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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은 자본주의 체제의 공업(共業)이다

유응오
주간불교신문 편집차장


미국 소고기 수입 재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일반 시민들은 물론이고 중·고등학생까지 나서서 촛불시위 현장에 참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 소고기 수입의 문제점은 국민들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안전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미국은 해마다 약 3천7백만 마리의 소를 도축하고 있지만 그중 40만 마리만 광우병 검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도축 소의 고작 0.1%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24개월이나 30개월 이상 된 소는 100% 검사를 하는 유럽연합의 국가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대목이다.

며칠 전 필자는 광우병의 문제점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대 수의학과 우희종 교수를 만났다. 우희종 교수는 광우병에 대해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공업(共業)”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정의했다. 
광우병은 이종간 장벽을 무너뜨림으로써 발생한 질병이다. 광우병은 그 피해양상도 치료법도 아직까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원인만큼은 분명하다. 학계에서는 광우병의 원인 물질로 ‘프리온’이라는 단백질을 꼽고 있다. 프리온은 모든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핵산이 없는 단백질이다.

처음 광우병이 발생된 이유는 소에게 양의 내장을 먹였기 때문이다. 양의 털과 고기는 가공해 파는데, 내장을 버리려고 하니까 그게 아까웠던 것이다. 초식동물인 소의 생리구조를 조금도 이해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광우병은 인간중심의 사고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대변해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근대 이성주의의 도래이후 인류는 자연을 개발의 도구로만 생각해왔다. 근대 이성주의에 따른 자연의 도구화를 대변하는 예가 바로 ‘린네의 명명법’이다. 인류는 언젠가부터 ‘종-속-과-목-강-문-계’라는 범주에 맞춰 자연의 구성원을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배롱나무’나 ‘너구리’ 같은 자연의 구성 주체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속하는지 알지 못한다. 근대 이성주의는 고스란히 기술 테크놀로지에 대한 숭배로 이어졌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자연 파괴의 가속화를 초래했다. 심지어 ‘포디즘적 자본주의’라는 명목 아래 공급에 수요를 맞추는 일까지 생겨났다.

그 결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 체제가 존립하는 게 아니라 체제 존립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됐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불교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전도몽상’의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빈부격차와 더불어 자연환경 파괴라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져왔다. 흔히 남북문제라고 명명되는 인류의 빈부격차는 지구화 혁명 이후 점차 그 폭이 넓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자연환경 파괴도 그 개발속도에 발맞춰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인류에게 돌아오고 있다.


미국 소고기 수입 재개로 일고 있는 광우병 논란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농촌출신이어서 그런지 김종삼 시인의 <묵화>와 미당 서정주의 <소 × 한 놈>이 떠올랐다.
민족 언어의 족장이라고 칭송 받는 미당 서정주는 《질마재신화》를 통해 민족공동체의 시원(始原)적인 공간을 복원해냈다. 그 시집에는 <소 × 한 놈>이라는 시편이 실려 있다.  


왼 마을에서도 品行方正키로 으뜸가는 총각놈이었는데, 머리숱도 제일 짙고, 두개 앞이빨도 사람 좋게 큼직하고, 씨름도 할라면이사 언제나 상씨름밖에는 못하던 아주 썩 좋은 놈이었는데, 거짓말도 에누리도 영 할 줄 모르는 숫하디 숫한 놈이었는데, <소 X 한 놈>이라는 소문이 나더니만 밤사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저의 집 그 암소의 두 뿔 사이에 봄 진달래 꽃다발을 매어 달고 다니더니, 어느 밤 무슨 어둠발엔지 그 암소하고 둘이서 그만 영영 사라져 버렸다. “四更이면 우리 소누깔엔 참 이뿐 눈물이 고인다” 누구보고 언젠가 그러더라나. 아마 틀림없는 聖人 녀석이었을거야. 그 발자취에서도 소똥 향내쯤 살풋이 나는 틀림없는 聖人 녀석이었을거야.
- 미당 서정주의 <소 × 한 놈> 전문-


시 제목은 <소 × 한 놈> 이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소와 수간(獸姦)을 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시를 읽고 나면 ‘ × 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된다. 저의 집 암소의 두 뿔 사이에 봄 진달래 꽃다발을 매어 달고 다니던 총각. 그 총각은 “사경이면 우리 소 눈에는 참 예쁜 눈물이 고인다”고 말을 하곤 했다.
소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볼 줄 아는 총각을 시인은 성인(聖人)이라고 명명한다. 그 발자취에서도 소똥 향내쯤 살풋이 나는 성인(聖人)이라고.

미당 서정주가 그 총각을 성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소의 고단한 삶을 이해할 줄 알기 때문이다. 시인의 지적은 옳다. 모든 성인들은 자연의 메타포를 읽을 줄 안다. 자연의 말을, 그 태초의 언어를 아는 이가 바로 성인인 것이다.


농촌공동체 시절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어린 아이가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카우보이가 총을 쏘면서 소를 모는 것만 봤던 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고무신을 신은 어린애가 뿔 사이에다가 진달래를 꽂은 채 소를 끌고 다니는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 필자는 저녁마다 꼴을 먹는 소를 보러 가곤 했다. 천천히 꼴을 되새김질 하며 먹던 소의 그 그렁그렁하고 큼지막한 눈망울. 소는 눈이 커서 눈망울에 물기도 크게 맺힌다. 머리를 만지거나 잔등을 쓰다듬으면 소는 고개를 치켜들고 무슨 말인가를 하는 것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말은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였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의 <묵화> 전문-
 
소의 잔등을 쓰다듬던 고사리 손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