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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의 뒷간 법문

곽병찬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불가에서 중시하는 가치는 청정이다. 부처님 계신 곳을 청정 불국토라 하고 청정심을 사람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래서 불국토를 상징하는 가람은 비록 가난하고 소박하지만, 언제나 향기롭고 청결하다. 공양간에는 밥풀 하나, 마당에는 풀잎 하나 떨어져 있지 않다. 승복은 남루해도 언제나 정갈하고, 묵언은 정갈함의 깊이를 더해준다.

부처님께 올리는 육법 공양은 청정함의 상징이다. 청정심을 서원하는 향 공양, 두루 빛을 비춰 미혹과 어둠을 씻어내기로 작정하는 등 공양, 자비의 실천을 약속하는 꽃 공양, 깨달음의 열매를 회향한다는 과일 공양, 탐진치의 갈증을 말끔히 씻어내겠다는 차 공양, 법열의 기쁨을 함께 나누겠다는 쌀 공양. 모두 밖으로는 부처님 세계의 맑고 깨끗하고 밝음을 찬송하고, 안으로는 그런 부처님의 세계를 이루겠다는 서원이다. 아무리 가난한 가람이라도 철마다 다투어 피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로 장엄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의 여러 가람 가운데, 특별히 꽃과 향에 조예가 깊은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곳이 선암사다. 한 겨울에도 차 꽃향기가 은은하고, 천년 매향이 선열을 가람 곳곳에 흩뿌린다. 붉고 흰 동백, 은목서 금목서의 아련한 향기는 물론 영산홍 자산홍 모란 등 빛나는 꽃들이 가람을 사시사철 장엄한다. 여기에 옛 모습 그대로의 대웅전 천불전 심검당 칠전선원 등 여러 전각은 물론 낮은 돌담까지도 전혀 다른 불국토의 그윽함을 드러낸다.

그 아름다운 절집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전각이 하나 경내에 있다. 가람을 그렇게 향기롭고 아름답게 가꾼 옛 스님들이 왜 그런 전각을 들였는지 알 수 없는 곳이다. 영문 모르는 관광객들이야 그저 희한한 구경꺼리로 삼고, 일부 호사가는 선암사의 상징인 양 호들갑을 떨기도 하지만, 육법공양은 물론 청정 불국토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입구의 멋들어진 아치형 대들보, 규모의 방대함과 고품격의 짜임새, 창연한 고색은 오가는 이의 눈길을 확 끌기에 충분하다. ‘깐뒤’로 읽히는 현판 역시 발길을 잡는다. 그렇다고 왜 하필 경내에 해우소를 들인 것일까.

뒷간은 불이문과 담으로 이어져 있다. 불이문은 성속을 구별하는 문. 이 문을 지나는 자 세상의 알음알이를 놓아버리고, 삶과 죽음, 나와 너, 성과 속의 분별심을 벗어던지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밖은 분별의 세계요, 안은 불이의 세계인 것이다. 뒷간의 입구가 불이문 안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선암사의 여러 전각 가운데 하나다. 부처님도 근심을 덜어낼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헌데 뒷간만은 유일하게 뒤로도 열려 있다. 경내 전각의 출입구와 창은 모두 안쪽으로 나 있다. 그런데 뒷간의 입구는 경내이지만, 거기에 쌓인 것을 쳐내는 곳은 불이문 바깥이다. 안과 밖이 통하는 유일한 전각인 셈이다. 앞과 뒤, 안과 밖, 입구와 출구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 합하여 뒷간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 ‘불이’ 법문을 위해 경내에 둔 것일까.

아무리 불이법문이 최고의 가르침이라 해도, 인간 탐욕의 상징이요, 불결의 극치인 것들을 쌓아두는 곳을 경내에 둘 일은 아니지 않는가. 절집을 가보라. 어디에 공양간과 뒷간, 뒷간과 공양간이 입구를 마주보고 있는 곳이 있는지. 뒷간의 비밀은 그렇게 머리만 굴려선 풀리지 않는다. 들어가서 살펴보고, 쪼그리고 앉아 정견 정관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처자들이 기겁하는 이유며, 뒷간을 경내에 들인 이유를 느끼게 된다.

널찍한 내부 공간은 중앙 회랑을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뉜다. 오른쪽 4칸은 남성용이고, 왼쪽 3칸은 여성용이다. 각각의 공간은 가슴 높이의 나무 칸막이로 막았다. 일 보는 중에는 관찰할 수 없지만, 마치고 일어서면 누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높이다. 어라, 저기엔 곽 처사가 일을 보셨네, 아니 저 분은 방구조차 낄 것 같지 않은 신 보살 아니신가, 저기 김 처사는 근심을 얼마나 내놨는지 얼굴이 훤해지셨네, 따위의 눈 이야기가 오갈 법한 구조인 것이다. 그러나 누가 바로 일을 치르고, 그런 농담을 즐길 수 있을까. 남녀유별조차 벗어버리지 못했으니, 서로 얼굴 피하기에 바쁠 터.

