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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학으로 종통을 잇다

취여 삼우(醉如 三愚, 1622~1684)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조선후기 전라도 해남의 대흥사는 서산대사에 이르러 의발衣鉢을 의탁한 장소로 쇠퇴한 선교학禪敎學의 부흥을 가져와 조선불교계의 종원宗院이 되었다. 청허 휴정(1520~1604)은 대흥사를 두고 ‘종통宗統이 돌아갈 곳’이라고 하였고, 정조正祖는 󰡔금자보장록金字寶藏錄󰡕에서 대흥사가 청허의 의발衣鉢이 있고, 그의 영정影幀도 있으며, 기일忌日에 제사를 지내며, 죽음에 이르러 부탁한 물품이 지금도 전해져 오니 ‘팔로八路의 종원宗院’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1788년(정조 12) 대흥사에 사당을 건립하라는 명과 함께 ‘표충表忠’의 편액을 내렸다. 정조가 말한 ‘팔로의 종원’은 조선 승가의 법통法統이고, 청허가 말한 ‘종통宗統’은 대흥사가 조선불교의 법통과 법맥뿐만 아니라 선교학을 비롯한 수행체계의 종원으로 조선불교의 중흥지가 될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청허 입적 후 불교계는 활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불교계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함께 정체성 확인을 위한 자구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 임제법통과 법맥을 확립하고자 했으며, 선교학의 통합 분위기 속에서 선禪 중심의 교학 수행의 입장을 확고히 하였다. 염불念佛과 주력呪力 역시 수행체계에 편입시켜 승가뿐만 아니라 세속의 중요한 신앙으로 유행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지나고 17세기와 18세기에 이루어진 조선불교 중흥을 위한 노력이었다. 
대흥사는 이 시기 동안 청허의 유언대로 종통이 보존된 종원이 되었다. 법통과 법맥이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12종사宗師와 12경사經師가 배출되어 고려중기 이후 쇠퇴한 선교학의 명맥을 잇고 있었다. 12종사는 제1대 풍담楓潭, 제2대 취여醉如, 제3대 월저月渚, 제4대 화악華岳, 제5대 설암雪巖, 제6대 환성喚醒, 제7대 벽하碧霞, 제8대 설봉雪峯, 제9대 상월霜月, 제10대 호암虎巖, 제11대 함월涵月, 제12대가 연담蓮潭이다. 다산 정약용은 소요 태능의 대표적인 제자가 해운 경열이고, 해운의 문인 17명 가운데 취여 삼우가 으뜸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때문에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취여 스님이 대흥사의 2대 종사가 된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스님의 법명은 삼우三愚이고 호는 취여醉如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전남 강진군 보암방(寶岩坊, 현재의 동암면 항촌리) 구정자九亭子 마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만덕산 백련사(白蓮社, 오늘날 백련사)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여러 선사들을 두루 참알參謁하고 내전(內典, 불경)을 널리 섭렵하였다. 해운 경열의 조실에서 향을 뽑아 사르고 법통을 이었으니 경열은 소요 태능의 제자이다.
취여 스님은 유난히 얼굴이 붉고 윤기가 흘렀기 때문에 스승 해운이 ‘술에 취한 듯한 사람(醉如子)’이라는 호를 붙여 주었으니, 장난삼아 그랬던 것이다. 스님은 불교경전을 공부한 것뿐만 아니라 담론談論을 잘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심취하게 했다고 한다. 일찍이 스님이 대흥사 상원루上院樓에서 화엄의 종지를 연설하였는데 강론을 듣는 이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때 어떤 스님이 밭을 가는 기구를 지고 누각 아래에서 쉬다가 한두 구절을 엿듣고는 그 자리에서 단박에 깨닫고, 지고 있던 농기구를 벗어 던지고 당堂에 올라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며 울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다 말하여 참회하고 미묘한 불법의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스님은 그를 쓰다듬으면서 가르쳐 주고 마침내 의발을 전해 주었으니, 이분이 바로 화악 문신華岳文信이다. 옛날 육상산陸象山이 아호鵝湖 화상의 강석講席에서 의義와 이利 두 글자에 대하여 강론하자 사방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또 육조六祖 대사 혜능慧能이 본래는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다가 마침내 5조의 의발을 전해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니 이 일도 충분히 저들의 아름다웠던 일과 비교할 만하다.


