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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본분 잃지 않는 지혜로운 불자로 거듭나는 부처님오신날





  정우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인류(人類)의 영원한 스승이신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중생(衆生)을 구제하시기 위해 몸을 나투신 사월초파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사찰에서는 부처님께 공양(供養) 올릴 연등(煙燈)을 만드는 등 부처님오신날까지 하루하루를 설레는 마음으로 보내곤 합니다.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에 자비(慈悲)와 평등(平等)의 세상(世上)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몸을 나투신 거룩하신 성자(聖者)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설레임과 희망으로 불기 2553년 부처님오신날을 준비하고 있는 모든 불자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다고 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모습일까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불자(佛子)들이여, 선지식(善知識)이라 함은 부처님과 보살(菩薩)과 벽지불(僻支佛)과 성문(聲聞)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이니라. 어찌해서 선지식이라 하는가. 선지식은 중생들을 교화(敎化)하여 열 가지 나쁜 짓을 여의고 열 가지 선업을 닦게 하나니,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또한 선지식은 법대로 말하고 말 한대로 행하느니라. 어떤 것을 법대로 말하고 말 한대로 행한다 하는가. 스스로 살생(殺生)하지 아니하고, 다른 이로 하여금 살생하지 않게 하며, 스스로 바른 소견(所見)을 행하고, 다른 이에게 바른 소견을 가르치나니, 만일 이렇게 하는 이는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스스로 보리(菩提)를 닦고, 다른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닦게 하나니,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스스로 믿음과 계율(戒律)과 보시(布施)와 많이 아는 것과 지혜(智慧)를 닦아 행하고, 다른 이로 하여금 믿고 계율을 가지고 보시하고 많이 알고 지혜를 닦게 하나니,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이처럼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에서는 선지식을 「스스로 10악업(十惡業)을 짓지 아니하고 10선업(十善業)을 닦으며 법대로 말하고 말 한대로 행하는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10선업이라는 것은 신의 삼업(身意 三業)으로 짓는 일들입니다. 즉 몸으로 짓는 업인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 입으로 짓는 업인 망어(妄語)기어(綺語)양설(兩舌)악구(惡口), 마음으로 짓는 업인 탐애(貪愛)진애(瞋碍)치암(癡暗)의 업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10선업은 무엇이겠습니까? 살생하지 아니하고 방생(放生)하고, 남의 물건 훔치지 아니하고 베풀며, 사음하지 아니하고 청정(淸淨)함을 드러내고, 망어기어양설악구하지 아니하고 진실된 말을 하고, 실다운 말을 하고, 말같은 말을 하고, 미친 소리 하지 않고, 여기 가서 이 말하고 저기 가서 저 말하지 않으며, 탐욕(貪慾)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여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계혜 삼학(戒慧 三學)의 계율을 지키고, 선정(禪定)에 들면 반야지혜(般若智慧)가 드러나게 되는데, 우리 불자들이 10악업을 짓지 아니하고 10선업을 닦아가는 과정이 바로 보살계수계산림(菩薩戒受戒山林)입니다.


서양의 발명가 슈바이쳐 박사의 「수행론」이라는 책에도 보면 󰡐나는 한 잎사귀라도 의미 없이는 뜯지 않았다. 한 포기의 들꽃도 함부로 꺾지 않았다. 벌레도 함부로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 했다. 여름날 램프 밑에서 일할 때 많은 날벌레들이 날아와서 그 램프에 타고 책상에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 보다는 차라리 무더운 여름이지만 창문을 닫고 답답한 공기를 호흡할지언정 나는 작은 날벌레라도 함부로 죽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자비관(慈悲觀)입니다. 나 자신보다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자비심(慈悲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불교를 믿는 우리 불자들이 그러한 삶의 자세와 행동을 갖지 못한다면 될 일이겠습니까? 불교라는 게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내는 것이 곧 불심(佛心)이고 그런 마음자세를 갖는 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대반열반경》에서도 그와 같은 가르침을 통해서 그와 같이 살려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모든 불보살님들과 성문이나 연각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이들까지도 선지식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계속하여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불자들이여, 선지식이라 함은 선한 법이 있는 까닭이니, 무엇을 선한 법이라 하는가. 짓는 일이 스스로 즐겁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항상 중생을 위하여 안락(安樂)을 구하며, 다른 이의 허물을 보고도 단점(短點)을 말하지 않고 입으로는 선한 일만 말하나니,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 하느니라. 불자들아, 허공에 있는 달이 초하룻날부터 보름날까지는 점점 자라나나니, 선지식도 그와 같아서 배우는 이로 하여금 나쁜 법은 멀리하고 선한 법은 자라나게 하느니라. 불자들아, 선지식을 친히 가까이 하는 이는 본래 계행(戒行)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와 해탈(解脫)과 해탈한 지견(知見)이 없었더라도 문득 있게 되며, 구족(具足)하지 못한 이는 구족하게 되나니, 왜냐하면 선지식을 친히 가까이 하는 까닭이며, 친근함을 인하여 12부경(十二部經)의 깊고 오묘한 이치를 알게 되기 때문이니라.』


