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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생활의 종교다

박경준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얼마 전, 법정 스님께서 입적하셨다. 스님은 불교인들은 물론 우리 국민 대다수의 정신적 지주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스님의 입적 후 스님께서 저술한 책들이 품귀현상을 빚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스님의 가르침이 종종 왜곡되고 있는 점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며칠 전, 한‘논단’에서도 유명한 철학자가 발제를 하는 중에 법정 스님의‘무소유’ 에 대해 약간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보았다. 그 철학자는 법정 스님께서 강조하신‘무소유’를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로 이해하는 듯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스님의‘무소유’는결코 소유 그 자체를 부정하는 가르침은 아니다. 스님은 어디까지나‘필요 이상의 소유’를경계하셨을 뿐이다. 필요 이상의 소유물은 소유자 자신을 오히려 소유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은‘선택한 가난’을 강조하셨을 것이다. 선택한 가난은 우리로 하여금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고 베풀게 함은 물론, 우리를 결국 자유롭고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의‘무소유’를 왜곡한 그 철학자뿐만 아니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현실 도피의 종교, 혹은 생활과 무관한 종교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무엇보다도 유가 (儒家)의 전통에서는, 해탈과 열반을 궁극적 목표로 삼아 출가수행을 독려하는 불교를‘허원적 멸(虛遠寂滅)’의 도피적 종교로 곡해하였다. 나아가 불교를‘부모도 국가도 외면하는[無父無 君]’반인륜적 종교로 비판하였다. 또한 서구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막스 베버 (Max Weber)는 불교를‘반정치적 위상을 지닌 종교…오직 개인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각자 의 구원을 향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 형태의 노력’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개인적 구원의 상태[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 세계는 버려져야 하고, 자아(self)는 금욕과 고 행을 통해 부정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기본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슈펭글러 (Spengler)는 붓다를 허무주의자로 규정하였고, 토인비(Toynbee)는“붓다에 의하면 진리는 역사 너머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베잇슨(Beteson)은 불교를 염세주의 및 허무 주의 등으로 규정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불교는 결국 우리의 현실 생활과는 거리가 먼 종교가 되고 만다. 이것은 분명 불교에 대한 오해다. 이러한 오해는 근본적으로 불교의‘열반’에대한 초월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열반을 무(無) 또는 단멸(斷滅)의 상태로 왜곡한다.

열반은 산스크리트어 nirva의 음역어로‘불어서 끄다(吹滅)’는 의미의‘nirv 에서 파생된 말로‘불길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생명의 불길이 꺼진 상태를 의미 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불길은 탐욕과 증오와 무지[貪嗔痴], 즉 삼독(三毒)의 불길이며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다. 따라서 바람 잔 숲에 새들이 날고 물결 고요한 호수 위에 고기들이 뛰노는 것 처럼, 삼독의 불길,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꺼짐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순수한 본래적 생명은 자 유롭게 약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열반은 생멸의 소멸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회복이며‘삶의 완전연소’인것이다. 열반은 인간의삶저편에있는또다른 하나의 존재 영역이 아니다. 열반은 바로‘지금-여기’에서의 삶의 질에 관한 개념인 것이다. 우리가 열반을 이렇게 이해하지 않 는다면, “윤회[生死]는 열반과 아무런 차별이 없다. 열반의 실제는 그대로 윤회의 실제이다. 둘 사이에는 미세한 차별도 없다”라고 한 용수(龍樹)의 주장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불교가 지향하는 해탈과 열반이 인간의 삶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과 공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형태,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생활’과 무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불교가 형이상학적인 종교가 아니라 생활을 중시하는 실천지향적인 종교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독 묻은 화살의 비유’[箭喩經]의 가르침에도 잘 나타나 있다.
부처님은 비구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만약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설하지 않는다면 나는 부처님을 따라 배우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도중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곧 의사를 부르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은 무엇 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인지 물푸레나무인지, 화살은 보통 나무로 만들었는지 대나무로 만들었는지를 알아야겠소. 또 화살깃이 매털로 되었는지 독수리털로 되었는지 아니면 닭털로 되었는지를 먼저 알아야겠소.’이와 같이 말하면서
화살을 빼지 않는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가 영원 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가 생활의 종교임은 팔정도(八正道)의 하나인 정명(正命)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정명은 곧‘바른 직업’이요‘바른 생활’이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해탈과 열반은 이‘정명’의 실천을 게을리 해서는 성취하기 어렵다. 우리는 불교가 생활의 종교임을 잊지 말고, 밥 먹는 일, 옷 입는 일, 잠자는 일,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 등, 모든 생활이 곧 수행임을 깨달아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정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