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 스님은 『선문수경禪文手鏡』(신규탁 번역, 동국대학교출판부, 2012)이라는 책을 지어 선 관계 문헌을 읽는 이들에게 꼭 필요하고도 간편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에서 스님은 불교사에 등장하는 각종 선禪 수행을 제시하고, 그 중에서도 달마 조사(?∼495)께서 중국에 전한 ‘조사선’이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훌륭한 선 수행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 달마 조사께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무엇을 전하려했다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보통 ‘마음의 법[心法]’을 전하러 오셨다고 한다. 다른 말로 ‘열반묘심涅槃妙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마음의 법’은 ‘진공이면서도 묘한 상태로[眞空妙有]’ 작용하는데, 이것을 전하는 방식에 따라, 또 이것을 체험하는 방식에 따라, 상근기가 수행하는 ‘조사선’도 되고 하근기가 수행하는 ‘의리선’도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비유를 통해 세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상근기는 아무것도 안 새겨진 도장으로 허공에 도장을 찍듯이 ‘마음의 법’을 주고받고, 중근기는 아무것도 안 새겨진 도장으로 수면 위에 도장을 찍듯이 ‘마음의 법’을 주고받고, 하근기는 아무것도 안 새겨진 도장으로 진흙에 도장을 찍듯이 ‘마음의 법’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허공-수면-진흙으로 도장 찍는 재료를 나누어 제시하고 있다. 진흙에 도장을 찍으면 자욱이 남는다. 수면에는 물결이 잠시 일었다가는 다시 고요해진다. 그런데 허공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마음의 법’이란 중생들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하는 ‘청정한 마음’이다. 화엄교학에는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는 ‘일심一心’이라고 하고, 세계에 대해서 말할 때는 법계法界라고 한다. 한편 선종에는 부모가 날 낳아주기 이전의 본래면목이라고도 하고, 본지풍광이라고도 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 자리에서 체험되는 ‘열반’이 그것이다. 때로는 ‘열반묘심’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마음의 법[心法]’이다.

2.
그런데 위에서 말한 ‘마음의 법[心法]’은 ‘진공’이면서도 ‘묘유’의 상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대체 ‘진공과 묘유’가 무엇이기에, 이것을 흠결 없이 있는 그대로를 체험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이 ‘진공과 묘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백파의 선사상을 이해하는 출발점이자 도착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선문수경』에서 백파 선사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 진공眞空과 묘유妙有의 두 가지 속성[二義]은 모든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역시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안신입명安身立命하는 경지이다.”
즉, ‘진공과 묘유’라는 이 두 가지 ‘속성’이, 인간의 ‘본래면목’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사용한 ‘속성’이란 ‘본질에 소속된 성질’이라는 철학 일반의 의미이다. 그러면 ‘본질에 소속’된 성질 즉, 본성 속에 ‘진공과 묘유’라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면, ‘본질’이란 무엇을 지칭하는가? 이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백파 철학의 근본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백파 철학의 근본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필자의 고유한 주장이기도 하다. 즉, 필자는 기왕의 여러 저술 속에서 ‘간화선종’과 ‘화엄교학’ 그리고 ‘정토염불’이 조선과 중국과 일본 등 소위 ‘한자불교문화권’의 오랜 전통이 되어왔고, 이런 세 종류의 불교사상을 떠받치는 근본철학이 ‘법성철학’이라는 설을 주장해왔다.
‘법성(法性 dharmat.)’의 철학체계는 논서로는 『대승기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대승기신론』에 따르면 ‘일심’의 본질에는 ‘진여적인 요소[眞如門]’와 ‘생멸적인 요소[生滅門]’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진여적인 요소’는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속성이란 ‘인연을 따르는 속성[隨緣義]’과 ‘불변하는 속성[不變義]’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중생들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진여적 요소’에는 ‘인연을 따르는 속성’과 ‘불변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여라는 본질에 소속된 두 가지 속성이다.” 그런데 백파의 해석에 따르면 ‘인연을 따르는 속성’은 ‘묘유妙有’이고, ‘불변하는 속성’은 ‘진공眞空’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진공이면서도 묘하게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본래면목인데, ‘이것’을 훼손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 최고의 선禪 수행이라는 주장이다.
