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2025년

      2025년 01월호
      2025년 02월호
      2025년 03월호
      2025년 04월호
      2025년 05월호

2024년

      2024년 01월호
      2024년 02월호
      2024년 03월호
      2024년 04월호
      2024년 05월호
      2024년 06월호
      2024년 07월호
      2024년 08월호
      2024년 09월호
      2024년 10월호
      2024년 11월호
      2024년 12월호

2023년

      2023년 01월호
      2023년 02월호
      2023년 03월호
      2023년 04월호
      2023년 05월호
      2023년 06월호
      2023년 07월호
      2023년 08월호
      2023년 09월호
      2023년 10월호
      2023년 11월호
      2023년 12월호

2022년

      2022년 01월호
      2022년 02월호
      2022년 03월호
      2022년 04월호
      2022년 05월호
      2022년 06월호
      2022년 07월호
      2022년 08월호
      2022년 09월호
      2022년 10월호
      2022년 11월호
      2022년 12월호

2021년

      2021년 01월호
      2021년 02월호
      2021년 03월호
      2021년 04월호
      2021년 05월호
      2021년 06월호
      2021년 07월호
      2021년 08월호
      2021년 09월호
      2021년 10월호
      2021년 11월호
      2021년 12월호

2020년

      2020년 01월호
      2020년 02월호
      2020년 03월호
      2020년 04월호
      2020년 05월호
      2020년 06월호
      2020년 07월호
      2020년 08월호
      2020년 09월호
      2020년 10월호
      2020년 11월호
      2020년 12월호

2019년

      2019년 01월호
      2019년 02월호
      2019년 03월호
      2019년 04월호
      2019년 05월호
      2019년 06월호
      2019년 07월호
      2019년 08월호
      2019년 09월호
      2019년 10월호
      2019년 11월호
      2019년 12월호

2018년

      2018년 01월호
      2018년 02월호
      2018년 03월호
      2018년 04월호
      2018년 05월호
      2018년 06월호
      2018년 07월호
      2018년 08월호
      2018년 09월호
      2018년 10월호
      2018년 11월호
      2018년 12월호

2017년

      2017년 01월호
      2017년 02월호
      2017년 03월호
      2017년 04월호
      2017년 05월호
      2017년 06월호
      2017년 07월호
      2017년 08월호
      2017년 09월호
      2017년 10월호
      2017년 11월호
      2017년 12월호

2016년

      2016년 01월호
      2016년 02월호
      2016년 03월호
      2016년 04월호
      2016년 05월호
      2016년 06월호
      2016년 07월호
      2016년 08월호
      2016년 09월호
      2016년 10월호
      2016년 11월호
      2016년 12월호

2015년

      2015년 01월호
      2015년 02월호
      2015년 03월호
      2015년 04월호
      2015년 05월호
      2015년 06월호
      2015년 07월호
      2015년 08월호
      2015년 09월호
      2015년 10월호
      2015년 11월호
      2015년 12월호

2014년

      2014년 01월호
      2014년 02월호
      2014년 03월호
      2014년 04월호
      2014년 05월호
      2014년 06월호
      2014년 07월호
      2014년 08월호
      2014년 09월호
      2014년 10월호
      2014년 11월호
      2014년 12월호

2013년

      2013년 01월호
      2013년 02월호
      2013년 03월호
      2013년 04월호
      2013년 05월호
      2013년 06월호
      2013년 07월호
      2013년 08월호
      2013년 09월호
      2013년 10월호
      2013년 11월호
      2013년 12월호

2012년

      2012년 01월호
      2012년 02월호
      2012년 03월호
      2012년 04월호
      2012년 05월호
      2012년 06월호
      2012년 07월호
      2012년 08월호
      2012년 09월호
      2012년 10월호
      2012년 11월호
      2012년 12월호

