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연
시인
* 엎드려 가르침을 청하옵나니 지혜를 설하여 주시옵소서. 가정을 이루고 산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직장을 다니고, 자식을 키우고, 부모님을 봉양하며 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두려움과 걱정이 끊이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들 간에도 늘 갈등이 일어나 괴로움이 많습니다. 과연 이게 사는 것인가, 인생은 짧은 것인데 내게 여여한 삶이란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부처님께서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귀영화가 가득한 궁도 떠나셨듯이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맘처럼 쉽지 않으니 만약 부처님께서 출가하시지 않고 저처럼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신다면 가정의 행복과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 무엇에 가장 힘을 기울이시며 사시겠습니까?
 
- 살면서 어느 시점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제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과연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묻고는 짧은 인생을 하고 싶은 것도 실컷 하지 못하고 그저 세상사와 가정사에 시달려 살아왔다고 불만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인생이 짧다, 길다는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때로는 같이, 때로는 분리되어 고통을 받고, 세상사니 가정사니 하는 걸 괴로움으로 여기고 있는 그 자체에 스스로 갇혀 있는 게 문제일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또한 따지고 보면 어떤 것이 고통이고, 괴로움인지도 모른 채 괴롭다는 게 문제일 것입니다. 몸의 고통을 마음으로 받지 않고, 마음의 고통을 몸의 고통으로 삼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유한한 인생을 허무에 갇혀 욕심만 부리며 사느냐,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삶을 아름답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마음으로 느끼는 고통만 호소하는 건 회충이 내장에 꿈틀대는데 가려운 피부만 긁적이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평범하게 가정을 지키지 않고 왕자의 몸으로 왕궁을 나와 출가의 길을 간 것은 갑자기 홀로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거나 홀로 강해지기를 바라는 의도가 아니라 오로지 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세상을 더 이해하고 더 훌륭하게 평화로워지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 순간의 감정적 발단이나 현실적 번뇌에서 도피하고자 한 수단이 아니라 수 억겁 쌓아 온 업으로 얻어진 인연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직 부처가 될 인연이 닿지 않아 왕궁에서 가정을 꾸리고 백성을 위해 살아가야했다면 가족과 백성을 더 이해하고 이들과 더불어 더 훌륭하게 평화로워지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걸 찾으려했을 것입니다.
어떤 신분이나 지위, 명예를 떠나 무엇보다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지금에 만족하기’와 ‘지금보다 더 사랑하고 지금보다 조금 더 베풀기’에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에 만족하고,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과 눈빛을 나누고, 대화하고, 먹을 것을 함께 하고, 함께 해와 달을 보고 있음을 고맙게 생각하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일을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하고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무엇보다 그저 만족하는 것에 맘을 쓰겠습니다. 터무니없는 욕심 때문에 없던 괴로움을 만들어 고통을 겪는 일이 많습니다. 조건을 만들어 놓으면 자기의 뼈와 골수를 갈아서 사랑한 가족이라도 관계가 무겁게 됩니다. 조건적인 사랑, 조건적인 삶에 익숙하다보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장 아끼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조건을 내세우게 되고, 그에 상응한 그 무엇을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조건을 털어 버리고, 움켜 쥔 사랑의 감정도 놓고, 욕심에서 벗어나 보면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발견하고 얻게 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며, 가슴이 열리면서 자유로움을 얻게 됩니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환경과 조건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만 자신이 어떤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하찮고, 무의미한 삶이란 없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있고, 살고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깊고 큰 인연이요, 감사할 일인데 물거품 같은 욕심에 갇혀 괴로움을 만들어 인생 자체를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요?
‘나’라는 소견에 빠져 있는 동안 가족이라는 존재도 분별하는 대상이 되고 맙니다. 정작 누구도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이러한데 내 가족은 왜 이런가, 내가 이러하니 내 가족도 이러해야 한다, 그 어떤 무엇과도 달리 내 가족만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분별을 자꾸 갖게 될 때 욕심은 욕심을 낳아 몸과 마음을 흔들어 놓고, 몸과 마음이 흔들리니 늘 번뇌에 시달려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이런 존재이니 내 남편, 내 아내도 이래야 하고, 내 자식만큼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소견에 붙잡혀 허덕이는 삶은 오히려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실체도 모른 채 마음을 상하게 하고, 상한 마음은 몸을 상하게 하며, 그런 몸과 마음은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주변상황을 모두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아상’에 빠져 가정의 삶을 ‘보상’과 ‘사랑’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게 한다면 한없이 돌고 도는 소용돌이에서 헤어나기 어려우니 저절로 행복은 나와 별개의 존재로 아득히 멀어지게 됩니다.
나와 맺어진 인연은 그 누구와도, 그 어떤 것이라도 크고 작음이나 넓고 좁음, 높고 낮음, 얕음 깊음으로 분류할 수가 없습니다. 목마름을 축여 주는 한모금의 물방울조차 나의 영혼으로 헤아릴 수 없는 수억의 인연 끝에 얻어진 만남이듯이 모든 것이 알게 모르게 나의 영혼과 맺어온 억겁의 소중한 업연으로 이루어져 온 지금의 인연이니까요. 하물며 가족이라는 관계, 핏줄이라는 관계, 한 울타리에서 함께 하는 관계는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인한 인연이 아닙니다. ‘가족’이라는 그 자체가 무한한 사랑, 무한한 베풂, 무한한 자비의 연(緣)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일컬어지는 사랑, 베풂, 자비 그리고 무한함이 ‘가족’이라는 자체에 있건만 ‘나’를 앞세워 갈등하고 상처내고 후회하곤 합니다. 그러니 ‘괴롭다’는 그 맘 자체를 놓아버리고, 있는 이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이대로에 만족하고, 오히려 지금 조금 더 자비의 마음을 끌어내어 사랑하고, 베풀면서 ‘나’를 닦아가는 선연의 길을 가시길 바랍니다. 그 길이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