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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공덕을 여쭙다

정승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교수


“부처님, 매년 당신이 오신 날이라는 음력 초파일이면 전국의 사찰은 연등의 은은한 빛이 장엄을 이루고, 수많은 신자들이 당신께 연등으로 공양하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부처님도 이런 장엄과 신심에 흐뭇하시겠지요?”


붓다: “그대는 어떤가요? 진심으로 기쁘고 흡족합니까?”


 


“저야 물론 좋습니다. 화창한 봄날과 어울려 보기에도 얼마나 좋습니까. 다들 분주하게 살다가 하루라도 그런 기회에 마음이 좀 맑아지지 않겠습니까?”


붓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모두가 그렇게 느끼는 만큼 나도 흐뭇하답니다.”


 


“장엄해서 흐뭇하신 겁니까, 신자들이 많아서 흐뭇하신 겁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부처님께서 바라는 진실한 마음으로 공양하는 것은 아닐 터인데요.”


붓다: “내가 바라는 진실한 마음이라…. 그대는 그런 진실이 무언지 알고 있는가요?”


 


“그렇게 되물으시면 저도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냥 한 가지만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부처님은 탐욕을 물리치고 청정한 마음을 닦아 자비심을 베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신자들이 그런 가르침을 받들어 공양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기들이 얻게 될 복을 곧 공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공덕이란 자신의 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이롭게 하는 선행에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런 선행은 탐욕이 없는 청정한 마음에서 가능합니다.”


붓다: “그대는 결국 공덕에 대해서 묻고 싶은 거로군요. 그대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나의 의중에 잘 들어맞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나는 자신의 복을 구하는 것은 공덕이 될 수 없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실은 처음부터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고 나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이 공덕이었답니다. 물론 그대도 느끼고 있듯이 모두들 자신의 복을 구하는 것이었지요. 나는 그런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고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아마 내게 오기 전에는 5계 중의 한두 가지는 범하기도 했을 것이고 사소한 악행도 저질렀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내게 와서 복을 기원할 때, 난 그들의 착한 심성을 볼 수 있습니다. 내게서 돌아서면 그 심성이 다시 오염될 수는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심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일시에 바뀌기는 어렵습니다. 나를 자주 찾다보면 복은 착한 심성과 함께 온다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착한 심성을 발현하는 것으로 복을 얻게 될 때, 이것은 결국 공덕이 되지요. 공덕은 부처인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쌓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공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저마다 자신에게 공양하는 것이고, 자신의 착한 심성에 공양하는 것이랍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흐뭇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은 중생을 과대평가하시는 건 아닌지요? 제가 생각하기로 절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신자들 중 ‘자신의 착한 심성에 공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요. 더욱이 부처님은 고통의 근원은 무명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붓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대야말로 내 말을 너무 심오하게만 이해하려 하지 않나요? 내가 말한 무명이란 말 그대로 어둠에 갇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착한 심성을 모르고 있고, 바로 그 착한 심성에 공양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무명이랍니다.”


 


“이런 기회에 여쭙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이왕 말씀이 나온김에 한 가지만이라도 확실히 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처님 말씀으로 보면 ‘착한 심성’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될 듯합니다. 그렇다면 ‘착한 심성’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착한 심성’으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공덕은 극락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어도 됩니까?”


붓다: “그대는 이미 ‘착한 심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뜻을 전하려 애쓴 사람들은 그것을 불성(佛性)이라고 말했고, 그대는 이미 ‘탐욕이 없는 청정한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착한 심성이란 탐욕을 부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탐(貪), 진(瞋), 치(癡)가 세 가지 독소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셋이 서로 통하는 하나랍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그런 독소에 중독되어 있다고 보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중생이 모두 탐욕을 떠난 ‘착한 심성’을 불성으로 갖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붓다: “모든 중생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자연과 조화하면 탐욕을 부리지 않고도 살 수 있게 태어났습니다. 나는 그렇게 깨달았고, 이후로는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부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청정한 마음이고 착한 심성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까 말한 세 가지 독소에 곧장 중독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중독은 자신의 탓이 아닙니다. 가정, 사회, 국가가 그렇게 중독시킵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이 중독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자신의 중독 증상을 알아야 하겠지요. 그 다음에는 중독을 해소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닦는 것이고 곧 수행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왠 수행법이 그리 많은지요? 하지만 당장은 그런 착한 심성이나 수행으로 얻게 될 최상의 공덕이 더 궁금합니다. 극락이 정말 있기나 한가요? 있다면 어디가 극락인지요?”


붓다: “자신의 청정한 마음을 깨닫는 노력이 있다면, 수행법은 그것으로 족합니다. 극락이 궁금합니까? 모두들 공덕을 쌓아 극락에 태어나고 싶어 하지요. 극락이 딴 세계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큼 도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궁금증에 대해서는 나를 대신해 답해 준 사람이 있답니다. 예전에 일본의 한학자인 모로하시 데츠지 선생이 나를 공자님과 노자님과 함께 담화의 자리에 초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의 나이가 100세나 된지라 나도 흔쾌히 승락했답니다. 이 자리에서도 오늘과 비슷한 얘기가 오갔는데, 모로하시 선생은 나의 생각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아무쪼록 내 뜻을 깊이 새겨 모두가 극락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지옥과 극락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기다리지 않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도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일이 매우 즐겁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극락이 아닙니까? 그와 반대로 악한 일을 하고 그 결과를 두려워하며 밤낮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비록 살아 있다 해도 그것이 바로 지옥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