2011년

      2011년 01월호
      2011년 02월호
      2011년 03월호
      2011년 04월호
      2011년 05월호
      2011년 06월호
      2011년 07월호
      2011년 08월호
      2011년 09월호
      2011년 10월호
      2011년 11월호
      2011년 12월호

2010년

      2010년 01월호
      2010년 02월호
      2010년 03월호
      2010년 04월호
      2010년 05월호
      2010년 06월호
      2010년 07월호
      2010년 08월호
      2010년 09월호
      2010년 10월호
      2010년 11월호
      2010년 12월호

2009년

      2009년 01월호
      2009년 02월호
      2009년 03월호
      2009년 04월호
      2009년 05월호
      2009년 06월호
      2009년 07월호
      2009년 08월호
      2009년 09월호
      2009년 10월호
      2009년 11월호
      2009년 12월호

2008년

      2008년 01월호
      2008년 02월호
      2008년 03월호
      2008년 04월호
      2008년 05월호
      2008년 06월호
      2008년 07월호
      2008년 08월호

2007년

      2007년 09월호
      2007년 10월호
      2007년 11월호
      2007년 12월호
나의 스승이 바로 나의 붓다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남인도 까르나따까주 벨라구페 티베트불교 사원군.
세라사원에서 진행된 마음과 생명 연구소의 회담이 끝난 직후 12월 18일 오후 1시. 보리도차제론 람림 법회를 위해 따시룬뽀 사원으로 처소를 옮기는 달라이라마를 맞이하려는 대중들의 백색 카따 행렬이 이어졌다. 사원장의 직무를 수행해야 할 11대 판첸라마(게된 최끼 니마)의 실종 이후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무심히 방치되다 시피 했던 따시룬뽀 사원이 이번 람림 법회를 위해 지난 4년간 법당을 신축하고 사원으로 통하는 길도 새롭게 열면서 비로소 오늘 달라이라마를 맞았다. 이번 법회가 순조롭게 개최되는 데 영국 대만 일본 불자 연합의 공로가 컸다.
다음 날 19일. 마침내 따시룬뽀 사원이 문을 열었다. 이날을 경축하며 까르나따까 주지사가 사원을 찾았다. 연설에서, “티베트 난민들이 간절히 염원해온 바와 같이 멀지 않은 때에 진정한 티베트의 자유를 되찾고 그들의 나라로 어서 귀향하기를 바란다.”면서 달라이라마와 티베트 망명정부의 노선을
지지했다. 까르나따까 주정부는 티베트 사원지구 문곳과 벨라쿠페에 재건된 대붕 간덴 세라 따시룬뽀 사원군을 작은라싸(Little Lhasa)로 지정하고 관광 특구화 하였다. 이번 달라이라마의 마지막 람림 법회는 총 56개국에서 3만 1천 명의 대중이 참여 했다. 법문은 8개 국어로 통역이 되었으며 4년간의 대장정 끝에 총 18권의 보리도차제론 강론을 마무리 하였다.


사부대중과 함께 기도를 올리며 관련 인들을 격려하던 달라이라마가 급작스레 눈물을 보였다. 신비한 모습에 대중들도 따라 눈시울을 붉혔다. 달라이라마는 눈물의 연유를 밝혔다. “이곳 따시룬뽀 사원에서 기도를 올리는 내내 돔된빠의 광명이 느껴집니다.” 돔된빠는 티베트불교의 람림 법맥을 올곧게 전수한 아띠샤 존자의 유일한 애제자였다. 티베트의 불교도들은 돔된빠를 관세음보살의 화현으로 믿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류는 비폭력과 자비심의 훈련을 각별히 필요로 합니다. 불교가 말하는 철학은 연기 사상을 기반으로 합니다. 불교도의 시각으로 해석한 세상의 모든 것은 상호 의존하여 발생한 것입니다. 때문에 실체를 지니고 있지 않아 일체는 무아이자 무상함 그 자체입니다. 석가모니 붓다께서 법을 설하실 때 상대의 근기를 헤아려 그에 맞는 법을 설하신 것 역시 무상의 도리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인연이란 원인과 조건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지금을 살아갑니다. 모든 인연을 일컬어 불교에서는 사성제의 집제라고 하였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찰나의 생 그리고 멸함을 동시 다발적으로 일으킵니다. 나와 인연하는 크고 작은 것들과 최대한 충돌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이유는 결과의 원인을 발생하게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행실을 면밀히 다스리는 훈련을 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나로 말미암아 불교의 비폭력과 자비심 훈련의 기반을 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면 일체가 선합니다. 마음이 괴롭다고 그 근원이 되는 뿌리를 끊고자 안간 힘을
쓰지만 실질적으로 그 길에 충실하기 어렵습니다. 실제 하지 않지만 실제 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유하는 진리 즉, 일체의 법이란 공성을 근거로 무상함을 알아 왜곡되지 않은 의식으로 전도된 망상을 일으키지 않을 때에 여실히 드러납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진리를 깨우치는 방법으로 대상과 대치가 되는 성질로서 끊어 가도록 무아를 실체화 시킵니다.


