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오늘은 소한입니다. 소한은 겨울의 중심에서 가장 추운 겨울의 시기입니다.
24절기는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입하,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 입동 … 자연의 법칙 순환 체계입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우주공간의 질서입니다.
지구는 태양계를 중심으로 한 바퀴를 도는데 365일 5시간 46분 48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공전은 1초에 약 30km, 하루에 260만km를 이동하는 것입니다. 자전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를 도는데, 이 속도는 1분에 약 27.75km를 돕니다. 우리는 매 순간 엄청난 운동으로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하루를 살고, 계절을 지나며, 나이를 더해갑니다.
100년을 산다 해도 이 시간의 흐름에서는 한 점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이 짧은 생애 속에서도 우리는 의미를 되찾고 삶을 윤회하며 살고 있습니다.
을사년乙巳年 새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2,569년이 되었습니다.
네팔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신 고오타마 싯다르타 태자는 도솔천 내원궁에서 사바세계로 내려오셨고,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이후 45년간 중생을 위한 전법 활동에 전념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생애는 팔상도八相圖로 상징되는데, 팔상도의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은 부처님께서 오직 중생을 위한 자비심과 연민심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십니다.
불교는 윤활유의 역할이고 비타민의 역할을 하며 어렵고 힘들 시대에는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집단의 이익이 아닌, 모두를 포용하며 본래의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은 국민을 위한 공복公僕으로서 직분을 다해야 하는데, 오늘의 정치현실은 이익을 위해 권모술수를 쓰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국가와 국민들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모두 자신의 본질과 역할을 되새기고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이타利他적인 보살행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위하는 일 이외에는 그 어떤 일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역시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개인적인 이익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나누어진 이념이나 갈등은 도를 지나치면 결국 나라와 국민들에게 피해가 될 뿐입니다.
불보살님의 가피와 위신력으로 이 땅에 깃들어서 나라가 안정되고 국민의 삶이 풍요로워지기를 발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본래 부처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부처를 잃어버리면 이를 범부중생, 박지범부라 부릅니다.
본래 부처를 찾으면 그를 부처님이라 합니다. 본래 부처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수행 정진입니다. 이 수행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늘 깨어 있는 마음, 즉 정념正念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절에 가면 법당 추녀 끝에 물고기 형상의 풍경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는 눈을 감거나 눈을 뜨거나 눈을 보호하는 막이 있어 늘 깨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풍경 소리는 우리들에게 항상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그러니 번뇌와 망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육체적으로 힘들거나 졸음이 올 때에도 그 풍경소리를 들으며 정념으로 올바른 생각과 태도를 유지하며 망념을 제어하는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망념을 제어하고 나면 생멸生滅, 증감增減, 미추美醜, 대소大小, 장단長短, 전후前後, 좌우左右같은 상대적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정념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맑고 깨끗한 거울에 비친 얼굴은 애써 드러내지 않아도 본래의 모습이 거울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싹이 트고, 등불을 켜면 어둠을 없애려 하지 않아도 어둠이 저절로 사라지듯이, 수행을 통해 무념무상의 경지에 도달하면 우리의 삶도 더욱 맑고 밝아 고요해질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아 슈너는 불교를 ‘동서양의 융합으로 생성된 세계 문명의 필수 요소’라 하였습니다. ‘현대 사회가 불행한 이유는 영적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풍요에 탐닉하며 욕망의 탐진치貪瞋癡와 오욕락五欲樂의 현대 사회는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오탁악세五濁惡世를 떠올리게 합니다. 불교는 인류 공통의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철학과 과학의 교량 역할을 하는 사상입니다.
한 철학자가 부다가야에서 달라이라마님을 뵙고는 “불교란 무엇입니까?” 달라이라마 스님은 “불교는 과학입니다.” 하셨습니다.
불교가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과학자가 불교에 대해 물으셨다면 “불교는 철학입니다.” 하셨을 것입니다.