‘화엄교학’에서나 ‘간화참선’에나 궁극적인 목표는 ‘진여’를 손상시키거나 왜곡시키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각자가 ‘체험’하자는 데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물론 ‘염불정토’도 그렇다. 다만 다른 것은 그렇게 하기 위한 ‘방법’이 다를 뿐이다. ‘길’이 다를 뿐, 또는 ‘교통수단’이 다를 뿐, 가려는 ‘목적지’는 똑 같다.

3.
그러면 어떻게 하여 그것을 체험할 수 있을까? 몸이 그럴 수 있을까? 아니다. 마음의 작용이 없으면 육체로는 지각활동은 물론 인지활동도 불가능하다. 결국은 ‘마음의 작용에서’ 또는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진여’를 체험한다. 그런데 중생들의 ‘마음의 작용’ 속에는 ‘무명’과 ‘진여’가 ‘서로를 상호 포섭[相攝]’하고 있다. 법성의 철학에서는 두 관계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런 본질적인 마음의 구조로 인해서, ‘진여’가 움직이면, 그에 수반하여 ‘무명’도 따라서 움직인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의 작용’ 속에는 ‘진眞’과 ‘망妄’이 혼융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의 작용’으로 ‘진여’를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순환적 모순이 생긴다. 결국은 ‘무명’을 쉬게 해야 하는데, ‘무명’을 쉬게 하려는 것도 역시 ‘마음의 작용’이다. 무명을 쉰다는 표현으로 『대승기신론』에서는 ‘이념離念’ 즉, ‘무념無念’하라고 한다.
‘무념’이라는 용어 대신, ‘남종선’에서는 ‘무심無心’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면 어찌해야 그것이 가능해지는가? 그 방법의 모색에서 ‘간화참선’과 ‘화엄교학’은 서로 다른 길을 택하게 된다. 남종선은 송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무심’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화두’를 관찰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화두’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었지만, 『벽암록』이 만들어지던 북송 시대에 이르러서는 100칙則으로, 『무문관』이 만들어지던 남송 시대에는 48칙으로, 시대에 따라 선택적으로 다루어지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무자화두’ 하나로 집중되었다. ‘무자화두’를 관찰하는 방법을 통해서 일체의 사량분별을 쉬어, ‘무심’의 상태가 되면 ‘진여’만이 오롯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결국 백파의 주장에 따르면, 진여를 손상시키거나 왜곡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수행이다. 백파가 보기에 임제종의 간화선 가풍만이 그런 수행 전통을 계승하고 있고, 백파 자신도 그런 전통을 선양하겠다는 것이다. 백파 선사는 비록 ‘화엄의 종가집’에 태어났으면서도, ‘화엄교학’ 보다는 ‘간화참선’의 방법으로 무념·무심을 체험하려 했던 것이다.
백파 선사는 이렇게 화두 ‘참구’를 통한 ‘마음의 법[心法]’을 티 없이 체험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두의 내용을 설명하는 연구 또한 병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설화說話’이다. 화두의 유래와 교리학 배경 등을 합리적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다. 백판 선사가 전하는   ‘설화說話’의 방법은 고려 말의 진각 혜심 이래 조선을 거쳐 전수된 이 땅의 오랜 전통이다.   ‘설화說話’는 백파 특유의 용어로서, ‘간화看話’와 짝이 되는 용어이다. ‘설화說話’는 화두를 해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화두를 해설하는 전통은 이미 당대唐代에서 시작되어 송대宋代의 각종 송고문학頌古文學과 결합되어, 동북아시아 한자불교권의 긴 전통을 이루어 왔다. 추사가 상찬賞讚했다시피 ‘화엄종주華嚴宗主’ 백파는 ‘문장’이 능하고 ‘교학’이 밝으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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