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저 도안(月渚 道安, 1638~1715)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스님은 평양 출신이다. 성은 유씨劉氏이고, 법호는 월저月渚, 도안道安은 법명이다. 아버지는 유보인劉輔仁이고, 어머니는 김씨이다. 9세에 출가하여 천신天信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금강산에 들어가 풍담 의심(楓潭義諶, 1592~1665)의 지도를 받으며 휴정休靜의 밀전密傳을 연구하여 화엄학華嚴學과 삼교三敎에 두루 통하였다. 스승 풍담 스님은 백수십 권에 이르는 『화엄경』·『원각경』등 수많은 소疏를 면밀하게 살펴 6년 만에 그 잘못을 바로잡아 음석音釋을 지어 여러 총림叢林에 보내기도 했던 당시 선교학禪敎學에 걸출했던 분이기도 하다. 1664년(현종 5) 묘향산에 들어가 화엄경의 대의大義를 강의하고 연구하니 그때부터 사람들이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렀다. 스님이 『화엄경을 강의할 때마다 항상 수백 명의 청중이 참여하여 당시에 보기 드문 대법회가 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死 때 사람들의 무고誣告를 당해 옥에 갇혔으나 선조 임금이 본래부터 월저 대사의 명성을 소문으로 들은 터라 특별히 명을 내려 풀어 주게 하였다. 그로부터 더욱 자기 자신을 숨기려 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더욱 성대하게 알려져서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그리하여 월저 대사의 문하에 몰려드는 자들이 마치 목마른 사람이 강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아 물을 배불리 마시고 돌아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월저 스님은 화엄경과 법화경 등의 대승경전과 예념왕생문禮念往生文 등의 염불 관계서적 10여 종을 인출印出하여 배포하였고, 회연기會緣起에 따라서 화엄경을 국역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스승 의심의 사업을 이어받아 국역작업을 완수하였다. 스님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불전 간행에 힘을 기울인 것은 ‘척박한 마음의 땅을 개간하고 크나큰 원願의 종자를 심어 지혜 광명의 나무를 가꾸고자’한 때문이었다.
당시 북쪽에서 명성을 떨치던 월저 스님이 남쪽 대둔사에 왔을 때의 일이다. 대흥사의 화악 문신華岳文信 스님은 월저 스님과 더불어 선지禪旨를 토론하고 나서 그를 종주宗主로 삼을 만한 인물이라 여겨 거느리고 있던 모든 대중들을 월저 대사에게 양보하고 물러났다. 그러자 대중들은 매우 놀라며 만류하였다. 대사가 대중들을 타일러 말하였다.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니라.” 그러고는 스스로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월저 대사의 화엄법회가 끝날 때까지 면벽面壁에 들어갔다고 한다. 월저 스님은 법회를 마치고 묘향산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남쪽 지방에 갔다가 육신보살肉身菩薩을 친견하였다.”고 하였다.
화악 문신 스님의 학덕뿐만 아니라 큰 자비심에 감복한 것이다. 화악 스님은 본래 글자를 전혀 몰라 출가 후에도 농기구를 만들고 보부상을 하며 떠돌던 분이었다. 어느 날 대흥사 상원루 부근에서 많은 짐을 짊어지고 다니다보니, 지치고 힘들어 누각 밑에서 잠깐 쉬었다. 마침 누각 위에서는 야단법석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 화엄의 대가인 취여 삼우(醉如三愚, 1622~1684)선사가 승려들과 신도들을 모아놓고, 화엄종지를 강의하고 있었다. 화악이 화엄의 경經 구절을 듣는 순간 ‘쿵’하며 심중에 와 닿았다. 화악은 옆의 동료 행상에게 농기구를 다 건네주며, 앞으로 자신은 장사를 하지 않고 정진할 것이라고 말한 뒤 누각 위로 올라갔다. 화악은 삼우 스님에게 다가가 절을 한 뒤에 참회하며,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흐느꼈다. 이후 화악 스님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경전을 공부하여 3년 만에 일취월장하여 후학들을 가르쳤다. 스님이 대흥사에서 화엄산림법회를 열자, 전국 각지에서 1,000여명의 승속이 모였다.