청허 휴정이 부용 영관을 따라서 화엄을 전수하고, 또한 일찍이 화엄종 판사의 직책을 맡았으며, 부휴 선수를 화엄종주華嚴宗主로 칭했다. 송운 유정이 부휴대사를 찬탄하기를, “마치 선線과 같이 화엄을 전하였다.”라고 하였다. 벽암 각성이 효종대왕을 알현하고 안주安州에서 화엄의 종지를 논하여 밝혔다. 이에 효종대왕이 크게 칭찬하고 포상하였다. 풍담 의심이  편양 언기의 방에 들어서 청허가 전한 것을 다 얻었다. 금강산과 보개산 두 산에 머물면서, 매일 화엄 등 백 수십 권을 잡아 오류를 바로잡고 그 음석音釋을 저술하였다. 그런 뒤 삼승三乘의 심오한 의미가 다시 환히 밝혀지고, 전후를 열어 깨달은 자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월담 설제는 모든 경전의 의미가 가장 중요한 곳을 융합 회통하였으며, 더욱 화엄과 염송을 사랑하였다. 입으로 암송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크게 후학들의 어리석음을 열어 인도하였으니, 그 뜻을 듣고 그 오묘함을 전한 이가 수십 수백 명을 헤아렸다. 월저 도안이 풍담에게 참례參禮하여 서산대사가 은밀히 전한 것을 다 얻고 갑진년에 묘향산에 들어갔다. 화엄의 큰 뜻을 강론하고 탐구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화엄종주’라고 칭했다. 매양 종풍을 드날림에 법좌 아래의 청중들이 항상 수백 인이 넘었다. 백암 성총은 일찍이 개펄 해변에 큰 배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실려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았는데, 바로 대명大明의 평림平林거사가 교간校刊한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였다. 대사가 이에 놀라 이상하게 여기고 새겨 간행하여 유포하니, 화엄의 학문이 크게 완비되었다. 환성 지안이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는데, 대중이 무릇 1천4백 명이었다. 당에 올라 불자拂子를 세우고 대중에게 설법하자, 대중이 모두 다 크게 기뻐했다. 또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얻었다. 설파 상언이 󰡔화엄청량소초華嚴淸凉疏鈔󰡕를 깊이 연구하여,󰡔(청량초)적결은과擿抉隱科󰡕 한권을 찾아내고 아울러 󰡔구현기鉤玄記󰡕한 권을 저술했다. 연담 유일은 화엄 󰡔유망기遺忘記�권을 지었다. 회암 정혜는 오래도록 화엄을 강의하여 크게 종지를 천명하였다. 묵암 최눌은 화엄의 품목을 모아 찬집하고, 인악 의첨은 󰡔화엄사기華嚴私記󰡕를 저술하여 교리를 천명하였다. 무용 수연, 백파 긍선, 침명 한성, 하은 예가, 용호 해주, 원화 덕주, 함명 태선 등의 모든 법사를 다 ‘화엄종주’라고 일컬었다. 오늘에 이르도록 모든 산의 법려法侶들의 대교大敎 과목에 󰡔화엄경󰡕을 지극한 법칙으로 삼는 것은 그 유래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짐짓 잡화(雜花, 화엄경)에서 열매를 맺은 교림敎林이라고 한 것이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중에서-


인용문은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를 비롯한 조선후기 불교계의 화엄학 연구와 그 대가들의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불교계는 󰡔화엄경󰡕이 선사상과 수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어 관심과 탐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일찍이 선교겸수를 주장한 보조 지눌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고, 청허 휴정을 비롯하여 부휴 선수와 송운 유정, 벽암 각성 등이 조선후기 화엄학 연구의 단초를 열었다. 뿐만 아니라 편양계의 풍담 의심→월저 도안→설암 추붕→환성 지안으로 계승되는 화엄학 계보는 마침내 선수행과 함께 대흥사를 선교의 종원으로 확립시켰다. 18세기와 19세기 초를 전성기로 맞이한 대흥사의 화엄학 수학은 대외적 위상과 함께 활발하게 진행되어 12명의 종사와 경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취여 스님은 1622년(광해군 14)에 태어나 1684년(숙종 10) 6월 5일에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는 63세였다. 스님의 진영은 둘이 있으니 하나는 백련사에, 하나는 대흥사에 있다. 스님의 평생을 요약한 비명은 다음과 같다.


世人皆醉師亦如 세인개취사역여
如而不醉愚不愚 여이불취우불우
龍穴淸風猶有餘 용혈청풍유유여
流涕之席稍鵝湖 유체지석초아호
舂而受鉢行者盧 용이수발행자로
醉之旣醒邈雲車 취지기성막운거
璘霦者石華龜跌 인빈자석화구질
乞銘者誰孫騎魚 걸명자수손기어
세상사람 다 취하니 스님도 취했구나
취한 듯 취한 게 아니요 어리석은 듯 어리석지 않네
용의 굴에 맑은 기풍 여유가 있고
눈물 흘린 법석은 아호 스님 같아라
방아 찧다 발우 받은 이는 노 행자인데
취한 술 깨어나니 구름 수레 아득하네
옥 무늬 찬란한 돌 거북 받침 화려하고
비명을 청한 사람 법손인 기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