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애 경
조계종 포교사단 서울지역단 부단장
부처님이 머물던 까삘라왓투 교외의 숲으로 왕궁의 시자가 달려왔습니다.
“부왕께서 위독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과 난다, 아난다와 라훌라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부처님은 난다를 먼저 보내고 당신도 뒤를 따르셨습니다.
번조증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숫도다나왕은 에워싼 친족들을 헤치고 아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좀 어떠십니까?”
“돌을 눌러 기름을 짜듯 고통이 짓누르는군요. 하지만 당신을 보니 아픔도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말없이 부왕의 다리를 주물렀습니다.
“편안합니다.” 숫도다나왕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당신은 부처가 되겠다는 꿈도 이루었고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꿈도 이루었는데 …, 나는 이룬 것 하나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군요. 부처님 두렵습니다.
숫도다나왕의 형제들이 눈물을 훔치며 위로하였습니다.
“형님, 지혜와 신통을 겸비한 부처님이 당신의 아들인데 무슨 걱정입니까.
아들 난다와 손자 라훌라, 그리고 아난다가 모두 이 자리에 있는데 악마의 그물인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조용히 걸음을 옮긴 부처님이 부왕의 이마에 손을 얹었습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덕은 청정하며 마음의 때도 없습니다.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들은 진리를 다시 생각하고 지금까지 쌓아온 선행을 믿으십시오.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나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제가 수없는 생애동안 쌓은 공덕과 보리수 아래에서 얻은 이익이 아버지를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숫도다나왕은 아들의 손을 잡아 가슴에 얹고 환한 미소를 보였습니다.
“이제 내 소원도 이루어졌습니다. 부처님을 보고 가는 마지막 길이 행복합니다.”
숫도다나왕은 누워서 합장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사까족 의사가 향수로 왕의 몸을 씻고 솜과 털과 명주로 시신을 감싸 관에 안치하여 시신을 다비장의 사자좌로 옮길 때였습니다.
“제가 앞쪽에서 관을 들겠습니다.” 친족들이 말리고 나섰습니다.
“부처님은 하늘 위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한 분입니다. 아무리 숙세의 인연이 깊다지만 인간의 상여를 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상여를 들지 않으면 비구는 부모의 은혜도 모른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생길 것입니다.”
실랑이가 벌어지는 사이 천인들이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 숫도다나왕의 관을 메었습니다.
부처님은 향로를 들고 다비장으로 앞장섰고 꽃을 뿌려 공양하고는 쌓아놓은 땔감에 불을 붙였습니다.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달려들 듯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무상하고 고통만 가득합니다. 영원한 것이란 어디에도 없으니 몸뚱이란 본래 덧없는 것입니다. 한 세상을 산다는 것은 환상과 같고 타오르는 불꽃과 같고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습니다. 모두가 잠시 그렇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무상한 몸으로 잠시 살다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저 사나운 불길을 보십시오. 이 불길을 뜨겁다 여길지 모르지만 욕심의 불길은 이보다 더 뜨겁습니다. 그러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의 즐거움을 얻으십시오.”
정성을 다해 숫도다나왕의 장례를 치르고 유골을 수습하여 탑을 세운 후 였습니다. 마하빠자빠띠가 궁중의 여인들과 함께 숲으로 찾아왔습니다. 그의 두 손에는 황금빛의 고운 가사가 한 벌 들려 있었습니다. “이 옷을 받아주십시오.” 그녀의 쓸쓸한 미소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부처님이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그 옷은 제게 주시는 것보다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하빠자빠띠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을 위해 솜을 타고 직접 베틀에 짠 가사입니다. 세존께서 직접 받아주십시오.”
“그 옷은 제게 주시는 것보다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어미의 간청입니다. 불쌍히 여겨 받아주십시오.”
뒤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있던 아난다가 합장하고 말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오랜 세월 정성을 다해 길러주고 보살펴주신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부디 가사를 받아주십시오. 길러주신 인연이 아니더라도 마하빠자빠띠께서는 신심이 돈독하고 청정한 우바이입니다. 부디 외면하지 마소서.”
그러나 부처님에게 돌아온 대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옷은 제게 주시는 것보다 승가에 기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승가의 물품이 되어 다른 비구의 손에 전해지는 가사를 마하빠자빠띠는 눈물로 바라보았으며 부처님께서 굳이 가사를 받지 않으신 까닭은 다음에 이어질 마하빠자빠띠의 애원 때문이었습니다.
“선왕의 그늘에 의지해 저는 몸과 마음이 편안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그늘이 사라졌군요. 이 왕궁에는 혼자 남은 여자들이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불쌍한 저희들이 세존의 그늘에 의지하게 하소서.”