월저 스님은 진불암眞佛庵에서 나이 78세, 승랍僧臘 70세로 입적하였다. 임종 때 상서로운 빛이 수백 리 밖에까지 뻗쳐서 사람들이 스님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제자들이 화장하여 사리舍利 3과를 수습한 뒤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서쪽 기슭과 해남 대흥사大興寺 및 평양에 부도를 세우고 봉안하였다. 1716년(숙종 42) 보현사에 비를 세웠고, 그 뒤 대흥사에 비를 세웠다. 스님은 청허파淸虛派의 전통적인 수행 순서에 따라 교敎에서 선禪으로 나아가 선을 참구하고, 또 교를 해득하여 화엄사상을 널리 천명한 화엄대종사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사람들에게 염불왕생을 많이 권장하기도 하였다. 전법제자傳法弟子로는 법명法明과 추붕秋鵬이 있으며, 문도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한편 스님은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계보를 정리하였다. 예컨대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를 만들어 부처님과 이후 정법正法을 면면히 이어갔던 인도와 중국뿐만 아니라 해동의 불법을 면면히 지켜온 역대 스님들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조선 초기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 스님이 전승했던 것을 월저 스님이 보완한 것이다. 이 책은 선종의 종파와 법맥을 도표로 그려놓은 절첩본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과거칠불로부터 인도 및 중국을 거쳐 고려 말기 그리고 조선 초기의 나옹 혜근-무학 자초 스님을 거쳐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 스님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도식으로 낱낱이 나열한 부분이고, 둘은 선종오가禪宗五家의 법맥을 요약한 게송 부분이다. 셋은 월저 스님 자신의 발문跋文이 수록된 부분이다. 내용은 선종오가 가운데 조동종曹洞宗을 제외한 4종을 남악의 법계로 포함시키고 있다. 이 점은 선종사에 대한 법맥의 오류로 제기되어 있는데, 이러한 시각은 조선 시대를 관통해온 하나의 흐름이었다.
이후 사암 채영獅巖采永 스님이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를 찬술하여 조선불교의 전등을 기록하였다. 1764년에 전주 송광사에서 간행된 이 책은 저술 당시까지도 이설異說이 분분하였던 우리나라 법맥法脈을 정리하고 태고법통설太古法統說을 확정시켰다. 이 책은 비바시불毘婆尸佛로부터 석가모니불에 이르기까지의 칠불七佛을 열명列名하였고, 「서천조사西天祖師」는 제1 마하가섭摩訶迦葉부터 제28 보리달마菩提達磨까지, 다음 「중화조사中華祖師」는 제1조 보리달마에서부터 제6조 혜능慧能까지의 6조, 혜능에서부터 분파된 여러 종파 가운데 임제종臨濟宗의 법맥을 밝혔다. 그리고 임제의 제18대 법손인 평산平山과 석옥石屋을 기록한 뒤, 평산의 밑에서 고려의 나옹懶翁이, 석옥의 밑에서 고려의 보우普愚가 법맥을 이었음을 밝혔으며, 나옹의 밑에 무학無學 등 32명의 문도를 열거하였다. 또 무학의 밑으로는 함허涵虛 등 18명의 문도를 기록하고 있다.
다음 「임제종 제18대 적전 석옥 정홍 법사」라는 표제를 쓰고 「해동정맥제일조태고보우화상海東定脈第一祖太古普愚和尙」이라고 쓴 다음 이색李穡이 지은 북한산태고암의 태고화상비문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보우의 제1세 법사法嗣에 환암幻庵, 제2세에 구곡龜谷, 제3세에 벽계碧溪를 두었다. 그런데, 벽계 밑에 주석을 달아서 “벽계는 멀리 구곡을 잇고, 또 명나라에 들어가서 임제종 아래 총통화상總統和尙의 법을 받아왔다.”고 하였다. 이것은 성종과 연산군 때의 불교억압책으로 승려의 법맥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벽계의 법을 이은 벽송碧松이 벽계가 죽기 전에 윗대의 법맥을 묻자, “멀리 구곡을 잇는다.”고 한 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청허淸虛 스님 아래 8대 법손과 부휴浮休 아래 7대 법손까지 수록하였다.
끝으로 「해동선파정전도海東禪派正傳圖」라는 제목 아래 서산대사 아래의 3파인 소요파逍遙派·편양파鞭羊派·무염파無染派의 법맥도를 수록하였고, 삼국시대 이래 역사상 드러난 고승과 대덕의 휘호, 조계산 16국사 등을 게재하였으며, 또 지공指空의 행적과 무학의 비명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