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새해가 밝아오고 또 지나갈 것이다. 채근담에 보면 기러기 떼가 연못 위를 날아서 지나가는 이야기가 있다.
鴈渡寒潭 안도한담
鴈過而 潭不留影 안과이 담불유영
기러기 떼가 차가운 연못 위로
날아감에
기러기 떼가 지나가고 나면
연못은 기러기의 그림자를
붙잡아 두지 않는다네
그렇게 하루하루가 쿨하게 지나가주면 참 좋을 것이다. 독자님들의 새해도 틀림없이 하루 한 달 한 해가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연못물은 사실은 우리 마음이다.
연못 바닥이며 가장자리와 연못 주위의 나무와 꽃은 우리 몸이다. 기러기가 연못 위를 지나갈 때 그림자가 연못물에만 비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마침 그 시간 비치는 것이 아니라 연못 위를 지나고 있는 바람에도 그림자가 스며들고 하얗고 조그만 제비꽃 꽃잎에도 아롱진다. 연못물에 비치는 그림자는 우리 눈에 보이지만 제비꽃 꽃잎 속 그 미세한 수분에 비치고 있는 눈이 우리 얼굴에 매달려 있지 않을 뿐이다. 어느 시인이 일찌감치 노래했던 것처럼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이 그 연못 위를 자나갈지도 모른다. 그것도 방금 연꽃 만난 바람이 아니고 한두 철 전 연꽃 만나고 연잎도 만난 바람에 잠시 그 연못 위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 그 바람결에도 기러기의 그림자가 내려앉을 텐데 우리 눈은 바람도 바람에 활동사진처럼 내려앉는 기러기의 그림자도 볼 생각을 잘하지 않는 경우가 혹 어쩌다가 가끔씩 있기도 하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랑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손목뼈 얘기에 이르렀다. 손목뼈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피부가 감싸고 있고 힘줄과 핏줄과 근육과 인대와 관절시스템이 보호를 하고 있는데 뼛속의 골수에 분포되어 있는 극미세 모세혈관 속에는 극소량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혈액이 아주 느린 속도로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 그 모세혈관 속의 혈액도 연못이다. 그 연못 위로도 수없는 기러기 떼가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다. 가다가 넘어져서 엉겹결에 퍽 짚었던 기러기의 그림자도 들어있다. 채근담에 나오는 연못은 기러기의 그림자를 붙잡아두지 않지만 손목뼈 골수 속의 모세혈관 연못은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던 기러기의 그림자를 깊숙이 붙잡고 있다. 그렇게 붙잡고 있다가 컴퓨터 작업이라도 좀 오래 할라치면 기러기는 날아가고 없는데 기러기의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쑤시기도 하고 저릿하기도 하고 쥐가 나기도 한다. 쥐를 잡으라고 고양이를 집어넣을 수도 없다. 모두가 우리가 무의식으로 붙잡고 있는 그림자이다.
보살은 생사의 언덕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의 언덕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열반의 언덕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생사에 흘러 떠도는 중생들을 배에 실어서 나른다.
생사의 언덕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또 생사의 강물에서 허푸허푸하면서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다. 원문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不住生死 부주생사
不住涅槃 부주열반
발바닥을 못에 찔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철물점에 얌전히 진열되어 있는 못들만 봐도 발바닥이 오글오글 거린다. 발바닥의 세포에 아직 진하게 남아있는 기러기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주 좋은 기억이나 추억이 있는 곳은 그 곳을 생각하기만 해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혈액이 갑자기 휘아 하고 돌아준다. 사람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뵙기만 해도 가슴속 근심걱정이 녹아내려주는 스님도 계시다. 좋은 기억의 기러기 그림자이다. 그렇게 기러기의 그림자는 안이비설신의에 다 들어있다. 매실은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고 설중매의 향기는 상상만 해도 경추뼈까지 시원해지고 척추줄기가 시원하게 따뜻해진다. 시골 부엌 장작불에 구워먹었던 군고구마는 서울 도심 커피숍에서 기억을 떠올려도 장작불에 따스해졌던 뺨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뜨끈한 느낌이 손가락에 전달돼온다.
혀에 닿던 그 군고구마의 맛이라니……. 이제 그 시골집에는 어머니도 안 계시다. 좋은 기억의 기러기 그림자들은 이제 저 넓은 허공으로 훨훨 날아가 주면 참 좋을 텐데.
금강경 야부송에서 야부스님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見色非干色 견색비간색
間聲不是聲 간성불시성
色聲不.處 색성불애처
親到法王城 친도법왕성
색깔을 보아도 색깔에 신경쓰지 않고
소리를 들어도 소리에 마음팔리지
않아야 할지니
색깔과 소리에 걸림이
없어지는 곳에서
친히 법왕의 궁성에
이르러 가리라
손목뼈나 발목뼈나 어깨뼈 속의 기러기 그림자는 소리도 내지 않고 색깔도 뭐 그리 선명하지도 않다. 그런데 그 기러기의 그림자가 꿈틀거릴라치면 입이 소리를 내고 귀에 헛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풀벌레의 울음소리 비슷한데 금속의 뾰족한 부분으로 철판을 긁어대는 소리 비슷한 소리가 아무 이유 없이 들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눈에도 갑자기 어른거림이 찾아오기도 한다.
상상만 해도 귀가 맑아지는 소리도 있다. 새벽 종성, 새벽 예불의 합창 소리는 직접 들으면 말할 것도 없고 생각만 해도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환희로움으로 꿈틀거린다.
필자가 아는 지인은 그 사람은 있거나 없거나 우리 심신에 즐거움을 준다면서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싯구를 읊기도 했다.
心身妙樂 심신묘락
不關有無 불관유무
심신의 미묘한 즐거움은
그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관계가 없다네
지인은 붓글씨로 써서 어느 기획사 대표님께 선물까지 했다.
소리에도 걸리지 않고 색깔에도 넘어지지 않고 향기에도 휘청거리지 않고 충격에도 꿋꿋할 수 있다면 우리 몸과 마음이 늘 즐거울 수 있을 것이다. 소리로 된 기러기의 그림자도 색깔로 되어 있는 기러기의 그림자도 향기로 되어 있는 기러기의 그림자도 온갖 충격의 주파수로 되어 있는 그림자도 서서히 녹여버릴 일이다.
후배가 제 몸속에 이렇게 기러기의 그림자가 많은 걸 미처 생각 안 해봤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기러기가 새끼를 낳은 기러기의 그림자는 더 많다고 얘기할까 하다가 그림자를 늘리는 일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새해에는 그 기러기의 그림자들이 자유롭고 넓고 평온하고 행복한 곳으로 틀림없이 훨훨 날아갈 것이라고 덕담을 해주었다.
그러자 내 몸 속에 있던 기러기의 그림자들이 내가 말한 그곳을 향해 실시간으로 날아가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구나. 좋은 얘기를 하면 나의 세포가 이렇게 좋아지는구나. 모든 이들의 아련하게 아픈 기러기의 그림자들이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세상으로 날아갈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강력한 확신으로 전환된다.
새해에는 모두모두 서로를 배려하면서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