집착이 일어나는 것은 외부의 영향으로서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의 대상에게 탐욕이 일어났다면 바로 이어서 성내는 분노가 차례로 일어납니다. 의식이란 반드시 순간 발생함과 동시에 소멸하는 대치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이 진실로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반대로 실제로 있지 않다고 사유하여 진실로 있다고 했던 착각을 대치하는 방식으로 무아를 깨우쳐 갑니다. 붓다께서도 이러한 도로서 궁극의 적정에 이르셨습니다.


붓다의 본음이라고 하여 오직 경전만을 탐독하고 사유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기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간절한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의 수행을 통해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며 정진하되 거듭 거듭 상기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러한 사유가 접목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되 괴로움의 원인이 또한 무엇이고 내가 집착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이며 그 집착으로부터 떠나는 길을 문 사 수로서 수행해야 합니다. 기필코 근원이 되는 괴로움을 끊겠다는 의지로 정진해 나아가다 보면 정작 도를 닦는 바가 없었음을 깨우치게 됩니다.


일상에서 행복하다가도 문득 괴롭고 고통스럽다가도 문득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러한 감각적인 행복과 불행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 그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인연 연기의 상속 성을 사유합니다. ‘나’는 오온과 따로 분리되지 않음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의 바른 수행자는 오온과 분리된다고 여기는 거친 아집을 네 가지의 고귀한 진리 사성제로서 알고 깨우칠 수 있습니다.


반야부의 경에서는 멸제에 대하여 무아설과 다른 입장을 보입니다. 윤회의 근원이 무명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실상에 무지한 것이 무명입니다. 붓다께서 처음에 사성제로서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설법을 하셨고 이후에 무아 법문을 설하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붓다께서 영축산에서 반야경을 설하실 때 천신과 비신 그리고 사부대중이 붓다의 법을 들었다고 나옵니다. 실제로 영축산을 방문한 분들은 알겠지만 매우 협소한 공간에서 어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반야부 가운데 사리불 존자와 관세음보살의 법담을 다룬 반야심경은 우리 불자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기도문입니다. ‘색 수 상 행 식’이 공하고 ‘안 이 비 설 신 의’가 공하다고 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제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은 자상이 있으며 원성실성에는 자상이 없음을 설하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초전 법륜에서 설하신 멸제는 반야부 경전에서 마침내 완성이 되었습니다. 진제의 가르침으로 마침내 의식의 정광명을 발휘하고 더 나아가 금강승 수행까지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금강승도 총 4부로 분류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정광명의 발현에 있어서 공성의 깨우침을 최종 목적으로 삼습니다. 붓다의 법륜은 초전 중전 삼전의 방식으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서서히 상위로 이끌어 갑니다.


