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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뭇 생명과 사물이 다같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언젠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꽤 근사한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트집잡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가수가 꽃에게 큰 무례를 범했다고 말입니다. 그는 꽃의 아름다운 이미지에 기대 인간 존재의 가치를, 요컨대 휴머니즘을 고양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물론 특별한 맥락에서 개체로서의 특정인을 꽃과 비유적으로 거론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가령 연전에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 또는 테레사 수녀의 삶을 추모할 때, 아니면 타계한 부모님이나 연인을 떠나보내며 그 시린 마음을 담아 이 세상 그 어떤 꽃보다 당신이 아름다웠노라 말할 때, 제 아무리 빛나는 꽃인들 인상을 찌푸릴까요?
하지만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동등하며, 더불어 아름답습니다. 제 트집의 요지는, 종(種)으로서 가치의 우열을 따질 수 없다는 것이고, 생명 존재를 두고 가치를 비교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불교의 대자대비(大慈大悲)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라는 가르침에 근거한다면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유가 두려워 법을 만들고 내일이 두려워 법칙을 찾습니다. 삶의 덧없음을 잊고자 높은 가치를 찾고 서로 맞서는 가치들의 혼전 속에서 길 잃지 않게 길잡이가 될 만한 가치, 절대가치를 찾습니다. 급기야 자신이 절대가치라 여기는 것들을 타인에게 들이대면서 동조하라고 강요하고 불응하면 배제 -여기에는 살인이나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방식도 포함됩니다- 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절대 가치란 -만일 그런 게 있다면- 그 위의(威儀)만큼이나 폐해 또한 커서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조심스럽게 ‘생명’을 꼽겠습니다. 근대 정치의 이상으로 꼽히는 프랑스 대혁명의 3대원칙 -자유 평등 박애- 도 모두 복된 생명을 떠받드는 하위 범주처럼 여겨집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기치로 내건 거의 모든 권리와 의무 역시 생명의 보편적 복지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지 않습니까. 생명이라고 했지만, 문맥상 ‘생활’이나 ‘삶’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활과 삶의 뿌리 역시 생명입니다. 생명은 모든 가치의 뿌리이자 가장 궁극적인 지향점이라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지요. 서양이 플라톤의 이데아와 여호와 하느님의 그늘에서 인간이 중심으로 나선 것은 중세 르네상스 시기 이후부터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동양의 사유체계 안에서도 하늘(天)의 위상은 지금도 여전히 아득합니다. 가장 고귀한 윤리는 천륜(天倫)이고, 가장 귀한 인연은 천생연분입니다. 인본주의 정치 이념이라 배워 온 단군의 인내천(人乃天) 사상 역시, 인간이 인간으로서 오롯이 고귀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를 이어받았기에 가능했고, ‘만백성의 어버이’로 군림했던 군왕들 역시 하늘〔天心〕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2500년도 더 전에,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의 가치를 동등하다고 했습니다. -일전에 저는 보시(報施)의 가르침을 혁명적이라 했지만, 석가의 생명사상 역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혁명성은 지닌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석가의 탄생게로 알려져 있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오직 나만 잘났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탄생게의 ‘나(我)’를 불가에서나 불교철학자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잘 모르지만, 저는 제 멋대로 이 땅의 모든 생명존재들이 태어나는 순간 선언해야 할 것을 석가께서 상징적으로 선언한 것이라 여겨 왔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를 진리의 중심에 두셨던 걸로 압니다. 거칠게 이해하는 바, 연기란 저마다의 것들이 따로 독립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 인연으로 엮여 의지하며 서로가 서로의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는 존재라는 뜻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풀 한 포기가 어제의 나일 수 있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길 고양이가 또 내일의 나일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풀과 고양이와 나 자신이 다른 시간대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득히 먼 인연으로 엮여 있고, 그 끈이 실뿌리처럼 또 다른 다양한 시간 속의 생명 존재들과 이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중심도 변방도 없고, 어제도 오늘도 없는 그 거대한 연기의 그물 속에 오직 ‘나’ 혹은 오직 ‘인간’만 독존(獨尊)하다는 것은 단순 논리로도 모순입니다. 석가모니는 나아가 생명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를 나와 다르지 않은 부처로 드높였습니다. 저는 그 사유의 높이와 넓이를 상상으로도 더듬지 못합니다.


인간에게도 종의 한계라는 게 있을 것입니다. 석가는 뭇 생명과 뭇 사물이 다같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지만, 그 가르침을 받들면서도 인간은 당장 내 생명이 소중하니까 짐승도 잡아먹고, 풀도 뜯어먹고, 바위·땅도 비틀고 파헤쳐 광물을 캐내 써왔습니다. 그럼으로써 종을 보존해왔고, 과학을 성숙시켜왔고, 오늘의 화려한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그 탐욕이 절제를 잃어 이제는 인간 주변의 생명들이, 강과 바다와 땅이 죽어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반도 4대강의 운명이, 구제역·광우병으로 도살된 생명들의 운명이 그 예일 것입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거나 망가진 뒤에도 문명의 힘, 과학의 힘으로 종의 보존을 이어갈 수 있다는 오만한 자신감에 빠져있는 인간도 있다고 합니다. 연기의 그물을 찢고, 천박한 의미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하겠다는 것일까요. 이미 도살당했거나 생매장 당한 가축의 사체가 땅을 오염시키고 물과 공기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합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 속에 이 땅의 현실을 대입해 볼 때, 대한불교 조계종이 연초 선언한 ‘자정과 쇄신을 위한 5대 결사’에 수행, 문화, 평화, 나눔 외에 생명결사를 포함시킨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오히려 지금껏 덜 적극적으로 대응해온 것이 의아하고, 더 일찍 발벗고 나서지 않은 것이 야속할 지경입니다.
생명결사란, 천지동근(天地同根) 만물동체(萬物同體)라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말합니다. 온 국민이 생활 속에 ‘참 나’를 찾는 참선수행을 꾸준히 연마하면 온 생명체가 나와 더불어 한 몸이요, 온 세계가 한 집이라는 인식에 크게 눈을 뜸으로써 자비의 마음이 우러나와 자연히 모든 생명을 내 몸처럼 돌보고 보살피게 됩니다. (…) 나와 더불어 모든 생명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평화로운 세계를 구현합시다.
-‘조계종 총무원 중앙종무기관 5대결사 대중공사 제안’에서 인용-


총무원은 환경친화적 삶과 생명운동 동참, 유기농산물 권장 등을 생명결사의 실천강령으로 예시하고, 장바구니 사용하기, 음식물 남겨 버리지 않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등 구체적인 세부 지침도 마련했습니다.
큰 위기가 닥친 듯 말해놓고, 실천 지침이 너무 사소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작은 신심이 모여 큰 신앙을 이루듯, 작은 실천이 모여 큰 위기를 넘어섭니다. 
“우리에게는 더도 덜도 아닌 딱 충분한 시간이 있다. 지금 당장 시작한다면.” 최근 출간된 <자연자본주의>라는 책에 인용된 환경학자 도넬라 메도스의 말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그 말에 덧붙여 “실질적인 희망을 마음 가득 채워야 한다. 이론적 희망이 아니다. 본능적인 낙천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원하는 미래를 창조할 책임을 스스로 기꺼이 맡겠다는 결의에서 나오는 희망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환경운동가 프랜시스 무어 라페는 “희망은 판단이 아니라 태도”라고 했고, 문예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진정한 급진주의자는 절망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했다고 합니다. 윌리엄스의 주장이 옳다면, 붓다는 과연 급진주의자이기도 한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