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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과 관용의 실천윤리로서의 종교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흔히 종교의 핵심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적 믿음을 인간 이성 위에 놓고 신의 존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인간의 알량한 정신으로 모두 이해하려 드는 것은 오만이라고 꾸짖습니다. 그리곤 열정적으로 외치지요. “~믿습니까?” 거기에 “믿습니다”라고 답하는 이들을 그들은 신자(信者) 혹은 신도(信徒)라 부릅니다. 
그런데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다른 말을 합니다. 그는 축의 시대(Axial Age)의 현자들의 말과 생각을 빌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였다. 종교의 핵심은 깊은 수준에서 자신을 바꾸는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라고요. 그는 자신의 저서 <축의 시대>에서 “만일 붓다나 공자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면 아마 그들은 약간 망설인 다음 아주 정중하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라고 단언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선도적인 종교문제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는 이 학자는 심지어 이런 말도 합니다. “누가 이스라엘의 예언자 아모스나 에스겔에게 당신은 ‘유일신론자’냐고, 즉 오직 하나뿐인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면 그들 역시 당황했을 것이다. 유일신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유일신주의에 관한 분명한 주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흥미롭게도, 이런 교리적 명제 몇 가지를 목청 높여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외려 축의 시대의 핵심 정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축의 시대란, 일전에 이 코너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1883~1969)가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서 중심축을 이룬 시기라 하여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의 기간에 붙인 이름입니다.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 이스라엘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철학적 합리주의가 태동했고, 인류 영혼의 스승인 붓다와 소크라테스, 공자, 예레미아, ‘우파니샤드’의 신비주의자들, 맹자가 살았던 시대입니다. 축의 시대는 기록된 역사 가운데 지적으로나 심리적 철학적 종교적 변화가 가장 생산적으로 이뤄졌던 때로 암스트롱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근대를 창조한 ‘서구의 대전환’ 이전에는 이에 비길 만한 시대가 없을 것”이라 했습니다.
태초의 인류가 동굴 벽화를 남기며 자신들의 영적 지향을 더듬어 찾던 시기에서부터 최초의 종교로 불리는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한 저 위대한 축의 시대 스승들의 시기까지 되짚어보는 일은 그러므로, 종교의 기원에 대한 지적 고고학의 수준을 넘어 인간의 모든 삶의 단층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질되어 왔는지를 비교해볼 수 있는 근원적인 여정입니다. 암스트롱의 저서가 추구한 바가 그것이었는데, 그는 책의 부제를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이라 썼습니다.
축의 시대 스승들은 대부분 교리나 형이상학에는 무관심했다고 합니다. 어떤 현자들은 신학에 대한 논의조차 완강히 거부했고, 붓다 같은 이는 개인의 신학적인 믿음에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습니다. 종교에서 기대하는 절대적 확실성을 찾는 것이 미숙하고 비현실적이고 잘못된 태도라 주장하기도 했고요. 대신 그들은 인간 존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초월적 차원을 발견하고자 했고, 그것을 한두 마디 교리의 언어 안에 가두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 가르침은 내면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의 과정 속에, 흔히 우리가 도덕이라 부르고 공감이라 부르고 자비라고 부르는 가치의 실천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중심주의와 탐욕, 폭력과 무례를 벗어 던지려는 수행의 삶, 곧 모든 존재의 신성한 권리를 존중하는 친절한 삶, 관대한 세상이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핵심이었습니다.
축의 시대 이전, 종교적 탐구의 중심은 신의 체험이었고, 그 형식이 바로 제의(祭儀)와 희생이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원시 인류는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자연 현상 속에서 신의 존재를 찾았습니다. 비의 신이 있어야 했고, 해와 달의 신, 불의 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단 하나의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함께 조화하며 우주의 질서를 지탱하는 조화의 만신(萬神)이어야 했지요. 신들은 인간에게 그 질서에 순응하기를 요구했고, 성스러운 언어로 맹세하기를 요구했습니다.
고대 아리안 인에게 제의는 계절의 순환과 낮밤의 주기를 유지하느라 애쓴 신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한 그들의 정성이었습니다. 그들은 곡식을 거두고 가축을 잡아 신에게 먼저 바쳤고, 그렇게 성화(聖化)해야만 자신들이 죽인 짐승의 영혼이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으로 도살한-신에게 바치지 않고 잡은-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은 죄라 여겼던 것입니다. 어떤 존재든 생명을 빼앗는 것은 신의 섭리에 반하는, 그래서 두려운 행위였고, 오직 신이 허락한 음식을 신과 함께 나눠먹어야 했습니다. 제의에서 하는 말과 노래와 함께 나누는 음식도 신의 것이었고, 그 신이 몸과 영혼에 스며 그들의 존재는 다른 수준으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말을 길들여 이동수준으로 삼고, 수레를 달아 전차를 얻고, 청동 칼을 만드는 기술까지 배우게 된 아리안 유목민 가운데 일부가 이웃들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그 반경이 점차 넓어졌습니다. 그게 기원전 1500년 무렵이었죠. 신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어선 약탈과 살육이 자행되면서 신의 시대는 영웅의 시대로 전환했고, 신의 대리자가 아니라 용맹한 ‘고대의 카우보이’들이 부족의 지도자로 군림하게 됩니다.
신의 시대, 제의를 통해 신과 인간, 부족 간의 조화를 이끌던 사제 가운데 조로아스터라는 이가 있어 그 혼란을 종식시키고 평화와 조화의 옛 시대를 재현하고자 기치를 낸겁니다. 바로 기원전 1200년 경 탄생한 조로아스터교입니다. 그는 질서와 정의의 신들이 악한 신들과 대결해 승리할 것임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 새로운 시대의 약속 역시, 뜨거운 윤리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름다운 미래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단순한 선악 대결, 유혈의 전투적 믿음은 전란의 악화로 이어졌으니까요.
축의 시대 선지자들은 그 전란의 폐허 위에서 탄생합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비폭력과 생명 존중의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서 폭력의 원인을 찾아내고, 내면세계로 뚫고 들어가 인간 경험에서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던 영역을 탐사했습니다. 이름은 다르고 가지도 달랐지만 그들이 찾아낸 것은 한결 같이 자선과 자비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축의 시대의 핵심, 종교의 핵심입니다. 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자선과 자비의 가치이고, 믿음이 아니라 가치의 실천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편을 가르고, 종교적 동기로 증오하고 테러하는 불관용의 사례를 심심찮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주지 못하는 새로운 초월적 경험의 통로를 찾아 약물에 탐닉하는 이들도 있고, 근본주의라는 전투적 신앙심으로 무장한 채 새로운 폭력의 논리 속으로 퇴행하는 무리도 있습니다. 불화의 원인을 자신들의 편협하고 뒤틀린 종교관에서 찾지 않고 자신들과 동행하는 다른 종교의 존재에서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勢)의 확산을 위해 세속 정치의 힘을 구걸하기도 하고, 아예 세속 권력의 등에 업혀 나아가려는 행태도 보입니다. 그들이 외치는 믿음이란 권력에 대한 복종과 충성의 맹세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양상은 달라도 축의 시대 이전의 혼란이 그러했습니다.
암스트롱은 저 책에서 인류는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런 뒤 “축의 시대 현자들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자비의 윤리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늘 일깨워야 한다”고, “그들은 상아탑에서 명상한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찢긴 무시무시한 사회, 오랜 가치들이 사라져가는 사회에 살았다”고 썼습니다. 이 현실을 바꾸는 힘 역시 우리는 종교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자선과 관용의 실천윤리로서의 종교에서 말이지요. 그 첫 걸음이 스스로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