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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한 인생 짧은 인연

송경숙 / 용인성복고 국어교사


아침에 정신없이 출근을 하러 나가는데, 머리 위로 툭 후박나무 커다란 잎사귀가 떨어진다. 그제서야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랜만에 새파랗게 맑은 하늘이다.
아, 그래. 콧속으로 스미는 바람을 타고 오는 낙엽의 냄새. 어느새 가을이 왔구나!
조용히 침잠해 자신을 되돌아보기에도 좋고, 한참을 잊고 있던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 한 통 해봐도 좋을 그런 가을.
그리고 생각나는…. 이제는 전화를 해도 받지 않을 친정 엄마의 목소리.
‘엄마’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코끝이 가을바람처럼 찡해온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나는 ‘엄마’라고 부르면, 세상이 막 구워진 식빵처럼 말랑말랑하게 느껴진다.
머리 위로 툭 떨어진 후박나무 커다란 낙엽이 마치 엄마처럼 느껴져 책갈피에 꽂아둔다. 하늘 한 번 안 보고, 땅에 떨어진 낙엽도 한 번 안 보고 재촉하던 발걸음이 이제야 조금 느려진다.
작년 가을, 설악산으로 친구 분들과 단풍놀이를 떠났던 엄마.
한껏 들뜬 목소리로 정신없이 아침 출근 준비를 서두르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여기 설악산이다. 공기도 좋고 단풍이 얼마나 고운지 몰라. 꽃만 이쁜줄 알았는데 나이가 먹어 그런가 나뭇잎이 이리 화려하고 이쁜지 이제 알겠지 뭐니?” 하고 햇살처럼 웃던 엄마.
그런데 그 여행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심한 복통으로 택시를 불러 서울까지 돌아온 엄마.
담낭암 말기 판정.
그 이후의 시간은 가족 모두에게 상상해보지도 않았던 슬픔과 고통의 날들이 되었다. 이미 다른 장기로 다 전이되어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이, 엄마는 딱 두 달 병원에서 앓다가 가셨다. 동생과 나 둘 다 직장 때문에 종일 엄마 옆에서 간병을 할 수 없어 조퇴와 연가를 내고, 퇴근 후, 주말마다, 시간 날 때마다 엄마 곁에 좀 더 있으려고 애썼다. 그런 우리들을 오히려 걱정해주던 엄마.
‘내가 오래 아프면 너희가 고생이겠다.’ 하며.
돌아가시기 바로 전까지도 꽃꽂이 강사로 활동하셨던 엄마는 우리들에게는 늘 슈퍼우먼이었다. 늘 잘 웃고, 꽃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병원에서도 거짓말처럼 농담으로 우리를 웃게 하기도 하셨던 엄마. 함께 다니면 사람들이 언니냐고 물어볼 정도로 젊어 보이고 멋쟁이셨던 엄마…. 그런 엄마에게 이런 병이 있는 걸 가족 모두 까맣게 몰랐었다. 꽃을 그렇게 좋아하시더니 꽃 화환 속 웃는 영정사진 하나 남기고 그렇게 쉽게 우리 곁을 떠날 거라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었다.
난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느라 늘 녹초가 되어 안부 전화조차 변변히 못했었고, 어쩌다 전화를 하는 날은 내가 너무 속상하고 나쁜 일이 있을 때. 엄마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나는 내가 당한 억울한 일을, 화나는 일을, 힘든 일들을, 으다다다 엄마에게 쏟아내었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며, 나를 화나게 했던 그 모든 사람들을 ‘몹쓸 것들’이라며 욕해 주었었다. 내가 당한 일에 나보다 더 억울해 하고 속상해 하던 엄마.
그때 내가 내뱉은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엄마에게 독으로 퍼져 암덩이를 만들어 버린 건 아닐까.
늘 ‘엄마니까 뭐 어때?’ 하며 당연하게 받기만 했던 일들.
어려울 때 아쉬울 때마다 엄마가 처리해 주길 바랐던 마음.
말기암인 걸 알면서도 엄마는 너무 담담하게, 정리할 시간이 있어 다행이라며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야. 난 해보고 싶은 일, 가보고 싶은 곳 다 가봐서 원도 없고 한도 없다. 일찍 돌아가신 우리 친정 엄마 만나러간다 생각하면 무섭지도 않아. 너무 슬퍼할 일 아니야.” 하며 우리를 위로하려던 엄마.
세상의 모든 딸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불효녀였고 고집 세고 속 썩이는 딸이었다.
내 딸아이가 조금만 열이 나도, 배탈이 나도, 그리 난리법석을 떨면서도, 엄마의 가끔 소화가 잘 안 된다는 이야기에도, 감기에 걸렸는데 너무 오래 안 낫는다는 말에도, 우리 모두 별 생각 없이 듣고 넘겼다. 엄마를 더는 만날 수 없는 지금에야 엄마에게 받기만 했었다는 걸 깨닫고 후회한다. 엄마가 우리 곁에 머물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서야 엄마에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처음으로 했다. 그동안 왜 그런 말을 그렇게 아껴 두었던 걸까.
엄마가 입원해 있던 병원 2층 창가에서, 낙엽도 다 떨군 커다란 벚꽃 나무를 보며 내가 “엄마, 내년 봄엔 이 창가로 벚꽃이 정말 이쁘게 보이겠어. 엄마가 좋아하는 꽃들이 창 아래 화단에 가득 필 거 같아.” 하니 “내가 그걸 보고 갈 수 있으려나.” 하시던 엄마.
엄마 말처럼 그 벚꽃이 피기 전 엄마는 가셨고, 꽃이 피고 지고 초록잎 무성하던 여름을 다 보내며, 엄마가 없는데도 난 여전히 직장과 가정생활을 분주하게 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문득 툭하고 떨어지는 후박나무 낙엽에 엄마가 한없이 그립다.
처음 여기 아파트로 이사 올 때, 화단에 있는 후박나무들을 보며 마음에 들어 하시던 엄마. “여긴 후박나무가 많아 여름에 시원하고 좋겠구나. 후박나무 잎처럼 크고 넉넉하게 그늘 드리우는 사람으로 살아. 남편한테도 직장 사람들한테도 뾰족뾰족 가시덩굴처럼 굴지 말고.” 하던 엄마.
후박나무 껍질은 예전부터 속병을 치료하는 여러 약재로 쓰였다고도 한다. 술도 엿도 만들었다고도 한다. 속살도 단단해서 가구 재료로도 쓰이고, 새순도 잘 자라는 생명력도 강한 나무라고 한다.
그런 후박나무 아래에서 따뜻한 바다처럼 온통 넘실거리는 파란 하늘을 쓰고, 엄마에게 짧게 인사를 전한다. 아직도 ‘엄마’ 하고 부르면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 같은 그 이름. 이젠 후박나무 낙엽이 되어 내 곁을 떠나버린 그리운 나의 엄마에게.
‘후박나무처럼 멋진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고마운 인생이에요.’라고.
눈물을 훔치고 나도 다시, 딸아이의 후박나무 엄마 역할을 시작하려고 한다.
나에게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엄마에게 외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또 외할머니에게 그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