“고따미여 이 교단에 여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청하지 마십시오.”
마하빠자빠띠는 부처님의 발등에 볼을 부비며 출가허락을 애원하였습니다.
“고따미여, 이 교단에 여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청하지 마십시오.”
여인들이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버지를 잃고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은 여인들이 출가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고따미여, 이 교단에 여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청하지 마십시오.”
마하빠짜빠띠는 소리 내어 통곡하며 숲을 떠났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은 다음 날 까삘라 거리에서 걸식을 마친 부처님은 새롭게 출가한 오백 명의 사까와 꼴리야 비구를 이끌고 웨살리로 향하셨습니다.
어느 날 까삘라 거리에 놀랄 만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국모 마하빠자빠띠가 손수 머리를 깎고는 거친 베옷을 입고 나타났으며 화려한 비단과 보석을 마다하지 않던 그녀가 화장을 지우고 맨발로 거리에 나서자 약속이라도 한 듯 여인들이 하나 둘 그 뒤를 따랐으며 꼴리야를 지나 말라의 땅으로 들어섰을 때 여인의 행렬은 오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을 그리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던 여인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고따미를 따라 웨살리의 큰 숲으로 향했습니다.
까삘라에서 웨살리까지는 50유순의 먼거리, 웨살리 교외의 큰 숲에 도착했을 때 그녀들의 몰골은 처참했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먼지투성이에 얼굴은 초췌했으며 먼 길을 걸은 발바닥은 피범벅이었습니다.
늦은 시각 여인들의 울음소리에 놀라 정사의 문을 연 아난다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으며 귀족의 부녀자였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마하빠자빠띠는 아난다의 옷자락에 매달려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으며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눈물을 멈추셔요. 제가 가서 부처님께 여쭙겠습니다.”
아난다가 다급하게 방문을 두드리며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 마하빠자빠띠께서 사까족과 꼴리야족의 여인 오백 명과 함께 정사로 찾아오셨습니다. 저 여인들이 교단에 들어와 수행자로 살도록 허락하소서.”
부처님은 단호하였습니다.
“아난다, 여자들이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청하지 말라.”
아난다가 무릎을 꿇고 애원하였습니다.
“스스로 머리를 깍고 험한 길을 맨발로 걸어온 여인들입니다. 부르튼 발에선 피가 흐르고 때와 먼지 가득한 얼굴에는 눈물 자국만 선명합니다. 부처님 간청합니다. 저 딱한 여인들이 교단에 들어와 수행자로 살도록 허락하소서.”
“아난다, 여자들이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청하지 말라.”
아난다는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애원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마하빠자빠띠는 젖을 먹여 당신을 기른 어머니십니다.”
“아난다 여자들이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청하지 말라.”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눈물짓던 아난다가 옷깃을 바로 하고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자도 수행하면 남자와 같이 수행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수다원과를 얻고 사다함과를 얻고 아나함과를 얻고 아라한과를 현생에서 증득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다, 아난다.”
“부처님, 만일 여자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면 그 첫 번째 기회를 마하빠자빠띠께 주십시오.”
눈을 감고 말씀이 없던 부처님께서 조용히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비구를 공경하는 여덟 가지 법을 받아들인다면 출가 수행자로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리라.”
아난다의 도움으로 여인의 출가가 허락되었으며 부처님께서는 비구니들에게 항상 비구들을 공경하며 비구들의 보호와 가르침 속에서 생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하빠자빠띠의 뒤를 이어 까삘라에 남아 있던 야소다라와 난다의 아내 자나빠다깔랴니, 난다의 여동생 순다리난다도 잇따라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며 마하깟사빠의 아내였던 밧다까삘라니 역시 비구니 승가가 생기자 교단에 합류하였으며 이후 새의 두 날개처럼 부처님 교단의 한 축을 이루게 된 비구니 승가는 보석처럼 빛나는 훌륭한 비구니들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죽음이 닥쳐야만 자기의 인생을 되돌아 보고 후회하게 됩니다. 더욱 불행한 사람은 그 삶을 돌아볼 새도 없이 죽음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죽음을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삶은 호흡사이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숨 한 번 들이쉬고 내 뱉는 그 짧은 순간에도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눈으로 볼 때 뭇 생명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삶은 죽음으로 가지만 모든 죽음 역시 삶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중생들은 살아 생전의 업에 따라 삶과 죽음을 한없이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은 눈으로 범부 중생들이 각각의 업에 의해 태어나고 죽는 모습과 태어나는 세상을 환희 보셨습니다. 그래서 대자대비한 부처님께서는 윤회의 실상을 모르는 중생들이 악한 업을 지어 괴로움을 받는 것을 안타까워 하신 것입니다.
더 늦기전에 우리 모두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합시다.