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스님
동국대강사·대덕사주지
동아시아 문화권은 한국, 중국, 일본을 말한다. 삼국은 한문 문화권이며 각국의 문화적 특수성을 지니고, 상호간에 교류를 통하여 서로 영향을 주며 국가발전을 이루어 온 것이다. 황하 유역의 중원(中原) 땅에서 일어난 한자 문화권을 가리키는 말이 중화(中華)이다. 이는 민족적 개념보다는 문화적 개념에 가까운데, 중화란 ‘가운데서 빛난다’라는 의미이다. 중화의 개념에는 한자를 바탕으로 한 중국의 고전적 문명 속에 동화해온 모든 민족이 포함되어 있으며 한자는 여러 민족이 다양하게 발전시켜온 산물이지 중국의 주류인 한족의 문화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 중화에 대립되는 개념은 무엇인가? 이는 ‘이적(夷狄)’이다. 이는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을 줄인 말로써 중국 주변의 민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는 그리스인이 스스로 헬레네, 자기네 국토를 헬라스라고 부르며, 북방 주변 민족의 땅을 바바리아, 즉 야만이라고 호칭했던 것과 같다. 중국의 영토를 침범해 온 민족들은 결국 종족적·문화적으로 중국에 동화되어 왔으며 주변 민족들은 그러한 태도를 지칭하는 말이 이른바 모화(慕華)이다. 모화란 ‘중국을 사모한다.’는 뜻이다. 사모하여 동화해 오면 중화 속에 포용해 받아들인다는 뜻이니 중국인의 이민족에 대한 오만감과 강한 문화적 자존심이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중국인의 이러한 오만스러운 자존의식은 동아시아 지역 특히 한국과 일본 지역의 지형적 고립성으로 인해 다른 문명권과 직접적인 접촉의 기회가 적었던 사실에 관계되어 있다. 중화가 곧 한자 문화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의 원천은 한문으로 써진 서적이다.
중국의 서적은 보통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사부(四部)로 분류하는데, 일반적으로‘경’은 유가의 경전 및 그 주석서, ‘사’는 역사서, ‘자’는 제자백가서, ‘집’은 시문(時文)종류라고 설명 할 수 있다. 오늘날 학문 개념으로 분석해보면 ‘경’과 ‘자’는 철학, ‘사’는 역사, ‘집’은 문학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모두가 오늘날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로써 중국의 학문은 인문학적 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중국적 학문이란 문학·사학·철학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성격이 농후하기에 그 가운데 철학이란 것을 분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 싶다. 그러나 사실 동아시아에는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철학(哲學)이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한 서양의 학문인데, 그것을 번역한 여러 용어 가운데 일본인 니시아마네(西周, 1829~1897)가 만든 이 말이 오늘날 한국과 중국 등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니시아마네는 메이지유신(1868)이 일어나기 직전인 1862년에서 1865년까지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에 유학하고 돌아와, 후일 동경대학(東京大學)에 합쳐진 개성소(開成所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서양 문명 도입을 위한 기관)나 메이지 정부의 병부성(兵部省), 메이지 6년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학회 명육사(明六社)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서양 문명을 일본에 소개했던 사람이다.
사실은 그리스에 있어서도 철학이란 어떤 특수한 학문이 아니라 신앙과 전통에 의거하여 종교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이성(로고스)적 방법에 의한 학문을 총칭한 개념이었다. 그리스 철학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은 당시의 모든 학문 영역에 걸쳐있다. 중세에 대학이 설립되면서 비로소 신학·철학·법학·의학 등 몇몇 전문 학부가 설치되었지만, 과학혁명의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은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도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17세기의 철학자 베이컨이나 데카르트 역시 모든 학문을 통합한 하나의 체계로서의 철학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오늘날 대학에 개설된 수많은 문과 학문들은 대부분 18세기 이후에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서양 학문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까지 전통 학문에 뚜렷한 변화는 없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진리를 ‘도(道)’라고 한다. 그것은 유(儒), 불(佛), 도(道)가 마찬가지로,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한 말이다. 도가에서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도라 말하지만, 그 도에는 인간이 본받아 실천해야 할 원리라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불교에서의 도는 세속적 번뇌의 굴레를 벗어나 피안에 도달하게 해주는 열반(니르바나)을 깨달음이라고 말하지만 도의 본래의 뜻은 ‘길’이다. 길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향하는 목적지를 확실하게 인도하여 준다. 동양철학에서 진리란 이론 자체를 위한 이론이 아니라 언제나 ‘길을 찾는 일’ 구도(求道)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17세기 이후 서양 근세철학의 관심은 주로 학문적 지식의 근거를 따지는 인식론의 문제에 치중하였고, 현대 영미철학에 이르러서는 언어분석이나 기호논리에 치중하여 전통적으로 철학의 분야에 포함 되어온 형이상학·윤리학·미학 등을 철학의 영역에서 제외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온 상황이니, 동아시아적 사유에 있어서 철학적 관심은 처음부터 인간의 실천을 전제로 하고 또 그것을 바르게 이끄는데 목적이 있다.
이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 간에는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인문학적 사유의 큰 틀인 철학과 역사와 문학은 인간의 삶과 인간의 길에 대한 탐구이다. 그러기에 도를 닦으려는 이들에게도 문(文)·사(史)·철(哲)에 이해는 필수 과목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인문학이 위기라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대학은 이제 학문의 전당이어야 할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대학의 기능이 상실했다고 단언 하려니 매우 서글프다. 한국의 대학 교육이 직업 교육과 취업 알선이 주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시점이다.
학문과 지성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구도(求道)의 행위처럼 신성하기 조차해야 하는데 말이다. 현대의 물질문명이 창궐한 문명사회에서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하다고 하지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한 성인(聖人) 공자처럼 진리에 대한 간절함이 동아시아적 사유이며 인문(人文)의 길(道)임을 깊이 새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대학의 기능을 되살리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