철학적 깊이와 과학적 객관성을 아우르는 불교의 본질은 동서양의 사상과 학문을 연결하는 중요한 가교(교각)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자신을 “인도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티베트 출신인 스님이 이러한 말을 한 연유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이 인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하신 사르나트 녹야원, 그리고 학문적 중심지였던 나란다 대학은 불교 사상의 본거지로, 티베트 불교는 이 전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스님은 인도에서 60년 이상 생활하며 그 학문을 계승하셨기에 자신을 “인도의 아들”이라 하셨을 것입니다. 스님은 인도 대중들 앞에서 전통을 소중히 여길 것을 당부하시며 인도의 자연과 전통적 가치가 유지되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개인의 변화가 사회 전반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불교적 통찰에 기반한 메시지일 것입니다. 수행과 정진은 단순히 개인적인 노력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번뇌와 욕망을 넘어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고, 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철학적 깊이와 과학적 객관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는 마음으로 본래 부처를 찾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되며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 진화가 올바르게 이루어지려면 개인 개인이 먼저 변화해야 합니다. 사회적 발전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도 함께 이루어져야 진정한 진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적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AI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지적 활동조차 기계가 대신하고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우리의 변화와 발전이 이런 기술적인 진보로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이상도, 계획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10년, 20년 전만 해도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의 가르침으로 살아왔습니다. 단순히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살아있기에 일을 해야 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의식조차 희미해지고 그저 어제처럼 오늘을 살고, 오늘처럼 내일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사회는 진정한 발전과 평화와 안정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불교는 폭력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향합니다. 불교는 세계 질서의 혼란 속에서도 윤활유와 자양분, 비타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불교가 폭력을 배제하고, 모든 생명을 존중하며, 평화를 지향하는 철학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가르침은 인류의 미래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세계가 변하든, 불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은 모든 문명 속에 녹아들어있어야 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러한 변화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정립하며 성실히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세계가 바뀌면 세상도 반드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혼란을 들여다보면 그 근본 원인은 바로 욕구 욕망의 욕심입니다.
그 욕심은 우리들 마음속에서 화를 일으키게 하고 어리석음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부정적인 감정이 근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욕심은 채워도 끝이 없으며, 금은보화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적 합리성은 이러한 욕망을 더욱 증폭시키고, 부를 가진 사람들은 더 큰 불행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속담에 “천석지기 천 가지 걱정, 만석지기 만 가지 걱정”이라 했습니다. 이는 소유물이 많아질수록 걱정과 근심이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세상이 왜 이렇게 어수선하고, 국가가 어찌 이런 다툼과 갈등으로 흔들리고 있는지 우리는 성찰해 봐야 합니다.
우주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이치는 바로 마음의 청정함에 있습니다.
“일심이 청정하면 다신이 청정하고, 다신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청정해지면 세상은 반드시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법이란 무엇일까요? 법은 우주적 질서에 맞는 올바른 도덕적 행위입니다.
인도의 철학에서는 법(다르마)이 삶의 목표와 가치로 간주됩니다. 이는 즐거움, 권력, 재물, 쾌락의 추구와도 조화를 이룹니다. 하지만 무지無知가 고통의 원인이라는 불교의 가르침, 우리는 법과 도덕을 이해하고 실천함으로써 진정한 변화를 이뤄가야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은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존재입니다. 매 순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가르침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좌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주는 우리의 마음을 투사 합니다. “있다고 할까, 아니 한결같은 목숨이 텅 비어 있고 없다고 할까, 아니 만물이 다 여기로부터 나오네.” 원효 스님의 『기신론소』 서문은 우주는 텅 비어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존재하는 근원이다.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며 외부 세계는 우리들의 생각에서 먼저 존재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 영적 성장의 필수 조건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인도 철학에서도 사람이 영적 존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가난하거나 배고파야 한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과 영적인 성장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착하게 살며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영적 성장을 이루는 길이며 불교는 그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인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앉으면 입맛이 없더라도 밥을 먹을 수 있듯이, 영적 성장도 일상 속에서 작은 실천과 올바른 생각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셨던 것도 스스로의 의지였으며, 이를 통해 진리를 깨우셨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누구에게나 강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생각과 행위로 창조됩니다. 순간순간 올바른 생각과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존재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주와 연결된 더 큰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올바른 생각과 행동으로 삶을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행복과 평화의 길입니다.
“도를 배우려면 가난함을 싫어하지 말라. 가난한 것조차도 싫어하지 말라.”
중국 양나라 천축국 지공 화상이 해가 저무는 신시申時에 읊은 이 가르침은 가난함을 단순히 물질적 결핍으로 보지 말고, 도를 배우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본래 거짓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모양과 모습은 인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형성되는 것일 뿐, 그것이 진정한 실체가 아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든 과정 또한 연기의 원리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 지금 내가 지닌 이 모습과 얼굴도 본래 내 참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어리석은 이를 가까운 이웃으로 삼지 말라.”
우리에게 지혜로운 인연을 맺고, 삶을 올바르게 이끌어 줄 사람과 함께하라는 교훈입니다. 쓸데없는 말이나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담담하게 살아가는 삶을 권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하며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그 사람을 ‘출가한 이’라 부를 수 있다는 지공 화상처럼, 일상 속에서도 출가자의 마음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스스로의 마음을 먼저 밝히시길 염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