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보살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수행하는 것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함이요, 일체 중생들에게 불종자佛種子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2,600년 동안 염념상속念念相續 해온 가르침이 우리와 함께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해야 할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다반사茶飯事의 일들을 내 스스로 언제까지 할 수 있겠는가, 반문을 해 봅니다. 나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 아닐까요. 새벽녘에 불교텔레비전이나 불교방송을 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 절 인터넷 방송인 부다 티브이(http://www.buddhatv.com)에도 매일 얼마나 있는지, 열어 보기도 합니다. 불자들과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오늘도 인연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 보기도 합니다.
처음 발심한 것과 성불하는 일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지만, 초발심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처음 발심發心한 것과 성불成佛 하는 일이 다른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두 가지 마음 중에 초발심이 더 어렵다. 자신은 아직 제도 되지 못했으나, 다른 사람을 먼저 제도하고자 하니 나는 처음 발심한 사람에게 예배하느니라.
처음 발심하면 이미 천신天神과 인간人間의 스승이 되나니, 성문聲聞과 연각緣覺보다 훨씬 수승殊勝하니라. 이와 같이 처음의 발심은 삼계三界를 지나가나니 그러므로 가장 높다는 이름을 얻었다 하느니라.”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가르침을 많은 스님들은 말합니다.
상구보리는 수행정진을 의미하는 것이요, 깨달음을 위해서 나아가는 길입니다. 하화중생은 중생과 더불어 어울리는 것, 대중 포교를 하겠다는 서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자 대중들이여, 길을 떠나자.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조리 있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법을 설하자. 갔던 길로 되돌아오지 말고, 두 사람이 함께 떠나지도 말자. 모든 이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길을 떠나자. 나도 우루벨라 병장촌에 가서 법을 설하리라.” 전도 선언 이십니다.
이처럼 마음 중에 더 어려운 일이 무엇일까요? 발심과 보리심입니다.
자신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나 다른 이들을 제도하기 위한 모습을 보살행菩薩行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처음 발심한 사람에게 예배하고 공경한다 하신 것입니다. 처음 발심하면 이미 천신과 인간의 스승이 되니 성문과 연각보다 훨씬 더 수승하다 하신 것입니다.
초발심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지나가기 때문에 가장 높다는 이름을 얻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8만장교藏敎의 가르침을 나누어 보면 성문소승聲聞小乘, 연각중승緣覺中乘, 보살대승菩薩大乘의 삼승교三乘敎로 나누어져 있고 성문소승, 연각중승, 보살대승의 근본은 일승원교一乘圓敎가 되는 것입니다.
『화엄경華嚴經』에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덕목을 십바라밀十波羅蜜이라 했고, 신·해·행·증信解行證, 믿음과 이해와 행원과 증득함입니다.
서구적으로 말하자면 ‘믿어라, 알아라, 행해라, 이루어지리라.’일 것입니다. 성문승은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 부정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불교는 왜 그렇게 보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지, 우리는 육체적인 이 몸을 근본으로 삼고 살면서도 허상의 그림자 같은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힘들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사람노릇 하려면, 얼마나 고단한 일들이 많습니까.
우리는 극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냥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설하신 것은, 항상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설說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무상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상이라는 것은 항상恒常하지 아니함입니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변한다는 것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그렇고, 생주이멸生住異滅이 그렇고,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우주법칙이 그러합니다. 시간적으로만 길고 짧음이 있을 뿐입니다.
살아온 시간들이 어려웠다고, 지루했다고 생각 되시는 이 순간, 인생의 종착역에서 결론지어야 할 일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아쉽고 미진하고 부족한 일들뿐입니다. 성문소승법의 고집멸도苦集滅道는 내가 가야 할 그 길을 가기 위한 인생 팔고八苦를 제시한 것임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만의 성운대사님은 고苦의 씨앗은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이라 하셨습니다. 그 번뇌와 망상을 멈추게 하는 것이 도道라고 하셨으니, 사성제四聖諦의 도, 팔정도八正道의 도, 십이연기十二緣起의 도, 육바라밀六波羅蜜의 도,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의 도를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도를 보고 닦아야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생각이 멈추어질 것입니다. 의지함 없는 지혜를 의지해서 불퇴전의 길을 가고자 우리는 수행 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의 가치를 진정한 삶의 의미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입니다. 죽음의 가치를 진정한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수행修行이요, 정진精進입니다. 고의 씨앗은 번뇌이고 망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은 바로 사제팔정도요, 12연기이며, 육바라밀의 보살행원입니다.
석양夕陽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서 나(我)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나라고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십니까?
그림자를 보고 나라는 생각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허상의 나일 지라도 나를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심信心을 키우고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행동이 이타행利他行이요, 보살행菩薩行입니다. 그러한 이타적 보살행을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 수행은 오늘 미루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지혜로운 이의 자세입니다. 그러니 절대 놓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5분, 10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평탄하게 지나갈 수도 있고, 기쁨과 환희심으로 가득 채우며 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쩔쩔매며 살아가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오늘 이 순간, 일각이 여삼추라는 생각을 버리고 매사에 성실하게 살아가는 팔정도의 길, 십이연기의 길, 육바라밀의 길, 37조도품의 길에 다가가는 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으면 합니다.
『기신론소起信論疏』에서 원효대사는 “아는 것만 있고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심만 있고 수행하지 않으면 신심이 성숙하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홀로 인도 순례길을 나서자 어른 스님은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어른스님들께 당돌한 소리를 했습니다.
“혜초스님이, 현장스님이 순례길을 떠났던 시대에 비하면 돈도 가지고 가고 비행기도 타고 가는데 얼마나 편안한 길이 되겠습니까?~~~”
수행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의 5바라밀五波羅蜜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지혜智慧가 없으면 5바라밀을 실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오늘 할 일은 반드시 오늘 하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비추어 보면, 내일 해도 되겠지’ 하다가도… 내일이 있다면 내일 해도 되겠지만, 내일이라는 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절대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30분이든 1시간이든, 순간순간의 생활을 늘, 부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을 그래서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 어느 때 목전目前에서 죽음을 맞이할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그저 찰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은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생각해보면, 불확실합니다.
살아온 시간만큼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들을 귀하게 쓰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을 성실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