 과거를 알고 싶기도 했지만 모두 잊고 끝없이 정진하던 중, 책을 넘기기도 전에 다음 페이지의 모든 글을 읽는 등의 천안통을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통력은 깨달음과 전혀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 또한 마魔임을 알아채서, 수차례의 3천 배를 통하여 천안통을 없애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절대로 1단계에 안주하거나, 느껴지는 마魔대로 실행하거나, 만족하는 순간, 안 하느니만 못한 나쁜 결과를 초래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단계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거나 자신에게 가장 문제되는 요인을 발견하게 해 주는 단계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1단계를 넘는 듯할 때 또 다른 마魔가 찾아오기도 하는데 그 모든 것이 1단계 입니다. 궁극의 깨달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여러 개의 관문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에 따라 이러한 단계가 여러 겹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근기(根機, 월간 붓다 2014년 9월호 참조)에 따라 다르겠지요.
5. 궁극의 깨달음이란
몸에서 오라가 나오고, 황금색 몸으로 둔갑하는 것이 깨달음이 아님을 모두 알 것입니다. 잠시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생각해 보시지요. 제가 보문품을 수백 번 읽은 후 얻은 몇 가지 결론 중에 하나는 ‘세상을 바로 보려면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왜? ‘세상의 소리를 올바르게 듣고, 세상의 모습을 올바르게 보라’는 것이 관세음보살보문품의 요지니까요. 그래서 ‘관세음觀世音’ 아니겠습니까? 관세음보살을 실존인물로 착각하고 소원을 비는 어리석음은 없어야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우리를 구원해주는 영험 한 보살이 아니라, 세상을 바로 보고, 세상의 소리를 바로 듣게 하기 위한 가르침을 담당한 보살이라는 것을 바로 인식하여 세상世相이라는 존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고, 그 소리를 제대로 파악 할 수 있을 때 기본적인 깨달음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법당 출입 30년 임에도 불구하고 공양간에서 (따로 챙겨온 까만 비닐봉지에) 떡 하나 더 주어 담으려 애쓰는 노 보살을 볼 때, 마음이 참으로 아픕니다.
아직 법도를 모르지만 불교에 귀의 하려는 마음으로 절을 올리는 초보 불자에게 단지 어간에서 절을 올린다는 이유로 타박하는 법당 노 보살의 부도덕함을 볼 때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못해 아립니다. 어간(어간御間 : 부처님 전의 바로 정면, 법당의 가운데, 한 복판)의 의미를 가르쳐 주면 될 것을…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여 생기는 그러한 해프닝 속에서 우리의 깨달음은 먼발치로 달아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청지기 사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대 자연이 주인이므로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으므로 모두 함께 써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표현상 대자연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고 서술하였으므로 이를 두고 오인 할 수 있으나 사실은 대 자연의 산물이므로 의미 없는 주인의식은 개인의 마음과 사회를 멍들게 한다는 것이 바로 청지기 사상입니다.
한자漢字에서도 ‘빌릴 가假’를 보면, 산에서 두 손으로 이런저런 광물 (또는 나물) 등을 쓸어 모으는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국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대 자연으로부터 빌린 것이며 그것은 다시 돌려놓아야 한다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假’는 빌리다, 가짜, 일시적 등의 뜻을 가지고 있지요. 우리가 실제로 진짜와 가짜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원래는 진眞자와 가假자의 격음화 결과거든요. 어차피 자신의 것도 아니요, 대 자연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은 가짜(假짜)라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개인 사고방식 속의 ‘세상世上’과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세상世相’이 다름을 알 때 (세상과 세상, 월간 붓다 2014년 10월호 참조), 그리고 자신의 어려움과 자신의 문제가 자신한테 원인이 있음을 알 때, 그 사람은 깨달음의 기본 적인 괘도에 올라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슬픔으로 보고 그대로 넘기지 못하는 품성을 갖게 될 때,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진실의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날 때,
다른 사람이 내는 소음을 들으며 그저 바라볼 수 있을 때,
어린 아이가 힘차게 울 때 듣기 싫어하지 않고 목 아플까 안타까워할 때,
내가 얘기 중인데 옆에서 달그락거린다고 인상 찌푸리지 않을 때,
그럴 수 있는 마음이 진실로 일어날 때, 우리는 깨달음으로 한 걸음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함을 두고 이 또한 생활 속의 작은 깨달음 아니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만, 대 자연의 순리(진정한 법法)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마음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그러함이 생겼다면 당신은 깨달았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6. 경전은 자연 소리의 번역서
깨달음이라는 이름아래, 우리가 공부하는 경전은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는 해설서요,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그것을 번역해주는 번역서적인 것입니다. 진정한 자연의 소리를 이해하면, 궁극의 삶을 영위 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 순간 법法과 도道를 깨우치신 것이겠지요. 물듦을 뜻하는 정精에 얽매이지 않는 무정설법은 참으로 숭고한 설법입니다. 무정설법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곳을 가르쳐 드릴까요?
그 곳은 자연의 바람소리, 시냇물 소리 그리고 그들의 숭고한 움직임이 있는 대 자연입니다. 아울러 인간들의 소리, 그들의 흐름, 패러다임들도 대 자연의 소리임을 알아챌 때 진정한 깨달음으로 다가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