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귀
선철학 박사·동국대 선학과
1. 종교의 본분
모든 존재에는 반드시 근원이 있다. 그런데 근원을 아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것은 체험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옛사람들은 그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원인(原人)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의 본명(本命)에 대한 근원을 구명하여 그에 걸맞게 살아감으로써 참다운 존재가 되려는 몸짓이었다. 근원에 대한 구명은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추구였고, 그 에 걸맞게 살아가려는 것은 그 진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모색이었으며, 참다운 존재가 되려는 것은 왜 그래야만 하는가의 당연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근원이란 다름 아닌 자기의 본분이요 깃들어 살고 있는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이었다. 민족도 사상도 사회도 역사도 학교도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이 가운데 종교는 그 역할과 가치를 인간의 삶에서 직접적으로 실현하려는 일종의 발명품이었다.
2. 계율의 등장
따라서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며 왜 해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해답을 주려는 진· 선·미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적어도 최소한의 약속이 필요했다. 마땅히 그래야만 세상의 호응을 얻고 관심을 이끌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교에는 그것을 계(sila)와 율(vinaya)로 제시하였다. 그래서 계와 율은 수행과 지혜와 더불어 불교를 지탱하고 있는 하나의 축이었다. 이런 점에서 계율은 불교의 생명이고 가치이며 역사였고 사상이었으며 문화였다.
이에 계율은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그에 상응하는 행위와 규범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한것이겠지만 그것을 규정하고 그것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자체적인 제어를 통하여
소정의 행위를 유지시켜 나아갔다. 그런데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자체에 편리한 방식으로 전승 내지 왜곡하여 계율의 가치를 부여하고 인정하며 추구하는 모습이 출현하였다. 따라서 역사적인 편리성을 당연시하고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게 됨으로써 계율의 본래적인 성격과 의의와 모습이 변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연 계율을 시대적인 변화의 가치에만 미루어두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 이면에는 우선 모든 사람을 위한 명분아래 종교의 본분을 제쳐둔 채 사회의 참여라는 명문으로 무장한
추악한 모습이 명백하게 들어 있기 때문이다.
3. 계율의 생명
종교 특히 불교의 경우 그 본분이란 안심입명(安心立命)이요 그 완수를 위하여 개개인의 치열한 수행이 요구되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바탕이 곧 계율의 파지(把持)임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계율의 파지는 불
교의 근원을 바로 세우기 위한 최소한도의 행위이다.
따라서 계율을 청정하게 수지하는 것은 계본과 율장에 명시되어 있는 것만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청정이란완성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의 양심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호호탱탱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구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자신이 오계나 십계나 보살계의 수지도 중요하지만 더욱더 본질적인 접근은 그에 앞서 자신의
떳떳한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발심(發心)이다. 그래서 발심은 자신에 대한 맹세이고 타인에
대한 의무이다. 이와 같은 사람을 두고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라 하였다.
보살의 기본정신은 자리이타이다. 자리가 올바른 마음으로 양심적으로 살아가려는 자신에 대한 맹세라면 이타는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회피하지 않고 완수하는 의무이다. 그래서 보살은 진정한 발심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발심이란 지계의 완성인 지계바라밀이다. 이에 대하여 현실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세
로 제시되어 등장한 것이 곧 악을 물리치고 선을 증장하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지계바라밀의 기초로서  3무루학 가운데 계학이었다.
4. 청정한 계율의 실천
이와 같이 지계바라밀의 중요성에 대하여 ≪대지도론≫에서는‘발이 없이 길을 걸어가려는 것과 같고, 날개 없이 허공을 날아가려는 것과 같으며, 배가 없이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같아서 지계가 없이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고 말한다. 이처럼 지계는 예로부터 큰 병에 걸렸을 때의 좋은 약과 같고 두려울 때의 호신부와 같으며 죽음의 저승세계에서 불을 밝히는 등불과 같고 험한 산길에 나 있는 교량과 같으며 죽음의 바다를 건너는 배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를 위하여 보살이 구비해야 하는 세 가지 이념은 보리심과 무집착심과 대비심이었다.
첫째, 보리심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금계(禁戒)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계의 적극적인 의미에는 보리심을 내어 선법을 추구하고 악법을 그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만약 보살로서 보리심을 내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범계가 된다.
둘째, 무집착심은 반야를 터득하여 지계와 범계에 집착하지 않고 반야의 터득과 중생의 교화에 대한 아만심
을 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보살이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셋째, 대비심을 일으키는 일체의 이타행위는 지계의 기본이다. 따라서 제법이 적멸함을 통달하여 중생과 부처라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보살의 자세는 곧 지계와 범계 및 일체 행에 조차 집착이 없는 행위였다. 이처럼 지계는 금지계를 준수하여 악과 그릇된 행위를 그치는 방비지악(防非止惡) 뿐만 아니라 널리 선법(善法)을 일으켜 대비의 실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계는 보리심의 추구와 더불어 중생 교화를 아울러 실천하는 작선계(作善戒)의 성격과 더불어 반야를 터득하는 보살행의 완성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보살의 청정한 계율이념이 현실에서 가장 적용되는 덕목은 십선업이었다. 십선업을 실천함으로써 아만심을 없애고 인간세계와 천상세계에 태어나 부귀영락을 누리며 번뇌를 벗어나 성인의 계위를 얻어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보리심을 내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십선업은 인간과 천상과 성문과 연각과 보살의 의지처로서 일체선계(一切善戒)의 근본이었다. 십선업은 방생과 보시와 청정범행의 3가지 신업과, 진실한 말과 화합하게 하는 말과 부드러운 말과 용기를 주는 말의 4가지 구업과, 계와 정과 혜의 3가지 의업을 말한다.
따라서 십선업은 불교윤리의 근본을 형성하고 나아가서 불교수행의 근간으로서 출가와 재가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