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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가 산문을 연 까닭은?

곽병찬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경북 문경 봉암사는 부처님 오신 날에만 산문을 연다. 모름지기 부처님 뜻대로 살겠다며 61년째 산문을 폐쇄해왔다. 그건 수행과 정진의 모범이 되고자 함이고, 이를 통해 한국 불교의 세속화 정치화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의지가 투철했기에 봉암사 결사의 시작은 비록 작았지만, 오늘날 한국 선불교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 봉암사가 지난 3월 산문을 열고 세상 사람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한판 걸진 법석을 폈다. 용화세계가 열렸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망에서 깨어나 더 이상 새벽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아니다. 그 이유는 뜻밖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에 대해 산중 수좌와 불자들이 함께 반대 입장을 밝히고, 저지 투쟁을 다짐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세속적인 정치 현안에 대해, 가장 세속적인 방식으로 충돌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이미 조계종 종단 차원에서 대운하 건설 반대의 입장을 밝혔던 터였다. 굳이 봉암사까지 정치화 혹은 세속화의 비난을 무릅쓸 이유는 없었다. 물론 불살생 무소유를 생명으로 하는 불가에서 탐욕에 눈이 멀어 생명과 자연을 파괴하는 대운하에 반대할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봉암사 수좌들까지 나서는 것은 마땅치 않았다. 적어도 봉암사만큼은 정치와 거리를 둬야 하는 것 아닌가. 개신교 장로 대통령이 그런 다고, 수좌까지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언론은 그날 행사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러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서울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했던 근본주의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었고,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지인들을 대거 정부의 주요 직책에 기용할 정도로 막무가내 정권이 들어섰지만, 1700년 역사의 한국 선불교의 상징이 들썩이는데 외면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울림이 큰 만큼‘봉암사의 세속화’논란도 컸다.

나의 의문은 행사장 펼침막을 보고서야 풀리기 시작했다.
“부처님 마음과 생명의 눈으로 우리 삶 성찰하는 참회 정진 법회”

투쟁 의지를 불사르는 분노와 증오의 자리가 아니라, 나의 잘못을 돌아보는 자리라는 것이다. 너의 흠을 들춰내고 비난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의 잘못을 드러내고 참회하는 자리였다. 아이의 잘못을 나무라기 전에 아비가 자신의 종아리를 내미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런 참회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꾼다. 나의 소견은 얼마나 짧았던가.

한반도 대운하는 이 정부의 정치 경제적 의도를 떠나 우리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욕망과 탐욕의 상징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잘 살겠다는 눈 먼 욕망, 그러자면 다른 생명을 죽이고 그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해도 된다는 오만, 그리고 당장 배를 더 채우기 위해 종자까지 먹어치우는 어리석음이 하나로 점철돼 나타난 것이다. 정치권력은 이런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고 어리석음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관철하려고 대운하를 고안하고 추진한다. 대운하의 경제적 효과란, 고작 전국을 파헤치는 토목공사로 경기를 반짝 띄우는 것뿐이다. 누가 그 불편하고 느려 터진 운하로 물자와 사람을 실어 나를 것인가. 그러나 그 후유증은 치명적이다. 한반도의 모든 생명을 죽이고 위협하는 암세포가 된다. 한강과 낙동강은 2300만 수도권 시민과 1000만 낙동강 유역 시민의 상수원이다. 운하가 만들어지면 더 이상 상수원으로 이용할 수 없다. 물이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만 고통을 겪는 게 아니다. 자연이 수천 년에 걸쳐 만든 물줄기는 졸지에 콘크리트 웅덩이로 변한다. 하천 생태계는 붕괴를 면할 수 없다. 가벼운 호우에도 범람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교도소 담보다 높은 거대한 방벽을 세울 순 없다.

강은 생명의 젖줄이다. 생명을 낳고 키우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문명은 물길을 따라 형성됐고, 생명의 사슬은 물길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 젖줄을 어떻게 끊겠다고 할까. 대운하는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 보여주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물 한 방울에도 84,000 생명이 있다고 한다. 과장이 아니다. 생물학은 엄지와 검지로 집어올린 한자밤의 흙 속에도 1만종의 미생물과 1억 개체의 유기체가 있다고 규명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티끌 하나에도 우주가 있다고 했다. 이 작은 우주 속에서 모든 생명은 서로 생명의 그물을 형성한다.

생명의 그물은 한 코만 풀려도, 다른 코가 모두 풀려 사용할 수 없다. 생물학은 그것을 생명의 순환 혹은 먹이사슬로 설명한다. 각각의 생명은 그런 하나의 그물코이고, 그물코는 서로 얽혀 우주적 생명이 된다. 그물이 곧 그물코이고, 그물코가 곧 그물이다. 시작도 끝도 없다. 공간적으로 서로 의존해있고, 시간적으로 순환할 뿐이다. 그런 존재의 실상을 부처님은 ‘중도 연기’라 하였다. 살생은 곧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가르침은 가르침 만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실천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세간과 출세간은 둘이 아니다. 출세간의 빛이 있어 세간의 미망을 깨고, 세간의 땀이 있어 출세간은 그 빛을 갈고 닦는다. 출세간이 빛을 잃으면 세간의 미망은 더욱 깊어지고, 세간이 무너지면 출세간 또한 존재할 이유가 없다. 세상 만물은 하나의 꽃으로 존재한다. 생명 무생명, 무기물 유기물, 동물과 식물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울려 아름다운 이 세상을 빚어낸다. 하나의 생명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돈과 성공이 우리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돈 많이 버세요’가 인사말이 되었고, 돈벌이가 학문의 목적이 되었고, 돈은 세상의 신이 되었다. 이런 조류에 편승해 대통령은 성공시대를 외치며 물신의 전도사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돈에는 눈이 없듯이, 돈벌이와 성공에는 도덕도 가치도 없다. 친구도 없고 동료도 없다. 자연도 없고 생명도 없다. 그런 물신 사회의 상징적 사업이 바로 한반도 대운하다. 그러나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간다고 한들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40년 전에 비해 소득은 100배나 많아졌지만, 우리는 불안하고 초조하며 소외되고 외로운 삶을 살아간다.

행복지수는 오히려 더 떨어졌고, 희생과 헌신 나눔이라는 공동체 정신은 사라졌다. 열에 아홉은 낙오자이나, 낙오자에겐 최소한의 안전판도 없다. 구석으로 내몰린 그들은 사회를 향해 복수를 꿈꾼다. 한편에선 치솟는 황금의 탑을 자랑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죄 없는 어린아이까지 참혹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불제자라면 불살생 무소유를 서원한 이들이다. 죽임의 세상을 살림의 세상으로, 탐욕의 세상을 나눔의 세상으로, 아귀다툼의 세상을 평화의 세상으로 제도하겠다고 다짐한 이들이다. 그들이 죽음의 장사치를 몰아내고, 살생을 막고, 탐욕의 바벨탑을 깨는 건 당연하다. 물신의 허울을 벗겨내고, 존재의 실상을 밝히 드러내, 참 행복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 봉암사가 그날 산문을 연 까닭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날 한 비구니 스님은 이렇게 참회하고 서원 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마음의 눈으로 보면, 그 속에 깃들어 사는 팔만사천의 생명이 보인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날마다 읊조리면서도 진심으로 믿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죄업의 과보가 생명의 근원인 강물의 숨통을 조이고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동체대비’를 말해왔으면서도, 진심으로 만물을 한 몸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지심으로 참회하오니, 오늘 저희들의 기도가 세상의 작은 아픔에도 소스라치는 약왕보살님의 비원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의 기도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