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군종교구장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께서는 29세에 출가하셨습니다.
참 자유를 찾아 길손이 되셨지만, 부왕인 정반왕 등 가족들은 얼마나 마음에 아픔을 가지고
슬픈 날들을 보냈을까요.
사월초파일은 도솔천兜率天 내원궁內院宮에서 호명보살護明菩薩로 계시다가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중생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신 날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6년 동안 출가자의 길을 걸으시고 납월 팔일에 깨달음을 이루시어 불종자의 촉수를, 사바娑婆에 뿌리 내리게 하셨습니다.
성도成道 하신 후 45년 동안 전법傳法의 길은 우담바라화優曇婆羅花 꽃을 2월 보름, 열반에 드시며 불종자의 씨앗을 나누어 주신 날이기도 합니다.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遮那佛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이셨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면, 인생은 한 편의 꿈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인생이 꿈과 같음을 알면, 얽매이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 집착으로부터 미움이나 원망을 줄여나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모든 생명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연민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승가僧伽는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말합니다.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입니다. 그 승가의 중 승僧자를 보면, 사람 인人 변에 더할 증曾 자입니다. 승가공동체僧伽共同體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뭔가 더할 것이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을 표상적으로 그려 놓은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합니다.
프랑스의 석학은 ‘인간이란 자신의 삶을 만드는 존재다’라 하였습니다. 사람이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어간다는 것입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며, 자승자박自繩自縛입니다.
인간의 언행일치된 행위는 미래의 삶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행복幸福과 불행不幸은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으로 연결지어져 있는 것입니다.
대만 불교에 다녀왔습니다. 마음에 쏙 들어오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반야심경의 대의’를 묻습니다. 스승이 ‘공空’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는 ‘저는 다 비웠는데요.’ 제자의 이 말에 스승은 명쾌합니다. ‘공공空空’. 비웠다는 것까지 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만드는 게 인간이라면 인간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을 만드는 것은 생각이라 하였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그러니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을 잘 하고 살아야 합니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중에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곧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언행일치言行一致되는 행위가 곧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생각, 행위, 습관, 성격, 운명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성격이라고 하는 것을 불교적으로 살피면, 그것은 업業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훈습에 젖으면 고체화된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을 씨앗으로 심으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은 성격을 만들어 내고, 그 성격은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었으면 합니다.
소나무가 무성茂盛하면 잣나무도 기뻐한다는, 송무백열松茂柏悅이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있습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한 산중에서 잘 어울려 삽니다. 그러나 들판에 자라는 잡초와 난초는 서로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됩니다. 잡초가 무성한 곳에서는 난초가 못 삽니다. 난초를 아끼고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잡초는 결국 뽑히고 말 것입니다. 잔디를 가꿔본 경험은 알게 합니다.
잔디를 키우는 곳에 잡초가 있다면 주인은 바로 잡초를 뽑아낼 것입니다.
소나무와 잣나무, 난초와 잡초…,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어떤 어울림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가르침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방편方便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구룡사와 여래사, 각 포교당에서 부처님 출가재일에서 열반일까지 경건주간으로 한자리에 모여 수행정진 하는 법석이 바로 송무백열이 아닌가 싶습니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이면 천재보千載寶입니다. 일심으로 마음을 닦으면 천년을 덮고도 남을 복덕혜福德慧를 구족具足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닦는 훈련을 하는 활동력을 가져야 합니다.
청년 시절 석주 노스님께 ‘스님, 참 수행은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하심하고 인욕
하는 것이 수행이다’ 하셨습니다.
내려놓고 선근과 지혜로 바른 삶이 되도록 수행 정진하는 삶을 출가재일로부터 열반재일까지
일주일간만이라도 정진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숨 거둠도, 병들어 신음하는 그 모습까지도, 인간적으로 닮아 가려하는 수행덕목을 키우고자 노력하는 실천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난다야, 나는 이제까지 모든 법을 다 가르쳤다. 법을 가르치는데 인색해본 적이 없다. 이제 나는 늙고 기운도 쇄했다. 내 나이 여든이다. 낡아빠진 수레가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내 몸도 겨우 움직이고 있다.
요즘의 세상은 특허 내놓고 공유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알면 독창적인 무엇을 하는 것처럼, 자기 혼자만 가지려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모든 대중들에게 근기에 따라 평등하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45년 동안 가르침을 펴셨던 부처님께서는 겨우 몸을 움직일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셨습니다.
누구에게도 인색해 본 적이 없는 부처님이셨는데, 늙고 기운이 없음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낡은 수레가 근근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몸이 그렇게 되었다고 제자들에게 전하십니다. 평생 동안 최선을 다해서 대중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오셨던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부처님은 아난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자 이렇게 슬픔을 달래주십니다.
아난다야, 울지 말아라. 가까운 사람과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인연이다. 한 번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기 마련이다.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아난다야, 너는 그동안 나를 위해 수고가 많았다.
내가 떠나간 뒤에도 더욱 정진해서 성인의길(八正道)에 오르도록 노력해라.
부처님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그 가르침을 등불로 삼아서 나아가라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내가 떠남을 보고 죽음으로 알지 마라.
열반은 죽음이 아니다. 이 가르침대로 살아가면 설사 네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는 항상
나와 함께 하는 이요, 이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설혹 나와 함께 있더라도 그림자와
발자국처럼 함께 하여도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다름없느니라.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육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쩔 수없는 일이다. 여래如來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여기에서 떠나더라도(죽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내가
떠난 후에,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나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물질은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람이 떠나면 죽는 것이요, 불기운이 떠나면 병든
것이요, 물 기운이 떠나면 늙는 것이요, 흙 기운이 떠나면 본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안 죽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요, 어리석음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에 드시면서 우리에게 설하신 마지막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