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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放逸)하지 않는 삶이 수행정진이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개인적으로 꽃 중에 매화를 좋아해서인지, 지난해 통도사(通度寺) 산림정비를 하면서 도량에 매화나무를 많이 심어두었습니다. 그렇게 매화나무를 심어놓았지만, 매화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도량을 따라 흐르는 개울가에 얼음이 녹는 소리가 들리면서부터 매화에 대한 걱정에 한동안 밤잠을 설치게 한 적이 있습니다. 포근했던 날씨가 갑자기 심술이라도 부리면 몇 개의 꽃잎이 떨어졌을까, 또 날씨가 좋아지면 몇 개의 꽃잎이 새로 활짝 피었을까…. 매화는 음지이건 양지이건 때가 되면 반드시 꽃망울을 터트린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밤잠까지 설친 것을 보면 매화에 대한 애착이 매화에 대한 믿음보다도 강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밤잠까지 설치다보니 한편으로는 내가 매화에 대한 소유욕(所有慾)에 빠져 지나치게 집착(執着)하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뇌망상(煩惱妄想)으로 인해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것도 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고, 환희법열(歡喜法悅)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내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정진에 더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정진을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방일(放逸)하지 않는 삶 입니다.
물질의 세계에서 사대육신(四大六身)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모든 사물이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네 가지 현상인 생주이멸(生住異滅)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우주의 모습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왕자의 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출가한 연유는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그 숙제를 풀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게으르지 않고 수행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열반에 드는 순간까지 단 한 순간의 흐트러짐도 없이 사셨습니다. 그것이 수행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방일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현상을 다음의 13가지 형태로 지적하시면서 수행정진을 당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지적하신 방일한 사람은 첫째, 늘 자기 좋을 대로 살기를 원하고 둘째, 쓸데없는 말이나 불필요한 말을 하기 좋아하며 셋째, 오래 잠자는 것을 좋아하고 넷째, 세상일을 말하기 좋아하며 다섯째, 나쁜 벗을 가까이 하기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게을러서 행동이 느리고 일곱째, 다른 사람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며 여덟째, 아무리 많이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아홉째, 늘 변방에 있기를 좋아하며 열째, 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가 따로 놀아서 조복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또 열한 번째는 음식의 만족함을 모르고, 열두 번째는 고요하고 적적한 곳을 좋아하지 않으며, 열세 번째는 소견이 바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방일한 사람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 한다 하더라도 이런 허물로 인해 선근이 드러날 수가 없고 지혜가 생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방일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부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고 출가를 하셨으며 고행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얻으시고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45년 동안 함께 더불어 법을 설하셨던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설하셨던 그 법이 2600여 년 동안 조사스님들을 통해 오늘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불자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치를 알고 그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방일한 사람은 수행정진을 통해 조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의 속담에 빗대어 헛수고 한다고 오히려 비웃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혹 밑 빠진 독에다 물을 붓는 헛수고를 하는 경우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 독에 콩나물 콩을 넣어두고 물을 붓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스스럼없이 세상을 살아도 그를 허물이 있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헛수를 한다고 비웃는 것 입니다.

방일한 사람은 사찰에서 행하는 기도와 법회에는 참여도 하지 않으면서 밑 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헛수고만 한다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지혜 있는 사람은 기도와 법회에 참석을 하고 당장 원하는 바가 성취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도와 법회에 참석하는 것이 밑 빠진 독에 넣어 둔 콩나물콩의 역할을 한다는 이치를 알고 있습니다. 그 기도가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기도를 통해 지혜가 증장되어 지면 그 지혜의 힘으로 삼악도(三惡道)에서 받을 중대한 업을 이 세상에서 가볍게 받기도 하고 또 그 업이 쌓여 선업의 씨앗이 된다는 이치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惡因惡果)라고 했습니다. 착하게 살면 결과가 좋고 악하게 살면 결과가 나쁘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치지만, 시기와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 반드시 그 진리대로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불자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메일의 요지는 불교의 인과법칙(因果法則)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위에 보면 세상을 험하게 살고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사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되고 호의호식하면서 살아가는데, 법 없이도 살아갈 것같이 착하게 살고 있는 자기 남편은 하는 일마다 안 되고 남에게 속고 시달리며 그로인해 고통 속에서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가족을 위해 절에 나가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도 자신의 삶은 힘들고 고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인과를 못 믿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보살은 세상을 지혜의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살펴보십시오. 남 힘들게 하고 남의 고통을 딛고 일어서서 떵떵거리는 것이 진정으로 성공하는 것이겠습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상모략(中傷謀略)하고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써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입니까?
