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
미디어붓다 대표
정우 스님, 그리고 양재동 구룡사와 일산 여래사. 이 세 가지는 한국불교 포교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명제들이다.
1981년 10·27법난으로 한국불교가 미증유의 충격 속에 빠져 있을 때, 당시 깨어 있는 스님들은 포교를 통한 교세확장과 인재양성에 이심전심으로 나섰다. 특히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사는 수도권 포교는 불교의 명운을 가를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서울에 소재한 기존 사찰들은 다투어 어린이 법회와 중고등부 학생회를 만들었고, 대학 불교학생회를 지원에 소장 스님들이 앞장섰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적극성을 보인 스님들은 도심포교에 나선 스님들이었다. 강북의 사천왕사, 강남의 구룡사, 능인선원, 강남포교원 등이 80년 대 중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포교당들이었다. 도심포교의 선두주자들은 대개 뛰어난 능력과 실력을 갖춘 엘리트 스님들이었다.
각자의 능력으로 현대식 건물에 세를 얻어 직접 시민들 속으로 들어가 신선한 설법을 통해 포교의 성과를 거둬들였다. 그동안 잘 들어보지 못했던 엘리트 스님들의 귀에 쏙쏙 박히는 법문과 현대식 포교당 운영은 도심의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수도권의 불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도심포교당들은 급격하게 그 세를 불려나갔다.
구룡사도 그런 사찰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구룡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포교당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필자는 당시 불교기자가 아닌 서울 옥수동 미타사청년회 회장으로 열심히 청년불교 활동을 하던 때였는데, 스님이 구룡사를 일구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필자가 정우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84년경으로 기억된다. 지금의 구룡사 자리는 당시에는 진흙 밭이었다. 비가 오면 질척이는 진흙에 빠지면서 걸어가야 움막 같은 임시법당에 들어설 수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포교의 신화를 일구는 여느 도심포교당과는 달리 구룡사는 불지종가 영축총림 구룡사의 서울포교당임을 제일 앞에 내세웠다. 이는 통도사 스님이라는 정우 스님의 자부심과, 정우 스님의 포교원력을 일찌감치 알아보시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통도사 방장 월하 큰스님의 배려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불보사찰 통도사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구룡사 불사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통도사 서울포교당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당시 불자들은 불사에 신뢰를 보냈던 것이다.
월하 방장스님께서는 당시 통도사의 보물인 ‘금란가사’를 선뜻 구룡사 불사를 위해 내어놓으셨다. 통도사 깊숙한 곳에 소중히 모셔져 있어야 할 금란가사는 정우 스님의 남다른 포교 원력과 실력을 높이 평가한 월하 큰스님의 결단이 있었기에 서울행을 할 수 있었다.
강남의 요지에서, 서글서글한 눈매에 큰 몸집을 한 젊은 스님이 통도사 서울포교당 불사를 한다며 천불도 아닌 만불萬佛 모연 불사를 한다는 소문이 당시 장안에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금란가사를 친견하기 위해, 만불 모연에 동참해 도심포교에 작은 힘을 보탠다는 신심으로, 그리고 검은 피부에 몸집이 산만한 스님이 뚝심으로 천막법당을 지키며 목탁을 놓지 않고 불도저처럼 불사를 추진하는 현장을 보고 싶어서 양재동 천막법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필자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진흙밭에 빠지면서 까치걸음으로 천막법당에 들어갔을 때의 장면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천막법당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어 줄을 선 채로 정우 스님을 지켜볼 수 있었다. 스님은 원불 모연을 한 불자들을 일일이 안내하며 금란가사를 친견시키고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과 함께 불사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그리고는 그 불자와 함께 반드시 108배를 했다. 줄 지어 선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해도 좋으련만, 스님은 고집스럽게 원불 모연에 동참한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똑같이 금란가사 친견, 불사에 대한 설명과 당신의 원력, 그리고 그 원력을 다지기 위한 108배를 수도 없이 반복했던 것이다. 글쎄, 당시 정우 스님은 하루에 몇 번 절을 했을까. 하루에 10명의 불자가 왔다면 1080배,
100명의 불자가 왔다면 10,800배를 했던 것이다. 스님은 그런 일을 10000불 모연이 다 이뤄질 때까지 쉼 없이 이어갔다. 그러니 불사가 끝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절을 했을지는, 또 얼마나 힘겨웠을지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오늘의 구룡사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대작불사이다. 구룡사 만불전이 회향되었을 때, 사람들은 만불전의 규모에 놀랐고, 정우 스님의 뚝심에 놀랐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설법보다 목탁의 위력이 셌다’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우 스님이 목탁만 잘치고 절만 잘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기름칠한 종이처럼 반지르르 하지는 않지만 마치 뚝배기 같은 구수하고 우직한 설법을 하는 정우 스님의 법문에 사람들은 더 매료되었던 것이다.
구룡사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 필자는 불교언론의 기자가 되어 스님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요즈음엔 ‘게을러져서’ 스님을 친견하는 기회가 많이 줄었지만, 스님이 94년 종단개혁불사의 한 축으로 활동할 때, 종단의 총무부장으로 일할 때, 월하 방장 스님을 종정스님으로 모실 때의 활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스님이 종단정치에 휩쓸려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늘 스님과 함께 대화하고 종단과 불교를 걱정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일산 여래사 불사를 시작했을 즈음, 스님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당시 필자는 일산에 살고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여래사 불사를 독려하기 위해 자주 일산을 찾았던 스님과 만나곤 했다. 정발산 자락에 앉아 1층, 2층 올라가는 건물공정을 지켜보며 스님과 나눴던 대화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당시 스님은 종단정치의 여파로 겪는 시련을 여래사 불사로 이겨내고 있었다. 여래사 불사를 위해 힘을 모아주는 구룡사 불자들에 대한 고마움을 수도 없이 되뇌던 모습이 선하다.
그 모습, 또 그 서원과 원력을 잘 알기에 나는 내가 지휘하던 신문사의 편집국 기자들을 독려해 정우 스님의 명예회복을 돕는 데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힘과 발원이 모아져 정우 스님은 명예회복을 했다. 참으로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도심포교의 원력으로 스님은 그 난관을 흔들림 없이 헤쳐 나갔다.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구룡사와 여래사에는 필자가 모신 원불이 각각 모셔져 있다. 그래서 소속 불자로 정기적으로 절에 가지는 못하지만 구룡사와 여래사는 필자에겐 제2의 원찰과 같은 곳이다.
구룡사는 정우 스님의 초인적인 뚝심과 원력에 통도사 방장 큰스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여래사는 종단적 시련을 신도시 포교불사로 이겨내고자 하는 정우 스님의 제2의 발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정우 스님을 생각할 때마다 필자는 모진 추위를 이겨내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청아하고 상큼한 향기를 뿜어내는 청매靑梅를 떠올리곤 한다.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지 않았다면 어찌 매화가 그 진한 향기를 내뿜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필자에게 정우 스님은 이른 봄 청매의 향기 같은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