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가야의 1월은 자욱한 안개와 큰 일교차로 순례자를 경계에 세운다. 올해는 비까지 더해 깔라차크라 법회장 일대는 진흙탕이 되었다. 얇은 스티로폼과 홑 방석에 의지해 바닥에 앉아 법문을 청한 대중은 몸살감기를 앓았지만, 법회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67개국에서 35만 명의 불자가 이번 달라이라마의 신년 뮌람을 찾은 것으로 집계 되었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테라와다 불교권의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중국어, 영어 등으로 번역된 반야심경이 법회를 열며 봉독되었다. 티베트불교 겔룩빠의 종조 제 쫑카파 대사의 열반 600주년 행사를 남인도 문곳에서 마무리한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5)는 석가모니 붓다께서 성도 하신 인도 비하르주 보드가야에서 새해를 맞았다. 겔세 톡메 쌍뽀의 ‘보살 37 수행법’을 주제로 설법한 달라이라마는 마지막 날 문수보살 관정을 집도하고 보드가야에서 동안거의 시간을 가졌다. 2월 초 인도 라지기르에서 학회가 예정된 가운데, 다람살라 법회는 오는 3월 9일 티베트력 정월 보름의 본생담 법문을 앞두고 있다. “붓다의 가피는 면죄부가 아니다” 나란다 승원에서 전승된 가르침은 맹목적 신앙을 부추기지 않습니다. 철저한 논리의 사유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웃 종교와 더불어 나의 내면을 점검하고 의식을 전환할 수 있는 수행을 단계적으로 지침하고 있어 오늘날 서양 철학과 정신과학은 물론 현대물리학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에 대한 회의가 늘어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붓다께도 당부하셨습니다. 반드시 고찰을 통한 확신을 두고 사유하여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지혜가 기반이 되었을 때 가능합니다. 더불어 보리심을 일으켜 믿고 의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궁극의 반야바라밀은 초전 법륜인 네 가지 고귀한 진리 사성제에 기반해야 함을 숙지해야 합니다. 붓다는 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가. 왜 내가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가. 더불어 윤회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알아 그것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합니다. 윤회 속에서 모든 것은 관념입니다. 때문에 현대 과학자는 관찰자의 관점에서 사유하도록 제안합니다. 그것이 붓다가 설한 진제와 속제입니다. 관념을 제거한 본래 자리가 진리임을 발견하셨습니다. 분별을 여읜 광명의 법을 얻은 석가모니 붓다는 무자성의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는 이후에 공성으로 귀결하는 삼전법륜으로 정립되었습니다. 깨달음은 주입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석가모니 붓다께서도 생애를 통해 직접 그 길을 제시하셨고 제자들로 하여금 정진을 통해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외부적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붓다의 자비로도 내가 지은 허물을 대신해 닦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원을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엄하고 그 아무리 높은 탑을 쌓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지은 허물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통해 본인이 처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나은 환경에서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참회하고 지금부터 정신을 차리는 방도뿐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나 스스로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창조주의 사랑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그 사랑이 인류에게 보편 할 수 있도록 동참해야 합니다. 인도에서 샹키아 학파가 생겨난 이래 자이나교와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 윤회를 근본 사상에 두었습니다.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행복을 갈구하고 추구합니다. 이는 감각과 의식에 의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나를 불안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세 가지 번뇌의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지혜는 그러한 괴로움의 작용을 환멸 하도록 하는 도구입니다. 그 과정이 보살행이며 겔세 톡메 쌍뽀의 ‘보살 37 수행법’에 그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나의 마음을 살피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봅시다. 약 3천 년 전 이전부터 상키아 학파는 지관 수행을 하였습니다. 번거로운 마음의 작용을 오롯이 살피는 수행의 방법론은 안락을 구현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번뇌는 분별심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인지력에 상대성이 발생했습니다. 내가 지닌 고정관념, 사회적 통념이 그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대로 과연 대상이 존재할까요. 왜곡된 분별과 망상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임을 인지해야 합니다. 실집은 경계를 파생시킵니다. 나의 방식을 고집하고 현상을 고착화합니다. 전체에 담긴 인과법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이 지닌 본질은 무엇일까요. 마음에 일어나는 집착 역시 그와 같은 논리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일컫습니다. 형색과 공이 다르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관념이 만들어낸 가립된 형색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붓다빨리따께서는, “실제 무엇이 있다면 상호 의존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무상정등각을 이루신 핵심이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그 수행법이 바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모지 스바하’입니다. 마음은 변화합니다. 발심을 일으켜 자량도에 들어선 수행자는 숙지하기를 바랍니다. 공성의 지관력을 증장시키십시오. 이타심을 키워 깨달음의 인을 굳건히 하십시오. 마음의 습기는 물론 번뇌장과 소지장을 제거하여 스스로를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마음챙김입니다. 이제부터 보리심을 발하는 마음을 내도록 합시다. 중생의 병을 치료하는 약이 바로 보리심입니다. 무아의 지혜가 지식의 논리를 명료히 할 수 있지만, 궁극의 반야바라밀은 보리심과 더불어 병행되었을 때 완성됩니다. 오늘의 인간은 배려의 가치와 실천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은 보다 더불어 따뜻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선한 마음을 독려하고 사회에서 선의 가치가 존중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면역력 역시 공공의 선을 실현하는 바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점차 원인과 해결책을 규명할 수 없는 신종 바이러스가 만연한 지금의 세상에서 인류가 올바르게 회복되어 존속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인류애의 실천뿐입니다. 붓다의 가피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스스로가 변화되는 방법뿐입니다. 바른 스승에 의지하여 허물을 제거하고 달이 차오르듯 공덕을 증장시켜야 합니다. 나의 허물을 살피고 알아차리는 이타의 정진, 이제 시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