인과를 믿고 윤회(輪廻)를 부정하지 않는 불자라면 금생의 업, 과거 생에 지은 자신의 그 업도 살 필 수 있어야 합니다. 금생에 갚을 준비를 하고 하나씩 갚아 나아가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보살도(菩薩道)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남에게 빌려준 것과 남으로부터 빌린 것 중 무엇을 더 오래 기억하는지’를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빌려준 것을 오래 기억한다고 합니다. 중생심으로는 그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남에게 신세진 것을, 은혜 입은 것을, 도움 받은 것을 더 오래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방일하지 않고 늘 부지런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늘 기쁜 마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修行)이고 정진(精進)입니다. 그렇게 수행정진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 수가 있고, 그로 인해 반야지혜와 바른 소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선정삼매가 무엇입니까?
건강한 몸과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선정삼매입니다.
요즘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너무 바쁘게들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너무 분주하게 살다 보니 앞 뒤 분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분주함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 알코올 등에 의지하여 일시적인 쾌락에 빠져드는 유혹에 젖어들기가 쉽습니다. 그러다보면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혼동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혼자만의 공간속으로 빠져들어 고독(孤獨)을 즐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들이 선정삼매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혼자만의 공간에 빠져들어 고독을 즐기는 것과 선정삼매에 드는 것과는 극 대 극, 즉 180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해 통도사에서 화엄산림을 할 때 한 스님이 법문 중에‘고독’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고는 고아원 고요, 독은 독거노인 독’이라고 설명하는 말을 듣고 혼자서 웃은 기억이 있습니다.
고아원이라는 단어를 연상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모형제를 잃고 무주공산에 내팽개쳐진 것처럼 의지할 데가 없는 어린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곳을 떠올릴 것입니다. 또 독거노인이라는 단어도 자식이 없고 거주지도 없으며 따르는 사람 또한 없고 자기가 살펴야 할 사람이 없는 노인을 떠올릴 것 입니다. 그 스님의 말을 빌리자면 고아원과 독거노인이라는 단어로 연상되는 말이 바로 고독이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냥 예사로 넘길 수 있는 이야기였는데도 나는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선정삼매를 부지런히 닦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요하고 적적한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선정삼매인 것입니다. 방일




하게 드러누워서 내 몸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좌선(坐禪)하는 모습과 자세를 갖추고 하루에 단 5분이라도, 좀 더 신심을 낸다면 한 시간이라도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선정이요, 그것이 삼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수행이 반야지혜로 드러날 때 그 사람은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안목이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영원하지 못한 것은 영원 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대가 크면 클수록 상처도 커서 도드라진다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선정삼매라는 수행법을 통해서 반야지혜가 드러나게 되면 그 사람은 세상을 100년을 살든, 50년을 살든, 사는 그 동안은 여한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부지런히 살 것이고 넉넉하게 살 것이며, 여유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중생심의 마음으로 보면 사람은 누구나 영원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았다는 것을 알면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절망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정삼매에 들어서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은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짧은 시간, 짧은 인생, 짧은 삶의 현장에서 그나마 지금부터라도 가까이 있는 가족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를 하면서 어울림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당장 내일 생을 마치고 이 세상을 떠난다한들 떠난 것이 아닌 삶이 될 것 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방일한 인생을 살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들과 함께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선정삼매에 들어가는 첫 문이요 반야지혜를 증장해가는 관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E-mail : venjungwoo@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