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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 스님과 양 무제의 대화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중국의 선승들은 대화를 통해 상대가 스스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방법을 개발했는데, 이런 제자 지도 방법은 당시 중국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후대에도 계속되어 하나의 전통을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생성된 대화들 중에는 선종 문하의 제방에서 모범적인 대화로 공인되기도 하였고, 이런 대화들은 시대를 거치면서 차츰 축적되어 갔다. 사람들은 이렇게 종문宗門에서 공인된 이야기를 ‘공안公案’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 공안의 내용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많은 ‘이야기 소재(話素)’들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들 하나하나를 우리는 ‘화두話頭’라고 부른다. 화두가 모여서 공안이 되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벽암록』 제1칙에 실려 있는 ‘달마불식達磨不識’ 화두話頭를 사례로 삼아, 중국 선종 역사 속에 드러난 화두의 생성·강의·참구를 살펴보자. ‘달마불식達磨不識’ 화두는 달마와 양 무제(武帝 464∼549, 502년 梁 건국)가 서로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이야기가 역사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801년에 편찬된 『보림전』(원명은 『大唐韶州雙峰山曹溪寶林傳』)이다. 그 후 『성위집聖胃集』(899년), 『조당집祖堂集』(952년),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년)을 거치면서 세상에 널리 퍼졌다. 그 후 『천성광등록』(1023년), 『건중정국속등록』(1101년), 『연등회요』(1183년), 『가태보등록』(1201년)을 지나, 다시 『오등회원』(1252년)과 『고존숙어록』(1267년)에 와서 중국 땅에 확고하게 정착된다. 이런 상황은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려시대에는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의 『선문염송』(98話)에도 반영된다. 이 화두의 내용은 각 전등서傳燈書에 따라 약간의 글자 출입은 있지만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
설두 중현雪竇重顯 선사는 일찍이 지금의 절강성 봉화현逢化縣에 있는 자성사資聖寺에 주석하면서, 전래되는 고칙古則 화두 100개를 가려 뽑고 그에 대하여 송頌을 붙였다. 세인들은 이것을 『설두송고雪竇頌古』라 한다. 선문학禪文學의 백미白眉이다. 그것 중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화두가 ‘달마불식達磨不識’ 화두이다. 이 화두를 소재로 원오극근 선사는 『벽암록』에서 강의를 한다.


2.
그 화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 나라의 무제가 달마 조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근본이 되는 가장 성스런 진리입니까?”
“어디에도 성스런 진리란 없습니다.”
무제가 말했다.
“나하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그대는 뉘시오?”
달마 조사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무제가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달마 조사는 그 뒤 양자강을 건너 위魏 나라 땅으로 갔다.
무제가 뒷날 이것을 지공(志公 425∼514) 화상에게 말하였다.
지공 화상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이 사람을 모르십니까?”
무제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지공 화상이 말했다.
“그분은 관세음보살이시며,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러 오신 어른이십니다.”
무제는 전에 했던 일을 후회하고 사신을 보내어 불러 오게 했다.
지공 화상은 말했다.
“폐하께서 사신을 보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온 나라 사람이 모두 데리러 가더라도 그는 결코 오지 않을 겁니다.”


