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한스님 / 봉담선원장
또 역마살이 도져 걸망을 들쳐 맸다.
도반 스님들이 자주 묻는다.
“스님은 탁발승도 아니면서 또 어데 가려고 걸망을 들쳐 매오?”
그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살(煞)’이 많아서 살 좀 빼러 갑니다.”
거의 매달 내가 걸망을 매고 찾아가는 곳은 외진 산사(山寺)다. 중이 절집에 가는데 산사를 찾아가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하랴만, 깊은 산사에 가서 하룻밤 자고 나면 시들하고 윤기 없던 마음에 이슬이 돋고, 소란하고 복잡했던 심사에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쪼개고 뽀개질 듯 날름거리던 탐욕의 화염이 섣달 화롯불처럼 안으로 불씨를 다독이며 안온하게 가라앉는다.
외진 산사에서의 하룻밤 유숙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이른 새벽, 잠을 깨우는 산새들의 싱싱한 울음소리에 있다. ‘후후후훗- 후후후훗-’하고 잠을 깨는 건 보나마나 후투티 울음소리다. ‘솥 꽉- 솥 꽉- 솥 꽉꽉-’하고 우는 건 또 보나마나 소쩍새 울음소리다. 산초잎을 흔들며 ‘지고 살제이- 지고 살제이-’하고 우는 건 또 보나마나 산까치 울음소리다.
이번에 찾은 곳은 경북 문경에 있는 사불산(四佛山, 912m) 대승사(大乘寺)였다. 사불산 대승사에 가면 번뇌의 화염을 때려잡는 데 도사인 강호 고수 스님 한 분이 계신다기에 불원천리하고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산사에 들고 보니 나 말고도 ‘살(煞)’이 도진 분들이 의외로 많아 다행이었다. 애꾸눈 세상에선 애꾸눈을 만나면 편해지듯이 ‘살’ 많은 땡초이기에 ‘살’ 많은 동료들을 만나니 우선 반갑기부터 한 것이다. 게중에는 의사도 있고, 교사도 있고, 주부도 있고, 학생도 있고, 백수도 있었다. 다들 템플스테이라는 연막을 치고 산사에 들었지만, 실은 나처럼 다들 인생에 ‘역마살’이 깊이 박혀 있는 치들이었다.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라. 옛 중국 고승의 시다. ‘이 문 안으로 들어오려거든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라.’는 뜻이다. 강호의 고수답게 몇 합이 지나도록 침묵하고 있던 철산(鐵山) 주지스님이 ‘조계 문중’의 그 비법(秘法)을 바닥에 깔고 조용히 한 초식 펼친다.
“공부하는 입장에서 볼 때 ‘살’은 참 좋은 것입니다. ‘살’은 곧 욕심이 많다는 뜻이고, 그렇게 볼 때 스님네들처럼 ‘살’ 많고 욕심 많은 당취(黨聚)들도 없으니까요. 바로 공부 욕심입니다. ‘깨어 있으면서 잠자는 상태’를 중도(空 여래, 진여, 반야, 해탈) 자리라 하는데 그 자리를 알면 모든 것이 자유롭게 됩니다. 그래서 스님네들은 그 자리를 잡기 위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니 욕심 많기로 치면 얼마나 ‘살’ 많은 치들입니까? 그러나 한번 그 자리를 잡고 나면 거꾸로 모든 욕심이 없어지고 맙니다. 그야말로 대 자유입니다. 그래서 스님네들의 ‘욕심살’은 보통 ‘욕심살’이 아닙니다. 차이가 있다면 산 밑 사람들은 자꾸 끌어 모으는 ‘살’에 불타는 반면 산 속 사람들은 자꾸 없애는 ‘살’에 온몸을 지지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산을 찾은 여러분들의 ‘살’은 참 좋은 ‘욕심살’입니다. 여러분들의 그 ‘욕심살’을 먼저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절로 공부가 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의 사주팔자에 각각 제 업대로 들러붙어 있는 ‘살’은 바로 ‘욕심’과 이퀄 관계다. 그러므로 그 ‘살’이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데 쓰여 지면 대 자유를 얻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행복살’이 되고, 끌어 모으고 바람피우고 족치고 때려 부수는 데로 뻗어나가면 패가망신의 ‘불행살’이 된다.
살짝 펼친 철산 스님의 한 초식에 몸과 마음이 활짝 열린 ‘살’들이 저마다의 초식으로 제 ‘살’을 녹이기 위해 산뽕잎을 따러 사불산에 오른다. 이번 초식은 산뽕잎을 따다가 무쇠솥에 덖어 뽕잎차를 만들며 살 속의 ‘살’을 볶고 녹이고 갈무리는 초식이다.
‘뻐꾹- 뻐꾹- 비워라- 뻐꾹-’      
저물녘, 일하면서 듣는 뻐꾸기 울음소리는 애절함을 넘어 간장을 녹인다. 맑고 정갈한 뻐꾸기 울음 속에 오늘 산을 찾은 사람들의 ‘살’도 어스름 속으로 갈매나무처럼 맑고 정갈하게 녹아든다. 날이 바뀌고 달이 바뀌면 나는 또 땡초‘살’을 녹이러 더욱 외진 산사에 들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