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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명의 원조 그리스인과 불교 수행자의 문답

<미란타왕문경>

조 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최근 한달간 그리스를 다녀왔다. 10년 전 1년간 휴직을 하고 인도를 순례했고, 티베트와 중국 등 불교와 유교 문화권을 많이 다녔으니, 이번 안식월엔 서양문명의 뿌리를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스는 지금은 그리스도교인 그리스정교회가 인구의 98%를 차지할만큼 기독교국가지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철학의 원조들을 낳은 곳이다.
의문을 봉쇄하고 믿음을 강조하는 기독교와 달리 그리스철학은 끊임없이 의문해 질문하고 답하면서 진리를 찾아가도록 한다. 그래서 그리스신전에 쓰여진 진리를 소크라테스가 전해 유명해진 ‘너 자신을 알라’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존재에 대한 물음과 ‘오직 모를 뿐’이라는 선불적 깨달음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없지않다.
그런 그리스철학과 불교의 만남으로 나온 불경이 <미란타왕문경>이다. 붓다보다 2세기 후에 태어난 그리스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는 기원전 336년 이집트와 페르시아 정복에 나서 마침내 인도의 북부까지 점령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를 떠날 때마다 많은 병사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알렉산드로스가 불과 33살로 그리스로 귀환 도중 사망한 뒤 각 정복지에선 그리스의 장군들이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메난드로스(미란타) 왕은 그리스인 디오도토스가 창건한 바크트리아왕조의 4대 왕이었다고 전해진다.
메난드로스왕은 그곳에서 인도의 스님인 나가세나를 만나 궁금한 내용을 묻는다. 그 내용이 <미란타왕문경>에 담겨 있다.
인도까지 정복해 세계 최초로 세계 제국을 일군 알렉산드로스와 석가모니는 둘 다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 삶을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남겼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머니의 꿈을 통해 그리스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아들로 여겨졌다. 그리스 신화에서 세상의 지배자로 숭상하는 제우스신의 아들이라면 마땅히 현세의 지배자가 될 것이란 암시가 내포돼 있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 히말라야의 도인인 아시타 선인이 와서 “속세에서 살면 현세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하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알렉산드로스는 10대부터 세계 제패의 야망을 품고 전쟁터로 나갔다. 그리고 20세때 왕위에 올라 곧바로 그리스를 통일하고, 세계 정복에 나섰다. 반면 석가모니는 10대에 성 밖에서 생노병사의 고통을 보고, 근본적인 성찰을 시작했다. 그래서 마침내 29세 출가를 결행해 6년만에 대각을 이루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칼을 들고 폭력을 통해 세상을 정복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욕망을 놓음으로써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200여년 뒤에 태어나 둘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나가세나 비구스님과 알렉산드로스의 후예인 메난드로스왕이 만남으로서 불교와 그리스철학이 회통하게 된 것이다.
실제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침략 후 그리스 문명과 동양 문명의 만남이 헬레니즘 문명을 낳았다. 미술사적으로는 당시 헬레니즘 문명에 의해 간다라미술이 탄생했고, 우리나라의 국보인 석굴암 불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에서 그리스정교회 수도원의 예배 모습을 보니, 가톨릭이나 개신교와 달리 악기를 사용하지않고 어두운 곳에서 고요한 낭독이나 아주 단순한 찬송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모습이 사찰의 예불을 연상케 했다. 그리스와 인도의 만남은 서로의 종교 의식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스철학의 문답에 익숙한 메난드로스왕은 나가세나 스님에게 궁금한 내용을 아낌 없이 질문한다. 경에 따르면 메난드로스는 의론가이며 궤변가이며 지성이 뛰어나고 예민했으며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 나가세나를 방문해 물었다고 되어있다. 이런 문답을 통해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진 메난드로스왕 나가세나는 처음엔 토론 방식 등을 놓고 상당한 줄다리기를 벌인다. 나가세나는 왕의 방식이 아닌 현인의 방식으로 토론할 것을 주장했다. 한마디로 왕의 권위를 이용한 일방통행식이 아닌 공정한 쌍방향 토론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메난드로스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제대로 된 문답이 이루어진다.
이 물음은 불교 초심자가 불교적 존재론 등 진리에 접근하는데도 아주 도움이 되도록 되어있다. 최초의 대화는 ‘나란 누구인가’로부터 시작된다.
“존자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저는 나가세나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왕이시여, 저와 수도를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은 저를 나가세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대왕이시여, 이 나가세나라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명칭이며 속칭이요 가짜 이름에 불과합니다. 이 이름에서 실체적 개아(個我)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에 깜짝 놀란 메난드로스는 “5백명의 그리스인과 8만에 달하는 출가 수도자 여러분, 이 나가세나는 ‘이름에는 실체적 개아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했소. 이를 인정할 수 있겠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먼저 몸에 난 털이 나가세나인가요?”로 부터 시작해 손톱, 피부, 살, 뼈, 내장, 침, 오줌, 두뇌 등을 하나씩 언급하며 그것이 나가세나가 아니라는 답변을 받아낸다. 그리고 물질, 감수작용, 지각 작용, 습관, 의식도 나가세나가 아니라는 답을 얻어낸다.
그런데도 메난드로스는 인정할 수 없어서 “그럼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나가세나는 누구냐?”면서 “존자여, 당신은 나가세나는 없다고 진실 아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나가세나는 왕이 타고온 수레를 들며, 다시 “바퀴가 수레입니까?”란 물음으로 출발해, 차체, 수렛대, 멍에, 바퀴살, 굴대빗장이 등이 수레가 아니라는 답을 얻어낸다. 그리고는 바지라는 비구니가 석가모니 앞에서 노래한 시를 들려준다.
“마치 부분이 바로 모일 때/수레라는 이름이 생겨나듯이/다섯 가지 요소가 존재하는 곳/ 중생이라 부르는 관습이 있네.”
나가세나는 이런 답을 통해 메난드로스가 만물이 상관지어져 결코 홀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연기론을 터득하도록 이끌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이것 생길 때 저것이 생긴다/이것 없기에 저것이 없고/이것 멸할 때 저것도 멸한다.”
이런 진리에 대해 메난드로스왕은 하나씩 깨달아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석가모니를 만나 불법에 대해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상대를 무조건 이겨서 굴복시키고 노예나 식민지로 만들어야 하는 지배와 굴복의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지구촌 2천년 전의 역사를 전쟁과 살육과 갈등으로 치닫게 한 서구문명에 변화를 줄 수 있었을까.
물질문명이 날로 발전하고 있음에도 자연 파괴와 함께 갈등과 인간의 소외와 고통이 늘어가고 있다. 이렇게 서구문명의 대안이 절실해지는 때에, 서구문명의 원조인 그리스인과 해탈 열반의 길을 제시한 불교 수행자의 문답과 같은 치열한 탐구가 인류문명을 위한 새로운 길을 위해 더욱 절실히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