3.
이 화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것이다. 그 자세한 내용은 『벽암록』 제1칙 평창에 자세한다. 그 강의의 핵심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로 설두 중현 선사는 달마와 양 무제와의 ‘이야기(話頭)’를 거량擧揚하여 <본칙本則>으로 삼고 그것에 대하여 <송頌>을 붙인다. 설두 선사가 주목한 핵심적인 이야기는 그의 <송>에서 드러나듯이 성스런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공空 사상을 선양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것(者個些子 또는 성제聖諦 또는 제일의제第一義諦 또는 진제眞諦)’에 조차 속박당하지 말고, 자기의 본성을 깨닫는 일에 열중하라는 것이다. ‘이것’에 얽매이는 것은 물론, ‘이것’을 그리워하지도 말라고 한다. 그러니 불사를 많이 한 공덕이나, 또는 달마 조사의 권위 따위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것들에 얽매이면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을 퇴색시킨다는 것이다. 원오 선사가 ‘당나귀 잡아매는 말뚝’이라고 촌평을 붙인 것도 이런 의도에서 한 말이다.
설두와 원오 두 선사가 각각 방법은 다르지만 이구동성으로 위에서 말한 것은 ‘이것’에 조차도 집착하지 말고, 또 사유나 언어로 이리저리 따지지 말아서, 일체의 사량과 분별을 단칼에 베어 버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원오 선사가 본칙의 평창에서도 말했듯이,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와의 ‘이야기(話頭)’를 통해 일체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깨고,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을 당사자가 직접 체험할 것을 강조했다. ‘성스런 진리(聖諦)’조차도 없으니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임제 선사도 “그대, 내 앞에서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는 그대, 그대야말로 우리들이 스승으로 받드는 달마 조사나 부처님과 비교해서 다를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라고 추궁한다. 이렇게 자기의 본래 면목을 체험할 것을 추궁하는 수행승들 간의 ‘이야기(話頭)’는, 당대唐代에 많이 생산되었다.
저 선승들이 일관되게 목표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원오 선사가 <본칙>의 <평창>에서 말했듯이 “단전심인單傳心印하야 개시미도開示迷塗하야 불립문자不立文字하고 직지인심直指人心하야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이다. 더 줄여서 말하면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이것을 더 줄이면, ‘견성見性’이다. 그러면 ‘견성’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길게 논증할 겨를은 없다. 「관음시식觀音施食」에서 <창혼唱魂>한 다음에 내리는 <착어着語>로 그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해당 부분만 인용하면 이렇다.


영가님의 신령한 근본은 본래 맑고도 고요하여 새로울 것도 오래되었을 것도 없으며, 영가님의 오묘한 본체는 완전하고도 밝아서 태어나셨다느니 돌아가셨다느니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석가세존께서 마가다 도량에서 빗장을 걸어 잠그고 침묵하셨던 소식이며, 역시 달마 대사께서 소림굴에서 면벽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니련선하 강가에서 열반하시고 관 밖으로 두 발을 보이셨고, 달마 대사께서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가시면서 짚신 한 짝을 손에 들고 가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돌아가신 ○○○영가시여!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불자들이시여! 맑고도 고요하며 완전하고도 분명한 이 한 마디를 아시겠소?


위의 인용문은 낮은 음으로 천천히 착어성着語聲으로 소리를 지어서 하는 것을 요즈음의 사찰에서도 들을 수 있는데, ‘견성見性’에서의 ‘성性’이란, 위 인용문의 용어로 바꾸면 ‘맑고 고요한 신령스런 근본(靈源湛寂)’이고 ‘완전하고도 밝은 미묘한 본체(妙體圓明)’이다. 이 소식을 전하려고 석존께서는 마가다국 보리도량에서 3·7일간 꼼짝 안 하셨고, 달마 대사는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을 했다는 것이다. 이 ‘성性’의 상주불멸을 보여주시려고 세존께서는 열반에 즈음하여 두 발을 내 보이셨고, 달마 대사는 짚신 한 짝을 메고 파미르고원을 넘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당대唐代의 선사들은 상대에게 ‘견성성불’을 스스로 체험하게 하려고 상대방과 대화를 했고, 북송대의 선사들은 ‘견성성불’을 체험토록 하기 위하여 각종 방식으로 ‘화두’에 대해 강의를 했고, 역시 남송대를 지나 원대 이후의 선사들도 ‘견성성불’을 체험하기 위하여 ‘화두’를 참구했던 것이다. 그러니 화두의 ‘참구’만이 ‘견성성불’로 이끄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고집해서는 안 된다. 화두도 어디까지나 견성성불을 위한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