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
단국대 코리아리더십스쿨 주임교수
국제변호사
전 국회의원

10여 년 전 존경하는 정우 스님과 함께 인도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성지순례에 함께 나선 신도들에게 돈을 조금씩 나눠 주시면서 다시 그 돈을 거리에서 구걸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오라며 일종의 ‘보시 연습’을 시키시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여행의 경험을 글로 쓰면서 ‘인생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여행’이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으로 끝을 맺은 기억이 난다.
거리를 활보하는 소와 인간의 공존, 하루 종일 화장火葬이 이루어지는 갠지즈 강가에서 그 강물로 목욕하고 빨래하는 생生과 사死의 공존,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최첨단 IT기술 인력들을 배출하면서도 몇 시간이고 예고 없이 연착하는 기차를 군말 없이 기다리는 현대와 전통의 공존…. 인도여행은 내게 ‘인생’과 ‘공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를 던져준 귀한 선물이었다.
작년 초 우연한 기회에 라오스에 첫발을 디뎠다. 한국-라오스 간 첫 직항로를 통해서였다. 특별한 감흥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미지의 인도차이나 국가, 뉴욕타임즈가 추천한 세계최고의 여행지라는 선전 하나에 혹해 찾았던 라오스를 찾은 것이 그 후로 벌써 대여섯 번이 되어간다. 불교 전통과 어우러진 사회주의 체제, 베트남·인도네시아·태국 등 무섭게 뛰기 시작한 다른 아시아 나라들에 비해 아직은 한참 경제적으로 뒤처지지만 주변 어느 나라를 방문할 때보다 편안하고 안전한 사회 분위기, 외국인에겐 조금이라도 더 받아보려는 영악한 초보상술 속에서도 자기 볼 일을 보고 오는 손님을 차비 걱정도 없이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느긋이 믿고 기다리는 뚝뚝이(오토바이 대중교통)기사들의 여전한 순박함,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순하고 아름다운 자연…. 이런 라오스를 지켜보면서 “이 나라가 더 잘 살게 되길, 그러면서도 현재 사람들의 성품과 사회분위기를 잘 보존해가길…” 바라게 된다.
국민 개개인이 느끼는 행복감의 척도인 국민행복지수 조사에서, 유럽의 복지국가들(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등)과 함께 라오스를 포함한 가난하고 작은 나라들이 상위권을 점하는 흥미로운 부조화를 보면(우리 국민의 행복지수 석차는 늘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경제적 안정과 계층적 평등, 공동체적 배려의 따뜻한 사회분위기 모두 인간의 행복을 이루는 소중한 조건인 듯하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표적 관광지인 루앙프라방을 비롯해 라오스 곳곳에서는 아직도 매일 새벽 마을 곳곳에서 ‘탁발’이 이루어진다. 줄을 지어 거리를 도는 스님들에게 마을사람들이 밥과 음식을 바치고 스님들은 그 음식을 역시 거리에 있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나누어준다. 관광객들이 일찍 일어나 거리에 무릎을 꿇고 탁발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런 정경은 ‘불교국가로서의 국가적 사회복지 시스템’의 일환이기도 하고, 불교신자들에겐 라오스 여행을 성지순례 여행의 범주와 경험에 포함시킬 수 있는 나름의 이유가 된다.
내가 속한 NGO인 I共U(아이공유. 내가 당신과 어린이가 세상과 함께 나눈다는 뜻. 아이들에게 나눔의중요성과 실천을 경험시키는 나눔교육을 주로 한다.)에서는 얼마 전부터 라오스 어린이를 위한 책 보내기와 이동도서관 만들기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디자인해서 한 권에 천 원씩 파는 예쁜 노트(서울시청 지하에 있는 사회적기업제품 매장의 최고 인기상품이기도 하다.)의 모든 수익금이 그간 모두 라오스나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한글을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로 채택한)어린이들에게 책이나 노트를 보내는데 쓰여 졌다. 컴퓨터는커녕, 읽을 책 한 권도 구하기 어려운 아이들이 부지기수인 라오스에는, 그 노트의 속지에 라오스말로 된 이솝 우화를 실어 책 겸 노트로 쓸 수 있게 했다. 1불(천원)이면 한 권을 보낼 수 있는 책은, 교과서 한 권도 제대로 제공 못하는 학교가 상당수인 그 곳 아이들에겐 미래를 꿈꾸게 하는 귀한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사물에는 모두 양면성이 있듯이 우리나라에겐 경제발전의 기회가 되기도 한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바로 옆에 위치한 이 나라에겐 당시 사상 세계 최대 규모로 투하된 포탄 때문에 지금 이 순간까지도 들판에서 철없이 뛰노는 아이들이 팔다리가 잘리는 재앙으로 남아있다.
최근 라오스를 찾는 한국관광객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을 보며 좋은 여행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좋은 인생이 맑은 머리와 따뜻한 가슴으로 사는 것이라면, 좋은 여행이란 무엇이 좋은 세상인지 생각하고 배우고 나아가 좋은 것을 나누는 여행이 아닐까? 우리보다 어려운 이들이 많은 곳을 여행하고 돌아올 땐 그곳에 적어도 1불쯤은 기부하고 나누는 여유…. 아마 10여 년 전 인도여행에서 정우 스님이 보여주신 것도 결국 그 뜻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요사이 라오스에서 탁발을 구경하고 오는 모든 사람들이 라오스 아이들을 위해 책 한 권(1불)씩을 선물하고 오면 얼마나 멋질까 상상해보곤 한다.
아예 전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모든 한국인들이 그런 좋은 여행을 하나의 국민운동이자 문화로 정착시키면 어떨까? 여행의 마무리를 현지의 어려운 아이들에 대한 좋은 선물로 마무리하는 한국 관광객 한 사람 한 사람이야말로 소녀시대와 싸이 보다 더 멋진 진정한 한류스타일 것이다. 어쩌면 그 작은 선물은 세계화 시대, 나눔과 공유의 시대, 아시아 시대를 살아나갈 우리의 아이들에게 장래 어느 날 ‘대한민국의 선한 국가브랜드’라는 축복의 선물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세상일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처럼 큰 나라들의 압력에는 체질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북한이, 우리의 작은 정성으로 새로운 친구가 된 이른바 약소국 중 누군가의 중재로 우리와의 대화 테이블에 앉게 될 경우가 없으리라고 또 누가 장담할 것인가?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다.
달라이라마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던가? “돈은 자본주의적으로 벌되, 쓸 때는 사회주의적으로 쓰라”고.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공동체를 위해 약간의 까치밥쯤은 남겨두는 지혜는 원래 우리 선조들의 것이었다. 결국 좋은 나라, 좋은 사회, 좋은 정치, 좋은 인생, 좋은 종교, 좋은 여행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과 세상에 대한 치열한 공부와 함께 주변에 대한 따뜻한 나눔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리라.
무릇 인생 자체가 여행이 아닌가? 이제 우리도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여유가 생길 땐 기왕이면 많이 배우고 많이 나누는 좋은 여행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