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星雲 스님
대만 불광산사 개산조
(지난호에 이어서)
불·법·승 삼보의 중요성은 햇빛, 공기, 맑은 물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이들은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인생에는 지극히 보배로운 것들이다. 햇빛, 공기, 물은 인생의 보물이다. 또 불·법·승 세 가지는 출세의 보물이다. 불교의 정신적 지혜를 깨우치기는 무엇보다 어려우며, 인간의 마음이 세계에 닿아 승화되기는 더욱 어렵다.
삼보에는 또한 최초삼보最初三寶, 상주삼보常住三寶, 자성삼보自性三寶 등이 있으며 그 단계도 각기 다르다. 그럼 최초삼보란 무엇인가? 기원전 5세기 인도에서 출생한 싯다르타 태자가 왕위를 버리고 고행 끝에 나무 아래에서 도를 닦은 뒤 성불하셨고, 그 석가모니 부처님이 최초의 불보佛寶이다.
부처님은 자비, 지혜, 성결聖潔, 위맹威猛을 갖추고, 자각각타自覺覺他하는 성자이다. 성도한 뒤 49년 동안 설법했고, 300여 회의 경전을 강의했다. 그를 따르는 대아라한 제자만도 천여 명이 넘었고, 설법을 할 때마다 백만 명의 인간계와 천상계 중생이 참여했다. 커다란 깨달음을 완벽히 갖춘 분이라 하여 불보라 칭한다.
최초법보란, 부처님께서 설한 사성제, 십이인연, 팔정도 등과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삼법인三法印에 합치되면 모두 법보라 부른다. 법보는 우주 인생의 진리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그대로 드러낸 경전이라면 고금을 이어오면서도 변함이 없고 억겁을 지나도 항상 새로운 생명의 도리이다. 사람이 열반에 들어 진여실상眞如實相과 만나고 허공虛空과 하나로 합치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법보가 된다.
최초승보란, 당시 부처님을 따라 출가한 다섯 비구부터 비구니, 나한, 보살 등의 제자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미륵보살, 지장보살과 아라한과 대아라한 사리불 존자, 목건련 존자 등 1,250분의 비구가 있다. 그밖에 비구니도 있지만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최초의 승단조직이자 최초의 승보이다.
부처님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 마음에 자연히 ‘232상 80종호’의 부처님 모습이 나타나지만, “부처님 계실 적에 질곡을 헤매다가, 부처님 열반 후 나 세상에 태어났네. 이 몸의 업장이 많아 여래의 법신을 뵐 수 없음을 참회하노라”는 말처럼 애석함도 그지없다. 우리가 복이 없어 최초의 삼보를 볼 수는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불상, 경전, 선지식은 볼 수 있다. 이것을 일러 ‘상주삼보’라 한다.
‘자성삼보’란 부처님께서 2,600년 전 보리수 아래에서 금강좌를 하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대지의 중생도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갖추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모든 사람의 자성에 삼보의 무량한 공덕이 원만하게 구족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사람은 저마다 불성이 있기에 불보라 하고, 사람은 저마다 차별 없는 평등한 법성이 있기에 법보라 하며, 사람은 저마다 청정하고 화목함을 좋아하는 심성이 있기에 승보라 한다. 진정한 귀의삼보란 우리의 자성삼보에 귀의하는 것이다.
평소 사람들은 “나는 이런 사람이고, 성격은 어떠하며, 개성이 어떻다” 등의 말을 자주 한다. 그렇다! 모든 사람의 성격은 다 다르다. 마이크조차도 제각각이어서 겨우 2, 3만 원에도 구매 가능한 마이크가 있는 반면, 매우 전문적인 것은 하나에 4, 5백만 원 하는 것도 있다. 최소 2만 원에서 최대 5백만 원이면 가격 차이가 엄청난 것이다.
인간의 본성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침에는 잘하다가도 저녁이 되면 힘이 없어지는 사람이 있다.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가 고프면 기운이 떨어져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한가로울 때나 바쁠 때나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바쁠 때는 괜찮다가도 조금만 바빠지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클 때나 작을 때나, 나아갈 때나 물러설 때나 유능한 사람은 영예도 받아들일 수 있고 모욕도 참아낼 수 있다.
부처님은 “대지의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중생은 모두 성불할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삼보에 귀의한 뒤에는 모두의 불성과 성질이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성불도 가능하다는데 우리가 더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다만 여러분이 ‘당당하게 나서는’ 용기만 있으면 된다. 여러분이 천지를 진동시킬 큰 소리로 “나는 부처다!”를 외친다면 커다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이전에는 우리 모두 스스로를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이미 삼보에 귀의했으니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인정하면 부처와 같을 수 있다. 담배를 예로 들어보자. 전에는 담배를 피웠지만, 지금은 ‘부처님께서 이렇게 담배를 피웠을까?’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술을 마셨지만, 지금은 ‘부처님께서 이렇게 술을 마셨을까?’ 생각해 본다. 때로 부모나 형제끼리 말다툼하는 경우, 얼른 머릿속에 ‘부처님께서 가족과 말다툼을 했을까?’라고 생각한다. 매사 ‘나는 부처다’라는 생각을 가지면 나쁜 일을 하지 않게 된다.
지금 세상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걸출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이것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오늘 삼보에 귀의했고 한순간 이렇게 많은 부처님께서 나왔다는 것이 세간에서 가장 위대한 일일 것이다.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우상偶像은 무척 중요하다. 그러므로 진흙과 나무로 만든 불상은 지극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부처님이다. 일단 귀의한 뒤에는 일상생활에서 인과의 도리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해야 한다. 귀의삼보란 타인의 도움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아를 자각하고, 자아를 긍정하며, 나아가 자아에 의지해 자아를 실현하여 자신의 마음속 ‘자성삼보’를 찾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보물 광산과 같다. 귀의는 자신의 마음속 보물을 캐내는 것이다. 귀의하지 않음은 보물 광산을 개발하지 않아 황금을 꺼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전 “자신에게 의지하고, 가르침에 의지하며, 가르침을 떠난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제자에게 내렸다. 우리가 자성삼보에 귀의하는 참뜻이 여기에 있다.
선가禪家에서 ‘부처에게 구하지 말고, 법에 구하지 말며, 승려에게 구하지 말라’ 한 것은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하여 기꺼이 감당하지 못할까를 걱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귀의란 자성삼보에 귀의하는 것이다.
한 신도가 선사에게 “자성삼보에 귀의해야 한다는데, 무엇을 자성삼귀의라고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선사는 “돌 거북이 말을 할 때쯤이면 내가 말해주겠소”라고 대답했다. 그 신도는 나름 서종에서 식견이 있다고 자부하면서 “돌 거북이 말을 했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사가 “돌 거북이 당신한테 뭐라고 말했소?”라고 되물었다.
자성삼보에 귀의함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말을 한다면 곧 거짓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자성삼보에 귀의함은 자신의 뛰어난 무대대無對待, 무실상無實相, 실상무상實相無相의 자성삼보이자, 무상삼보無相三寶에 귀의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성삼보는 예로부터 지금가지 변함이 없고 억만 겁 동안 늘 새롭기에 삼보에 귀의하면 위없는 공덕을 얻을 수 있다. 삼보에 ‘보寶’를 붙이는 까닭은 육의六義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