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고타마 붓다는 설하셨네.
그것은 논리와 이성을 통한 마음의 법.
거친 무아에 의한 세상의 고귀한 진실이라네.
지혜의 완전한 성질 그것은 붓다의 본성.
실상을 바로 보는 자만이 무지의 포로에서 해방될 수 있다네.
-달라이라마의 사성제 중에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극히 귀의함에 대한 대가로 붓다의 손이 당신의 죄를 씻어 줄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붓다는 스스로 체득한 정법을 통해 실상을 증명하셨습니다. 인간의 삶을 들여다봅시다. 무언가 현란하고 아름답다 여기며 집착하는 대상에 대해 탐욕을 부리고 그것이 나의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때에는 분노를 일으킵니다. 사람의 감정 변화를 평생 연구했던 아론백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의 혼란스런 마음은 당사자의 감정에 의한 것’이라는 이론이 그것입니다. 불교에서 탐내고 성내며 어리석은 세 가지 독의 번뇌가 대상을 왜곡하고 분별하게 한다는 논리와 상당부분 통하는 이론입니다.
현대 과학의 양자물리학은 고유한 성품의 실체는 있지 않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생겨난 불교는 번뇌의 실체를 분석하였습니다. 붓다는 사성제의 본질과 작용을 분석하여 원인과 결과의 법칙인 연기법을 발견하였습니다. 왜곡된 분별을 끊었을 때 더 이상의 탐 진 치는 생하지 않음을 논하고 있습니다.
왜곡된 분별은 실집을 통해 발생합니다. 내가 보는 것과 내게 보여지는 바가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실집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양자물리학자의 본래 실제하는 고유한 성품은 있지 않다는 이론과 통하는 부분입니다. 근거와 타당한 논리로서 사상을 뒷받침하는 것이 불교의 논리학입니다.
인간의 생은 어머니의 자궁을 빌어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통해 성장한 아이의 본래 성품은 선합니다. 이는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자연의 섭리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지구상의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살육이 야기하는 파장을 심각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 스스로는 항시 탐진치에 얽매이는 고집된 마음이 허물임을 알아차리는 마음 챙김을 훈련해야 합니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내면의 교육이 절심함을 느낍니다. 종교의 경계를 넘어 사랑과 연민을 기반으로 하는 세속적인 윤리가 보편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 인류가 되는 길을 고민합니다.
중관학의 선지식 용수보살께서 설하신 업과 번뇌의 논리에 주목해 봅시다. 용수보살은 업과 번뇌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 희론이라 하였습니다. 왜곡된 번뇌를 멸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막연한 기도와 같은 행위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대상이 내가 보는 바와 같이 존재하지 않음을 탐구할 때에만 비로소 존재의 실제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업과 번뇌를 여의면 그 자리가 해탈입니다. 희론은 오직 공성으로만 제거될 수 있습니다. 거대한 불상이 모셔진 화려한 법당에서 믿음을 일으켰다고 해서 불교도가 아닙니다. 붓다의 말씀과 선지식의 논리에 대한 타당성을 스스로 정립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21세기의 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붓다는 사성제에 근거한 중전법륜에서 무상 무아 그리고 고를 보다 면밀히 논하였습니다. 그리고 삼전법륜에서는 의타기성 변계소집성 그리고 원성실성으로써 무자성의 실상을 확립하였습니다.
삶에 필요한 법이란 무엇일까요. 이 자리에서 법을 설하는 여든이 넘은 노장 달라이라마는 붓다의 법과 사상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오늘날 불교를 논하는 이들은 법사가 아닌 사상가로 호칭을 바꾸는 것이 현세적인 윤리에 근거하여 보다 바람직하다고 보여 집니다. 지금의 시대는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불교는 마음을 살피고 해명하는 논리학에 더 가깝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빈번한 예로, 내 앞에서 화를 일으키는 이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일으키는 마음의 감정변화는 불교의 인명학으로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변화를 치유하는 치료제가 있어 그것을 필요로 하는 대상에게 적제적소에 쓰이도록 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면 불교가 특효약입니다.
붓다의 법과 그 법을 이어 수행한 선지식 그리고 그 법을 따르는 승가 공동체와 재가 불자는 붓다의 근본 법어를 삶의 중심축으로 삼아야 합니다. 티베트에서는 과거 600여 년 동안 티베트력 새해 보름날이 되면 붓다의 본생담을 설하는 야단법석의 축제를 열어왔습니다. 본생담에서 일컫기를 붓다께서 전생에 현명한 토끼였던 때에도 보름날이 되면 자자를 통해 계율을 지키고 보시를 할 것을 당부하여 그에 따르는 큰 과보가 있음을 일깨웠노라고 이르고 있습니다. 붓다도 한 때에 인간과 같은 범부이셨습니다. 본생담은 그러한 붓다의 전생 이야기를 통해 수행의 근기를 다독이는 용기와 신심을 불러일으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