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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행복 서원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1)의 노벨평화상 수상 27주년 기념식이 거행된 지난해 12월 10일. 다람살라 쭉라캉 광장은 애도의 분위기로 숙연했다. 티베트 중앙행정부 총리 시꽁 롭상상게(48) 박사는 6월 이후 중국정부에 의해 강제 철거에 들어간 티베트 동부 쓰촨성 써다현에 자리한 세계 최대 규모의 불교 학당 ‘오명불학원(Larung Gar)’ 사태를 보고하고 UN 인권위원회의 적극적인 연대 참여를 촉구했다. 이어서 해결의 실마리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분신공양 145번째 희생자를 추모했다.
한국의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다람살라를 찾은 촬영팀이 달라이라마에게 이런 질문을 올렸다. “진정한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허공계와 중생계가 존재하는 한 이 세상에 머물러 일체의 고통을 멸하는 이로 남고자 하는 성하의 서원이 얼마나 실현되었다고 보십니까.”
달라이라마는, “내가 그토록 바라는 행복을 목적에 두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다분히 노력하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않아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은 그 목적성이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라며, “먼저 내가 누리고자 하는 행복의 의미를 사유하고 현재 내가 불행하고 충분히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원인의 근거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을 당부했다. 그 무엇보다 종교를 넘어 다양한 인류 공동체의 분야에서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선도하는 지도자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보다 구체적인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은 같은 날 이어서 진행된 인도차이나 망명자들과의 만남에서 이어졌다. 베트남 전쟁이 발생한 1970년대 호주로 망명한 베트남 불자들 50여 명이 달라이라마와 만나 질의 응답하는 대화의 시간이 마련된 것이다. 
“티베트 암도 시골 마을의 장난꾸러기 소년이 법왕에 옹립되어 라싸로 향하던 날을 떠올립니다. 은사 스님이셨던 6대 링 린포체와 3대 티장 린포체를 비롯해 수승한 선지식과 법우들이 일깨워 주신 가르침, 그 안에 담긴 자비의 삶으로 이끄는 공성의 씨앗. 그것은 다름 아닌 보리심이었습니다. 내 나이 14살 즈음 되었을 때야 어렴풋이 깨달은 보살의 서원이자 항시 올리는 발원이 되었지요. 당시의 환희는 인간의 본성이 선함 그 자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진정 나 스스로를 위함이란 타인을 먼저 위함으로써 비롯되어진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타인은 물론 지구의 행복을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달라이라마는 남인도 행사를 위해 짧은 다람살라 일정을 마무리 하고 8일 델리로 향했다. 같은 날 까르마 까규빠의 17대 법왕 걀왕 까르마빠(30)는 따이시뚜 린포체와 17년 만의 재회하는 만남이 빨풍사원에서 성사 됐다. 그의 세수 14세, 당시 2000년도에 티베트에서 인도로 망명하여 달라이라마와 만남을 성사시키기까지 배후 공력을 아끼지 않은 이가 바로 따이시뚜 린포체다. 뿐만 아니라 16대 까르마빠의 유언장을 해석한 3인 가운에 한 명이기도 하다. 이후 인도정부는 중국정부의 반발을 대비해 국경지인 시킴에 까르마빠의 출입을 불허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두 인물의 근접 교섭을 금지하였다가 17년 만인 12월 8일에 공식 해제하였다.
우리의 삶은 선택에 의해 그려집니다. 그렇다면 내가 사유하여 행하고자 하는 바가 선한 것인가 선하지 못한 것인가를 어떻게 판단 지을 수 있을까요? 나는 불교를 수행하는 사상가로서 세상의 흐름을 정의해야 옳지만, 종교의 구별 없이 사랑을 실현하고 차별이 없는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바에 대해 인간의 윤리적 책임이 모든 사유의 기반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나는 그 누구도 불교도가 되어야 한다며 교화하고자 하는 소명 의식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변 국가의 경우를 통해 조상 대대로 신앙해 왔던 역사가 서린 문화를 왜곡하는 안타까운 경우를 더러 보았습니다. 후대에 소중히 전승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 방치되거나 훼손하고 심지어 폄하되는 사례가 그것입니다. 종교는 민족 문화를 대변하는 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어찌된 영문인지 변화에 대한 조화를 모색하지 않고 진보의 역으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입장입니다.
라마교라고 수식하는 티베트불교를 예로 들더라도 금강승 수행에 대해 바르게 정의하지 못하고 오해로써 야기된 외도의 수행법이 있습니다. 명목은 금강승을 수행한다고 하지만 실상을 보면 선한 수행법인가 선하지 못한 수행법인가를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무상과 무아가 사유의 근본이 되는가를 보십시오. 무상과 무아를 근본 사유로 삼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된 수행이며 결국 득이 되는 바가 없습니다. 다른 예로 붓다를 모신 법당이라 하여 불상과 불화로 현란하게 장식을 해 놓는 경우를 보더라도 그 안에 계율을 바탕으로 한 붓다의 네 가지 고귀한 진리가 근간해 있지 않는다면 외도의 행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재가자로서 불도를 오롯이 실천하는 분들을 보면 스스로 법의 근기가 수승하다고 내심 자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스로 착각하는 이를 제외하고 삶을 여여 하게 가꾸어 갈 수 있는 조력을 구하는 이들에게 당부하고픈 바는 고집멸도의 진리를 16가지 마음의 인식작용에 근거하여 증명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티베트불교 철학은 20년의 기본 수학 정진을 요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현대과학은 물론 정신분석학 등의 영역과 다양한 교류 협력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초전 중전 삼전의 법륜을 통해 여래장을 확고히 체득하였다면 비로소 어느 정도 통용되는 금강승 수행에 입문하는 것을 허가받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의식의 명료성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논하는 단계에 이르지만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수행도의 차별이 있음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배우고 수행하고자 하는 데는 성별이나 승과 비속 심지어 민족성의 차별이란 것은 없습니다.
보살행을 서원한 여러분은 얼마나 오온의 공함을 사유하십니까. 초전법륜에서 말하는 인무아가 공함에 대한 앎을 넘어, 중전법륜에서 말하는 오온조차도 공함을 완전히 이해하십니까. 금강경을 사경하고 밤낮으로 암송을 하지만, 행위의 작용하는 바에 대한 실체를 찾을 수 있다면 공함을 온전히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이름으로써 의존하여 생한 것일 뿐 존재로서 실제 하는 바가 없음을 안다면 비로소 공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인과 조건을 야기하는 실상의 속성을 바로 아는 것이 그러합니다. 고를 알아 번뇌를 끊고자 한다면 상호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일 뿐인 공한 본질의 연기적 속성을 사고하여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붓다의 깨달음은 어느 날 불현 듯이 이뤄진 행운이 아닙니다. 오늘의 불교도들은 정제된 수행의 단계를 표본으로 삼아 명료한 불법을 수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서 혼란을 야기합니다. 죄악의 과보를 앎에도 불구하고 동기를 바로 세우지 못한 탓에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 그것이 바로 불법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살피는 것으로 수행의 도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가연숙 (보림화)
omflower@gmail.com
가교. www.gagy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