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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복적인 혼란, 무지(無知)







  달라이 라마
  티벳 승왕



‘무지(無知)’즉, 근본적인 혼란을 싼쓰끄리뜨로는 아비디야(avidya)라고 하며,‘ 알지못함’을 뜻합니다. 아비디야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즉, 불교의 근본교리인‘무아론(無我論)’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여러 학파들은 아비디야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학파는 공통적으로, 우리 존재의 밑바탕에는 근본적인 무지가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 행복을 염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압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행동은 자꾸만 자기 자신을 고통으로 이끌어갈 뿐, 영원한 기쁨이나 행복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바로 우리가 무지의 틀에 갇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밑바탕에는 근본적 혼란 즉, 무지가 있습니다.

불교에 의하면, 윤회 속의 여섯 세계속에서 생명체가 겪는 고통을 하나하나 고찰하는 것도 고통의 본질을 고찰하는 한 방법입니다. 여섯 세계란 지옥, 짐승세계, 배고픈 귀신들의 세계, 인간 세계, 반신(半神), 신(神)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런 세계들에 대해 숙고해 본 사람들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경우엔 우선 우리 인간의 고통을 고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육도윤회를 하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가르치지만, 사실 인간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게 기쁜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게다가, 삶은 무지와 무지가 일으킨 번뇌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저와 같은 보통 사람들 에겐 다른 세계의 고통을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세계의 고통을 깨닫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불교경전에서는, 무지가 의지적인 행동을 일으키고, 의지적 행동으로 말미 암아 윤회 세계 속에 태어나게 된다는 인과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윤회 세계 속에 태어나게 된다는 인과적 진행과정을‘십이연기법(의존적 발생의 열두가지 연쇄고리)’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결과로서 일어난다.
이것이 생겨났기 때문에 저것도 생겨난다.
근본적인 무지가 있기 때문에 의지적인 행동이 생겨난다.



아상가(無着) 스님은 <지식의 집성서>에서, 어떤 것이 생겨날 때는 세 가지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주석을 붙였습니다. 앞의 말씀을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 같으니 약간 설명을 붙이겠습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결과로서 일어난다.


모든 현상들은 원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 첫번째 말씀의 의미라고 아상가 스님은 말했습니다. 무한한 인과적 연쇄가 있다고 말해도 되겠지요. 그러나 제 1원인이라든가 태초에 모든 것이 그것 으로부터 생겨난‘시작점’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상가 스님은 이 말씀이‘원인이 존재한다는 조건’을 가리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생겨났기 때문에 저것도 생겨났다.
아상가 스님은 두번째 말씀을‘무상(無常)이라는 조건’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것이 단지 존재하기만 하면 원인으로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결과를 생산할 잠재력을 가진 것들은 그것들 자체가 인과법칙을 따랐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