화장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곳에도 역시 가슴 높이의 여닫이문이 있다. 밀고 들어가면 긴 복도가 이어지고, 역시 가슴 높이 칸막이로 나뉘어진 공간이 줄지어 있다. 각 칸에는 근심을 떨구는 널찍한 구멍이 뚫려 있다. 그곳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은밀하게 저만의 근심을 털어내는 해우소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해우소에 문이 없다. 쪼그리고 앉으면 바로 복도다. 복도를 오가는 사람은 누가 어디서 어떤 자세로 일을 보는지, 훤히 볼 수 있다. 처자들은 물론 남정네도 기겁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선암사 뒤깐에는 비밀이 없다! 이렇게 열린 공간에서 근심을 털 수 있을까, 나오던 근심도 쏙 들어가지 않을까?

그러나 그곳에 쪼그려 앉아 보라. 그리고 문도 없는 화장실, 경내가 훤히 보이는 빗살 구조의 뒷간 벽을 통해 세상을 응시해보라. 도대체 무엇을 가리고, 무엇을 숨길 것인가. 먹는 건 여봐란 듯이 하고, 털어낼 땐 꼭꼭 숨어서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 치고 일 보지 않는 이 어디 있는가. 쪼그려 앉아 일을 보지 않는 사람 어디 있는가.

게다가 먹을 땐 때깔도 다르고, 영양가도 다르고, 값도 다르고, 귀천도 다르다. 하지만 내보낼 때는 다를 게 없다. 모두가 같은 덩어리다. 기름진 것 먹었다고 윤기 나지도, 거친 것 먹었다고 냄새가 더 나는 것도 아니다. 알몸에 차이가 없듯이 내보내는 물건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임금님 똥이나 백성 똥이나, 부자 똥이나 거지 똥이나, 아이들 똥이나 어른 똥이나, 남자 똥이나 여자 똥이나 다를 게 뭔가. 모두가 똑같은 자세로 앉아 똑같은 것을 내보내는 데 숨기고 창피해하고 할 게 도대체 없는 것이다!

쪼그려 앉은 김에 좀 더 시간을 두고 집중해보자. 그래 먹고 나면 고작 저 물건인데, 좀 더 비싸고 귀한 것, 더 많이 먹겠다고 그렇게 아옹다옹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기름진 것만 먹다보면 설사 밖에 더 할 게 무엇이며, 남의 것 뺏어 먹다가는 배탈 밖에 더 날 게 무엇이며, 더 많이 먹겠다고 덤볐다가는 똥만 쌓이지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 그저 먹고 마시는데 욕심 부리지 않고, 주어진 것 알뜰하게 먹는 것이 근심을 덜 쌓고, 쌓인 근심 편하게 털어버리는 일 아닌가.

아귀계란 게 있다. 욕심 사납게 살던 인간이 가는 곳이다. 그곳에 가면 배는 산만한데 목구명은 바늘구멍 만 해 항상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는 곳이다. 욕심을 부려 조금이라도 많이 더 큰 것을 삼켰다가는 목이 막혀 죽을 고생을 한다. 배고파 고통 받는 이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이 가진 것까지 빼앗아, 더 많이, 더 잘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하는 사람이 머물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런데 이런 지옥이 있다면 어떨까. 욕심껏 먹어대기만 할 뿐 배설은 하지 못하는 지옥 말이다. 배는 산처럼 부푸는데도, 계속 먹어야만 하는 곳이니 괴로움은 아귀계보다 더 할 것이다. 허나 탐욕을 끊어버린다면 식탐에서 벗어나고, 배가 찢어지고 터지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과응보는 물론 개과천선까지 이루어지는 공간인 것이다.

공상이 여기에 이르고 보면, 입측오주 가운데 첫 주문이 절로 나온다.
“버리고 또 버리니 큰 기쁨 일세 / 탐진치 어둔 마음 이같이 버려 / 한 조각, 구름마저 없어졌을 때 / 서쪽의 둥근 달빛 미소 지으리 / 옴 하로다야 사바하~”