계율의 율장은 남방과 북방의 불교가 동일합니다. <현관장엄론>에서는 발심과 더불어 열 가지
일체 종지를 이루는데 발심과 귀의가 그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 궁극의 붓다를 성취하기 위한 보살의 수행 방침은 우리가 잘 아는 여섯 바라밀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무아에 대한 접근은 반드시 합당한 이치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용수보살께서는 중관 이취와 육부 논서 뿐만 아니라 찬탄 게송을 지으셨습니다. 이어서 무착보살은 도의 차제를 정리하셨습니다. 반야부에서 완성된 무아의 논리는 상좌부 불교의 접근 방식보다 수승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티베트의 역대 왕들에 의해 인도의 날란다 승원의 불교 학제가 전래된 것은 행운입니다. 송첸깜뽀 왕은 중국과 네팔에서 왕비를 맞이하였고 불상과 불법을 모셔왔습니다. 티송데첸 왕에 이르렀을 때 샨트락시타를 티베트에 모셔서 티베트불교는 융성한 꽃을 피웠습니다. 이후에 인명학에 대한 논서가 티베트에서 역경이 되었습니다. 티베트불교의 인식론은 다른 불교도 국가의 연구 논서 보다 수승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더불어 외도뿐만 아니라 타 학설과의 모순점을 토론하는 것은 티베트불교를 수학하는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티송데첸 왕 이후 티베트불교는 쇠락하였습니다. 사캬의 수장께서 티베트불교를 일시적으로
부흥시키기도 하였으나 불교는 점차 협소화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보리도등론>은 매우 안타까운 배경의 역사를 품은 논서입니다. 할라마이쉬 왕이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장춥외는 금을 마련하여 왕을 석방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왕은 그 금으로 인도에 가서 인도의 학승 아따샤 존자를 모셔 오도록 하였습니다. 아띠샤 존자는 이미 쉰의 나이가 넘은 상황에서 비까말라쉴라의 승원장직을 맡고 계셨습니다. 아띠샤 존자는 본존 돌마타라 보살께 티베트에 불법을 전하는 것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수명을 보장할 수는 없으나 티베트인을 널리 이롭게 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


아띠샤 존자는 티베트로 향합니다. 그리고 티베트에서 첫 논서 <보리도등론>을 집필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하사부와 중사부 그리고 상사부의 근기에 따라 수행의 차제로써 점차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스바하’입니다.
자량도를 시작으로 견도 수도 무학도로 수행의 단계를 더욱 세분화 합니다.
제가 티베트에서 1959년도 인도 망명 당시 유일하게 가지고 나온 논전이 바로 <보리도차제론>입니다. 여전히 가르침의 핵심을 그때그때 마다 절실히 느끼며 경험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말씀은 연기와 진여뿐임을 항시 상기합니다. 제가 붓다의 설법을 설할 때는 수행의 단계 가운데 관품을 먼저 설합니다. 이는 청중에게 깨달음에 대한 확신을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붓다와 가르침 그리고 승가에 귀의하는 삼귀의를 행하는 이들에게 연기에 대한 사상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현관 장엄론>에서는 도의 순서를 통해 일체 종지로 나아감에 그 시작이 발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와 사성제 그리고 여러 가지의 행을 두루 논합니다. 티베트의 논서는 수행자를 위한 탁월한 수행 지침서임을 자부하는 부분입니다. 역대 스승들이 일깨우는 법을 근저로 제자 또한 그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이를 우리는 진정한 스승이라 부릅니다. 세세생생 유익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진리이자 법입니다. 티베트의 사회에 만연한 풍조가 ‘라마’, ‘린포체’라고 하면 큰 수행자라고 여기고 심지어 ‘게쉬(박사)’가 아니면 법을 모른다고 치부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스승 역시 제자의 이기심에 의해 선택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진정한 수행의 정진과 발전이란 나의 것이라고 하는 집착과 집념의 경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옳지 않은 것을 알기에 좀 더 나은 곳으로 향하고저 노력하고 이를 돕는 이가 바로 스승입니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가연숙(보림화)
omflower@gmail.com
가교.
www.gagy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