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수초(1590~1668)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사를 정리한 이능화는 조선시대 보조국사 지눌의 유풍(遺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조선 이후 보조의 법맥이 거의 끊어질 듯하다가 부휴 선수浮休善修선사가 그의 법손이 되어 본사(송광사)에 주석하다. 선수가 벽암 각성碧巖覺性에게 전하고, 각성이 취미 수초翠微守初에게 전하고, 수초가 백암 성총栢庵性聰에게 전하고, 성총이 무용 수연無用秀演에게 전하고, 수연이 영해 약탄影海若坦에게 전하고, 약탄이 풍암 세찰楓巖世察에게 전하다. 세찰에게는 상수제자인 묵암 최눌默庵最訥, 응암 낭윤應庵朗允, 제운 해징霽雲海澄, 벽담 행인碧潭幸仁이 있는데, 이 네 문파에서 종도들이 번성하다.
사실 목우자 가풍은 청허 휴정 스님과 그의 문도들이 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한 태고 보우太古普愚 스님을 해동 선종의 초조(初祖)로 자리매김한 이후 그 세력이 쇠잔해졌다가 부휴 선수와 벽암 각성이 송광사 중창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선교학이 융성하고 후손들이 번창하여 청허 문중과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취미 스님은 보조 지눌의 목우가풍을 중흥시킨 어른 가운데 한 분이다.
스님의 휘는 수초守初이고 자는 태혼太昏이며 호는 취미翠微이다. 속성은 성成씨인데 본은 창녕으로 조선 시대 명신인 성삼문의 방계 후손이다. 1590년(선조 23) 6월 3일 경성에서 태어났다. 놀이에는 반드시 불사佛事를 흉내 냈고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스님의 모습과 같았다. 어린 나이에는 부모를 여의고 형과 형수에게 의지하였고, 지학志學의 나이에는 어떤 범승梵僧이 “어찌 이리도 늦었는가?”라고 버럭 나무라는 꿈을 꾸었다. 스님이 형에게 꿈을 이야기하고 출가의 허락을 구하였지만, 형은 손으로 선사의 입을 막고 “그런 말을 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서 성벽을 넘어 설악산으로 도망가서 제월 경헌(霽月敬軒, 1544~1633) 스님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았다. 경헌 스님은 청허 휴정 스님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부터는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계율과 선을 수행하고 그 이치를 풀이하는데 산문山門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때문에 경헌 스님은 배우는 자들을 조종하는 것은 스님의 손에 달려 있었고, 입문자들이 헛되이 소득 없이 돌아가게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취미 스님은 17세가 되던 1606년(선조 39) 남쪽의 두류산에 이르러 부휴 선수浮休善修 스님에게 예배를 드리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때 벽암 각성 스님은 碧巖覺性은 부휴 스님의 으뜸 제자이자 소장로小長老로서 제일좌로 있었다. 어느 날 부휴 스님이 벽암 스님에게 말했다. “훗날 크게 깨치는 사람이 나온다면 반드시 이 사미가 그 주인공일 것이다. 이 늙은이가 그대에게 부촉하니 잘 이끌고 보호해 주거라.” 스님은 20여 세에 방방곡곡을 두루 참방하였다. 선사에게는 네댓 명의 도반이 있었는데 그들이 ‘오烏’라는 글자를 가지고 운을 삼아서 시를 청했다. 선사는 먼저 ‘금唫’ 자를 내놓더니, 마지막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생 동안 사치품이란 없었는데 平生無長物
오로지 하나 대지팡이뿐이라오. 唯有竹枝烏
소유와 무소유를 시비하기 전에 탈속한 스님의 수행자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날 벽암 스님이 법좌에 오르자, 선사가 법좌를 세 바퀴 돌고 나서 예배하고 질문드리니, 벽암이 말했다. “어디에서 한 동이를 얻었기에 베 짜는 노파가 찾아온 것인가?” 그러자 취미 스님이 말했다. “내려놓고자 하나 집착거리가 없습니다.” 마침내 벽암 스님이 부휴 선수 스님에게서 전승받은 부촉附屬을 은밀하게 지시하고 나서 그것을 설법으로 드러내어 인가하고 말했다. “그대야말로 종문(宗門)의 표준이로다.”
