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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고통을 소멸시킬 것인가?







  달라이 라마
  티베트 승왕


세 번째의 신성한 진리는‘멸에 관한 진리’입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 은 중요한 질문들을 해야 합니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해탈이란 무엇인가?’, 멸은 무 엇을 의미하는가?’,‘ 정말로 멸을 얻을 수 있는가?’

‘해탈할 수 있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우리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만족스런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아리아데바가 <중관사백송>에서 한 말을 숙고해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리아데바는 우리가 존재의 궁극적인 본질이나 공성에 대해서 말할 때, 반드시 경전에 적혀있는 대로만 공성을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비판적 분석과 논증을 통해서도 공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현상은 눈에 보이고, 직접 지각할 수 있으므로, 논리적으로 그 현상들이 존재한다고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현상은 우리 눈에 명백히 보이지는 않지만, 논증 과정을 통해서 그것들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용어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공성’은 두 번째 종류에 속합니다.
우리는 공성에 관한 진리를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해탈도 논증을 통해서 추리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나가르주나가 말했듯이, 진실로 해탈을 이해하려면 우선 공성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해탈이란 것은 공성을 통찰함으로써 미혹과 고통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해탈’의 개념은‘공성’의 개념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고, 공성을 추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탈도 추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성과 해탈이 긴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마이뜨레야(미륵보살)는 <현관장엄론>에서‘세 번째 신성한 진리’를 설명하면서, 열여섯 종류의 공성에 대해 광범위하게 논의 하고 있습니다. 해탈이 궁극적인 진리이며‘공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짠드라끼르띠도 그의 저서에서 명백히 논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공성’에 대해서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해탈의 가능성’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공성(空性)’에 대해 말할 때는, 부정하는 형식을 써서,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무아론(無我論)’도 역시 부정하는 형식입니다. 왜 그렇게 부정하는 형 식을 쓰는 걸까요? 이 문제는 잠깐 놔두고, 우리의 경험을 생각해 봅시다.
주위에서 무언가가 나를 위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때문에 자신이 두려워 하고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내 착각이거나 내가 만든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약간 사라지기는 해도,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은 완전히 환상이고, 아무 것도 없는데 그저 자신이 상상했을 뿐이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하면, 두려움은 즉시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실제로 부정된 것은 무엇일까요? 결여된 것이 무엇일까요?

불교경전에 의하면‘공성’은 부정할 대상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예에서는, 내가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예를 가지고 사물들 전체의 경우를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실제로 부정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무아론에서‘아(我)’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놓여 있습니다. 즉,‘ 무아론’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부정할 대상이 무엇인지가 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