 


서울 구룡사(九龍寺)를 창건한 이후 수십년간 여러 사찰을 창건하고 오랫동안 주지(住持) 소임(所任)을 살아오면서 그 경험으로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있습니다.


「검은 개꼬리 눈밭에 천년만년 묻어 놓았다고 하여 검은 개꼬리가 흰 개꼬리 안 된다.」


즉 본성(本性)을 바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성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겉모습만 바꾸려고 아무리 노력한들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진실(眞實)한 선지식은 보살과 부처님이신데 그 이유는 항상 세 가지로 잘 제어(制御)하는 까닭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가다 보면 마지막 톨게이트의 내리막길에 모래성을 쌓아놓은 곳이 있습니다. 내리막길에서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났을 때 들이받으라고 쌓아놓은 제어장치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선지식으로 가는 길에서 탈선을 하려고 할 때의 제어장치로 무엇을 제시하셨는가하면, 첫째는 끝까지 부드러운 말이요, 둘째는 끝까지 꾸짖음이요, 셋째는 끝까지 부드러운 말로 꾸짖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름이 뼈에 사무치면 골수염이나 골수암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진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치료를 하게 되는데, 치료를 하려는 그 마음이 바로 제어하려는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고위직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에게 한 말씀 해 달라고 해서 󰡐직위가 높으면 아랫사람이 잘못을 할 때 꾸짖고 화를 내라. 변명하지 마라. 나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면 안 된다. 혼을 낼 일이 있으면 혼을 내되 속까지 뒤집히지는 말아라.󰡑라고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화를 내다보면 나중에는 그 화가 자기한테 미쳐서 결국 자기의 속이 뒤집히게 마련입니다. 부부지간에도 다투다 보면 별일이 아닌 것으로도 대책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속까지 뒤집혔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잘못했을 때 꾸짖을 수 있고 남편이 잘못했을 때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까지 뒤집게 되면 자칫 생사(生死)까지 오락가락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진실한 선지식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정직한 사람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진실입니다. 즉 정직과 성실의 합성어(合成語)가 진실입니다.


이와 같은 진실한 마음으로 선지식을 가까이 하는 이는 본래가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오분향지견(五分香知見)이 없었더라도, 불을 한 번 켜면 천년만년 어둠에 쌓였던 동굴이라 할지라도 일순간에 환해지듯이 본래 계행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한 지견이 없었더라도 문득 있게 되며, 구족하지 못한 이는 구족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남이 나에게 주는 것을 받는 일은 기쁘지만, 내가 남에게 주는 일은 즐겁습니다.


여기서 기쁜 것은 씨앗이고 즐거운 것은 열매입니다. 씨앗과 열매는 얼핏 같아 보이지만, 같지가 않습니다. 열매를 따서 종자를 삼으면 씨앗이지만, 열매는 열매인 것입니다. 현상으로 보면 열매를 따서 씨앗을 삼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수고로움이 필요합니다. 땅이 필요하고 햇빛이 필요하고 거름이 필요하고 농부의 수고로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수행정진(修行精進)이라고 이름하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월초파일을 준비하면서 더 특별하게 기도정진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 기간 동안 각자의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 스스럼없이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기의 본분을 잊지 않는 지혜로운 불자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