근심을 털어냈으면 탑돌이 하듯이 뒤깐을 한 바퀴 돌아볼 일이다. 그러면 다시 한 번 그 큰 규모와 과학적 짜임새에 놀라게 될 것이고, 선암사 뒤깐이 낮은 목소리로 전하는 법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법주사 통도사 선암사 주지가 한 자리에 모여, 각자 절에 대해 자랑을 했다고 한다. 법주사 주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웅전 앞에 동짓날마다 팥죽을 끓이는 쇠솥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 솥이 어찌나 큰 지 한번 팥죽이 눌어붙지 않고 골고루 익게 만들려면 배를 타고 들어가서 저어줘야 하지요, 그런데 지난 해 동짓날 들어간 스님이 팥죽 속에서 풍랑을 만나 아직 나오질 못하고 있답니다. 그러자 통도사 스님이 헛기침 한 번 하고 나서는 이렇게 풀어놓았다. 참으로 장합니다, 통도사 대웅전에 여닫이문이 있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이 드나드는지, 여닫을 때마다 돌쩌귀에서 생기는 쇳가루가 1년엔 서 말 세 되나 된다고 합니다. 말이 끝나자 선암사 스님이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잠시 귀를 쫑긋한 뒤 이렇게 말했다. 오늘 새벽 한 보살님이 서울로 올라갔는데, 가기 전에 뒤깐에서 근심을 덜고 갔죠, 밤도 깊었으니 지금쯤 서울에 도착했을텐데, 아마 새벽에 털어낸 근심이 지금쯤 바닥에 떨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저기 뒷간에서 무슨 소리 안 들리나.

모두 규모가 크긴 하지만, 대단한 허풍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허풍이 아니다. 티끌 하나에도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고 부처님이 가르치셨는데, 어찌 그것이 허풍일까. 세상만물은 크기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라, 보고 느끼고 깨닫는 마음 즉 마음의 크기에 따라 그 격과 의미가 달라진다. 한 생명이 우주이니, 그 생명을 살리는 팥죽의 공덕이야 얼마나 크고, 팥죽을 끓이는 솥이야 얼마나 거대한가. 부처님께 귀의하는 한 마음 얼마나 크고 거룩하며, 세상 근심 털어버리는 그곳의 공덕이야 어찌 크기로 잴 수 있을까.

뒷간은 경내에서 보면 1층이지만 뒤에서 보면 2층 구조다. 아래층은 근심이 쌓이는 곳이고, 위층은 근심을 털어내는 곳이다. 아래층엔 쌓인 것들을 내가도록 1/3은 휑하니 뚫려 있다. 그리로 쌓인 것이 훤하게 보인다. 양 옆으로는 가슴 높이만큼만 흙 담을 올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파리나 구더기 따위의 벌레도 별로 없다. 문 가까이 다가가서야 두엄 냄새만 난다. 놀라운 일이다. 뒷간 전체가 열려 있다지만, 그건 냄새를 분산시킬 뿐, 발생을 억제하는 이유는 못된다. 왕겨를 뿌려준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스님들처럼 채식만 하면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지만, 뒷간 이용객은 절집 식구보다 손님이 더 많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알 필요가 어디 있을까.

중요한 것은 그렇게 거둔 것들이 바로 우리의 먹을거리가 된다는 사실. 털어낸 근심은 그 너른 뒷간에서 두엄이 되고, 잡초 등을 발효시켜 만든 퇴비와 섞여 최고의 유기농 비료가 되어, 절집에 딸린 밭에서 각종 채소와 곡식을 길러낸다. 선암사의 맛깔스런 공양은 그렇게 오르는 것이다. 각종 곡식은 나의 생명으로 변화하고, 내가 털어낸 것들은 다시 먹을거리로 변한다. 나와 너, 인간과 동물,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은 그저 이런 생명의 순환으로 존재하는 것들. 그러니 어떻게 서로를 나눌 수 있고, 서로 다툴 수 있을까. 뒷간은 생명 순환의 고리였다.

현대의 생명의 위기는 이런 순환의 사슬이 끊긴데서 비롯된다. 똥은 쓰레기로 버려지거나 땅 속에 파묻히고, 이렇게 버려진 것들은 지하수와 강물을 오염시키고, 오염된 물은 생명을 병들게 한다. 대신 무기질 비료를 땅에서 퍼붓다보니, 땅 심은 약해지고, 각종 미생물과 벌레는 서식하지 못하니, 해충만 들끓고, 해충을 잡기 위해 제초제를 쓰다 보니 곡식 속엔 독이 가득하다. 사람은 자연의 귀함을 모르고, 이 세상 모든 생명이 한 몸임을 잊어버리고, 그리하여 다른 생명을 약탈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이제 자연은 바야흐로 그런 인간에게 복수를 하고 있다.

선암사 뒷간의 법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입측오주의 다섯 번째 진언으로 감사를 올리고 청정심을 다짐해본다.

“한 송이 피어나는 연꽃이련가 / 해 뜨는 푸른 바다 숨결을 본다 / 내 몸을 씻고 씻은 이 물마저도 / 유리계 푸른 물결 청정수 되리라 / 옴 바아라 뇌가닥 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