1629년(인조 7)에 스님은 대중의 청익請益을 받아들여 마침내 출세(出世)하고, 이에 옥천玉川의 영취사靈鷲寺에서 법회의 자리를 열었다. 상국相國 장유張維가 이를 기념하여 유리주琉璃珠 한 꾸러미를 보내 주었다. 1632년(인조 10)에는 관북關北에 초청되어 설법을 하다 설봉어록雪峯語錄을 읽고 오도悟道하였는데, 선사에게 있어서 영외嶺外의 선학禪學에 대한 관심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에 배를 타고 중국으로 유학하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37년(인조 15)에는 태백산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다시 남쪽으로 돌아와서 벽암 스님을 모셨는데 벽암 선사가 그만 방장산으로 돌아갔다. 이후 스님은 진원珍原으로부터 지리산으로 돌아왔고, 보개산寶蓋山으로부터 반룡산盤龍山으로 갔는데, 1643년(인조 21)에는 초청을 받아 칠불암으로 옮겼는데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 대중이 3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스님은 1660년(현종 1) 정월에 벽암 스님이 입적하자 조계대도량曹溪大道場으로 옮겨서 전후 12년 동안 주석하였다. 송광사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곳을 지나다가 영천(靈泉)의 물을 마신 뒤, 영천으로 인하여 뒷날에 큰 절을 세울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여 샘 주위에 돌을 쌓아두었다가 제자를 시켜 뒷날 그 자리에 절을 중창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뜻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1622년(광해군 14)에 응호(應浩)·승명(勝明)·운정(雲淨)·덕림(德林)·득순(得淳)·홍신(弘信) 등이 이극룡(李克龍)의 시주를 얻어서 중창하였다. 중창 후 벽암(碧巖) 스님을 초빙하여 50일 동안 화엄법회(華嚴法會)를 열었는데, 이 때 전국에서 수 천인이 모여서 시주하였다. 이로써 1636년(인조 14)에 벽암 스님이 약사전과 칠성각을 중창하기까지 계속 큰 불사를 벌여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 대웅전은 2층 건물이었고, 일주문은 절 남쪽 3㎞ 지점에 있는 만수교 앞에 세워졌다고 한다. 취미 스님 당시에는 사찰 내에 네 곳의 대전大殿이 있었는데, 불상이 없어 장인에게 명하여 주조하도록 하였다. 네 곳의 대전에는 실제로 여섯 구의 불상을 비롯하여 많은 탱화가 있었는데 그 수가 수천 점이나 되었다. 네 곳의 대전은 곧 화엄전華嚴殿·팔상전八相殿·약사전藥師殿·관음전觀音殿이다.
봄을 맞은 산과 강은 모두가 아름다운데
비가 그친 교목 숲에는 두견새 울어 댄다
강기탕을 달여 한 잔을 쭉 들이켜니
가슴이 상쾌하고 시원해 이내 책을 덮네
게송은 1667년(현종 8) 가을 7월, 묘향산에서 열람한 염송拈頌의 게송이다. 스님은 게송을 읊고 이에 탄식하여 말했다. “무릇 모든 문자는 술지게미와 같은 것인데 어찌 다른 맛이 있겠는가?” 이에 이르러 좌선의 자세를 취하고 설법을 하여 문풍이 엄격하였다.
이듬해인 1668년(현종 9) 4월 “생과 사는 운명이다. 그런데 어찌 약을 쓰겠는가.” 그리고는 6월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서 목탁을 쳐서 대중에게 이별을 고하여 말했다. “나는 79년을 살아왔는데 65년을 출가인으로 살았다. 그런데 무엇이 불만이겠는가? 그러니 탑도 세우지 말고 비명도 새기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어떤 사람이 게송을 요구하자 스님이 말했다.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이후 3일 후 재를 마치고서 무량수불을 소리 내어 염念하고 가부좌하여 합장한 채로 입적하였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7일이 지나서 다비를 하는 자리에 여섯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고 한다. 정골사리가 튀어나오자 제자 각흘覺屹 등이 이를 받들어 설봉雪峯의 벽송대碧松臺로 모시고 돌아갔다. 21일에 걸쳐 사리 2매枚를 얻었다. 세수는 79세이고, 법랍은 65년이다.
이듬해(1669, 현종 10) 3월 7일에 오봉산과 설봉산과 조계산의 세 곳에 탑을 세우고 안치하였다. 문도 중 해란海蘭·민기敏機·철조喆照·광륵廣泐·성총性聰 등이 상수 제자들이다. 취미 수초 스님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스님이다. 그러나 부휴 스님과 백암 성총 스님 사이에서 수행과 송광사의 중건을 통해 보조가풍을 융성시킨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