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연
시인
때로는 수많은 설명보다 침묵이 더 현명한 설법이 되고, 묵언만으로도 참선이 된다. 가슴으로 듣는 묵언의 설법은 영축산 능선을 타고 내려온 불음佛音처럼 정확히 어떻게 살아야 정답으로 사는 것인지 궁금할 때 답을 얻게 한다. 인생에 답이 있을까마는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은 정답의 인생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다. 살다 보면 쏟트리고 싶지 않은 말, 조심 또 조심해도 어쩌다 하는 행동으로 실수를 하게 된다. 사람과 섞여 사는 풍경 속에 그런 일들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하지만 인간관계가 얽히고, 얽힌 관계로 악연에 휘말리면 파열의 치명적 상처를 입을 때가 있다.
더 이상 그런 중생놀음에 휘둘리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아야 하는 게 지혜다. 그것을 위해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기엔 나를 돌아보며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조용히 자문하게 된다.
산수화 같은 영축산 도량에 위치한 통도사에는 산자락을 휘감고 내려오는 바람결에 들을 수 있는 나만을 위한 법문이 있다. 30여 년 전, 비 오는
날 어둑한 저녁에 길을 잃은 가슴을 월하 큰스님께 쏟아낸 적이 있다. 찰나의 통찰력으로 흔들리는 가슴을 꿰뚫어 보신 큰스님은 노란빛 안경 너머로 슬그머니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셨다. 그 미소에 풍경소리가 딸려 나오는 듯 했다. 생불이 와도 안 되는 시절인데 무릎만 닳도록 다닌다고 세상문제가 풀리겠냐 하시는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잠자던 정수리 쪽 뇌세포가 톡 터지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피안에 드신 월하 큰스님께서 보실까, 혹시 묵언 설법 내리실까, 내 본분사本分事가 어긋날까, 염려될 때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엎드린다.
영축산 가슴팍서 솔향 묻은 바람 되어
업의 거품 거둬내는 삭발의 의식인양
불사리 금강계단서 오체투지 하여 본다
하늘 빛 종소리가 억겁의 털 떨어주듯
자장慈藏의 주장자로 무명 끊은 불보佛寶도량
그 결을 한 눈금 헤아릴까 사리탑에 눈 맞춘다
 -시조 「본분사 어긋날까」 전문-
그리고 불사리탑을 잘 볼 수 있는 산령각에서 삼배하고 그 앞 작은 연못 ‘구룡신지九龍神池’를 돌면서 이 절 터를 지키겠다는 호위무사 같은 용은 묵언 중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부처님께서 미륵불을 위해 준비하셨다는 봉발탑 앞을 지나 다시 일주문으로 나왔다. 계절계절 갖가지 꽃을 피우는 길을 따라 장경각에 오르기 위해서다.
성파 큰스님의 원력으로 부처님의 존귀한 말씀을 흙에 새기고 불에 달구어 만든 16만 도자경판을 만나본다. 억겁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리처럼 도자경판도 영원히 지지 않을 법열의 꽃으로 존재되고 있다. 불지종가 국지대찰의 면모를 갖추고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山地僧院’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통도사에 이 도자경판은 또 한 번 세계에 부처님의 향기를 전하는 대표적 유산으로 자리매김 될 것이라 보인다.
그 대장경판을 따라서 미로같은 길을 다 돌다 보면 때로는 청청한 솔향처럼, 때로는 바람결 물빛처럼 들리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본래의 내 주인이었던 것인 양 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 별의별 생각이 많았던 탓에 별의별 인연이 다 얽히는 것임을 스스로 깨닫고 한 생각 일어나지 않는 그 본래면목에서 답을 얻는다.
지금 세상은 수억의 인구가 각각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듯 하지만 결국은 모두가 공동운명체이다. 우주와 자연,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가 각각이 아니라 하나의 이치로 돌아가건만 저마다 자신만 알거나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로 돌아가고 있는 이치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불교경전인 『불본행집경』과 『잡보장경』에 보면 하나의 몸뚱이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공명조共命鳥’라는 새가 나온다. 두 머리가 서로 다른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을 한다. 그러나 하나의 몸뚱이라서 좋은 생각으로 서로 좋은 일을 할 때는 그 운명도 함께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즉, 만약 세상사 얽히는 인연으로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내가 상처를 주는 인연일 수도 있다는 의미도 된다. 따라서 내 맑은 마음이 곧 제대로 숨 쉬는 우주를 만드는 것이므로 만약 내가 고해의 바다에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탓할 수 없다. 몸과 마음이 하나이듯이 내 생각이 인연을 만들고, 인연이 내 수행의 결과가 된다. 참으로 단순한 이치이거늘 마치 어항 속 물고기처럼 쉽게 잊는다. 그리고 여전히 중생놀음에 휘달리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매일이 새해라 여기고 매일 세속의 진애를 떨어내는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청한 겨울 날씨만큼 코끝이 살짝 시린 순간, 산중다원으로 들어갔다. 다원에서 자랑하는 따끈한 팥죽과 몸살을 앓는 나를 위해 쌍화차를 주문했다. 마침 『산사에서 길을 묻다』 작품집을 보고 문향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도록 내 마음 곁을 돕겠다는 분과 차를 나눌 수 있어서 산사카페를 방문한 그 어느 때보다 귀한 시간이었다.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셨던 경봉스님은 찾아오는 분들에게 차를 대접하길 좋아하셨다고 한다. 노스님이 차를 주시는 의미는 ‘차 한 잔 마심으로 답답한 중생심衆生心을 쉰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만약 중생심이 쉬고 보리심이 있는 이웃을 위하여 회향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참으로 묘하다. 그 이치를 헤아리려 만난 인연일까. 평생 산빛을 만들어 회향하던 분, 산향이 나는 사람과 산사에서 차를 나누니 마치 오랜 억겁의 인연을 이제야 불은佛恩으로 만났다 싶다. 차향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스며드는 사이, 중생심 쉬는 동안 보리심이 회향되는 것인양 문향을 얘기하던 나는 조금씩 산향이 되고, 산빛을 만들던 사람은 서서히 문향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산향이 문향되고 문향이 산향되는 이 인연이 산사에서 나누는 차향의 이치가 아니겠나 싶다.
이 아름다운 인연의 이치를 묵언설법으로 알려 준 이곳이 훗날 나 떠날 곳이어도 좋겠다 싶다.
산등성 어디쯤에 화엄바다 출렁일 듯
산기슭 어디쯤에 우담바라 피었을 듯
법열의 숲이 된 영축 노을마저 법문이다
화엄에 빠져 죽든 산마루 매여 죽든
우담바라 뽑다 죽든 산허리 틀다 죽든
마지막 떠남이 닿는 날 영축으로 갈까보다
-시조 「나 떠날 곳이 영축산이면 좋겠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